이야기舍廊/책과 문화 읽기

진흙 얼굴/송재학

취몽인 2017. 5. 1. 11:17

 

고등학교 문학동인회 선배

이름은 무수히 들었으나 한 번도 본 적은 없는.

의사라는..

음악과 소리에 민감한,

그가 인식하는 세계를 따라가는 쉽지 않은..

그래도 좋은 시를 쓰고

수 많은 세상의 경계를 즐기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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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사자가 여우를 덮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색 휘장이 내려졌다

열 개의 발톱이 탐스런 살을 파헤치는 과정은

너무 잔인하기에 실루엣으로 처리되었지만

흰 뼈가 부르짖는 비명은 빈 객석마다 꽂혔다

휘장 안이어서 분명하진 않지만

발톱은 제각기 따로 움직이며

여우의 털을 뽑고

두개골은 나뭇가지에 걸었다

군침을 삼킨 허기는 재빨랐다

어린 여우들은 정수리에 박히는

얼음의 냉정을 짐작해야만 했다

두려운 건 피가 아니라 피가 없는 짐승의 표정이다

가장 높은 음이 들리는 걸 보니 드디어

여우의 심장이 노려졌나 보다

 

휘장이 찢어진 곳에

단정한 입을 가진 피아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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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발자국

 

밤늦게 귀가해 방의 불을 켜자마자 미처 빠져나가지 못

한 것들, 너무 느려서 불빛과 내 시선에 꼬리 잡힌 일렁거

림이 있다 차츰 딱딱해지는 갓 구운 빵의 처음과 다를 바

없다 창틈이 움켜잡아 낡은 커튼이 된 느린 발자국들 그냥

눈감아주니 슬며시 커튼을 움직이네 그것은 게으름 마저

삼키는 입이 있다 날랜 것들은 이미 흩어져서 냄새조차

없지만, 느릿느릿한 숨결과 발자국의 주인은 가끔은 하품

처럼 가끔은 먼지처럼 능청스런 가구인 척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