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와 글 공부

김경주, 문장의 고도에서 느끼는 아찔함… 그 소망을 이루려 나는 탑승할 것이다

취몽인 2012. 1. 2. 15:16

 

 

매년 새해를 맞으며 이런저런 계획들을 세우곤 하는데, 올해는 경비행기 자격증에 도전해 보려 한다.

꽤 오래 전부터 새 소망 목록에 은밀히 넣어 두었던 것인데, 무슨 대단한 호기가 생겼거나 세상을 아래에 펼쳐 두고 한번 날아보자는

불량한 심사 때문이 아니다.

굳이 경비행기 자격증에 도전하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고소공포증 얘기부터 해야겠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고소공포증이 심해 비행기를

타는 것이나 높은 곳에 오르는 일에 남보다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미끄럼틀에 오르는 것도 몇 번씩 입술을 잘근 깨물고서야

시도해 볼 수 있었고, 동네친구들과 담벼락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한 채 해질 때까지 그 위에 쭈그려 앉아 놀림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이 두려움도 사라지기는 했지만 처음 비행기를 탈 때나 군 시절 강하훈련을 할 때의 진땀나는 체험은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높은 곳에 있을 때의 아찔한 느낌에 대해 몹시 집착하기 시작했다.

문장을 공부하고 문학을 경험하면서부터는 아예 이 경험에서 비롯된 이질감을 언어로 옮겨보고 싶다는 의욕마저 생겼다.

이른바 현기증이라는 것에 골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기증이 내 문학에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어떤 문장을 써 놓은 후 그 문장의 고도에서 현기증이 생길 정도로 아찔해 보고 싶다는 의지는 일종의 내가 가진 두려움에 대한 극복이면서

중독 같은 것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시란 내게 다양한 세계를 언어로 경험하면서 생기는 일종의 현기증 같은 것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 고백의 저의에는 저 경험들이 농축된

것 같기도 하다. 이 현기증에는 높이에서 생기는 것만이 아니라, 낯선 세계에 대해 반응하는 어지러움이나 멀미 같은 것도 포함된다고 여기는데,

이러한 생각을 조금 밀어 붙이면 현기증은 점점 과학이나 유물론적인 테두리를 벗어나 인간에게 상당히 은유적인 지점을 상정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에서다. 불필요해 보이는 논리와 해석, 수많은 경계로 뒤섞인 이 세계에 예술가로 살아가는 과정이란 결국 그러한 세계들 속에서 다양한 현기증을

앓는 것일지도 모르며, 다른 경계에 대한 어지러움을 극복하거나 그것을 매혹으로 바꾸려는 용기 또한 조금은 필요해 보인다.

일 년에 몇 개월씩 여행을 하면서 쌓아온 낯선 세계에 대한 이질감들도 대개는 현기증을 겪다 오는 경험과 비슷하다. 낯선 도시, 낯선 언어, 낯선 풍경은

내게 다양한 은유를 시사한다. 문학의 결과물은 결국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 것인가'에 해당하는 질문들일 것이므로. 경비행기 자격증을

새해 소망목록에 두고 지난 십여 년간 내가 품어온 은밀한 생각 속에는 내 몸을 통과하며 그러한 것들을 조금 더 밀도있게 경험해 보고 싶은 이유가 자리한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날고 싶다'가 아니라 '나는 원하는 만큼 충분히 떠 있고 싶다'에 해당한다. 어떤 높이에 실려 내 목측으로 바람과 구름의 양과 질을

측량해보고 싶기도 하고, 온갖 구름의 종류와 바람의 질에 대해 민감해 질 수 있는 자격증의 코스는 자격증을 따지 못한다고 해도 내게 충분한 현기증의

설렘을 주는 과정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비행기 자격증을 따려면 해외로 나가야 했지만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도전하는 레포츠에 가까워졌다. 심지어 경비행기 자격증을

딴 후 남미 같은 곳에 가서 배나 기차로 가기 힘든 곳으로 유통이나 배달 사업을 하는 직업군도 생기고 있다는 기사도 보았다. 글쟁이로 살면서 언어로

실감하고 있다고 믿는 문장의 현기증들을 몸을 관통시켜 내게 직접 배달시켜보고 싶은 소망이 단순한 낭만처럼 보일까 봐 나는 오래 생각을 숨겨왔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는 빨간마후라를 내 시의 목덜미에 매달아 주고 싶었으므로, 머지않아 그곳에 나는 탑승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새해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좀더 예의를 갖추고 살았으면 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희망은 자신의 삶에 대해 예의를 평생 갖추겠다는 것이므로.

우리가 너무 막막해서 언어로는 부를 수 없는, 살면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곤란함 속에서도 희망은 우리에게 도저한 울림으로 삶을 지탱시킨다는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우리는 여전히 희망에 대해 무모할 정도로 활기차다. 나는 곁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모국어의 질감 속에서 이 곁이라는

단어의 질감처럼 애연하고 희망찬 단어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새해엔 사람들이 곁이라는 단어를 주변에서 좀더 많이 찾고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