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마음의 소리를 들어 보셨나요

마음의 소리를 들어 보셨나요 ​ 빈집 바람벽에 빈 가방 하나 시꺼멓게 걸렸다. 한쪽 손잡이 끈만 저물녘 대못질의 벼랑끝에 매달렸다. 잔뜩 벌어진 지퍼. 고성방가다. ​ 위의 시는 문인수 시인의 적막소리라는 시집에 실린 ‘가방’이란 시의 일부다. 지퍼가 열린 채 벽에 걸린 낡은 가방을 보면서 시인은 고성방가의 소리를 듣는다. 이 고성방가는 물론 귀로 듣는 실제 소리가 아니다. 그저 시인의 마음 속에만 들리는 아우성이다. ​ 우리는 소리를 귀로 듣는다. 그러나 간혹 시인들이나 종교에 심취한 성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이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는 내용을 뉴스를 통해 접할 때도 있다. 특별한 ..

비루한 독서

. 13명의 한국 소설가와 6명의 아시아권 작가들이 나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 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이 책의 독자는 과연 누구일까? 좀 더 엄밀히 따져 이 책의 마케팅 타깃은 누구일까? 아마 글 쓰기를 하고 있거나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 사실은 시나 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 범위가 달을 둘러싼 달무리 정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당장 나만 해도 자선 바자회 헌책 판매코너에서 이 책을 굳이 고른 이유가 내 글을 쓰는 데 무슨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였으니. 시집은 이제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또는 시인을 동경하는 얼치기 딜레땅뜨들이 없으면 아무에게도 팔리지 않는다. 이 좁은 땅에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사람 8만명이 잘 나가는 소수의 시인을 잘 나가게 ..

나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

. 13명의 한국 소설가와 6명의 아시아권 작가들이 나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 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이 책의 독자는 과연 누구일까? 좀 더 엄밀히 따져 이 책의 마케팅 타깃은 누구일까? 아마 글 쓰기를 하고 있거나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 사실은 시나 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 범위가 달을 둘러싼 달무리 정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당장 나만 해도 자선 바자회 헌책 판매코너에서 이 책을 굳이 고른 이유가 내 글을 쓰는 데 무슨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였으니. 시집은 이제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또는 시인을 동경하는 얼치기 딜레땅뜨들이 없으면 아무에게도 팔리지 않는다. 이 좁은 땅에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사람 8만명이 잘 나가는 소수의 시인을 잘 나가게 ..

김매는 사람 / 김애리샤

김매는 사람 / 김애리샤 그는 평생 김매는 사람이었다 배추밭에 감자밭에 어린 수수밭에 자라나는 잡초들을 뽑아내느라 고개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모낸 논에, 살아 보겠다고 자라나는 피들을 뽑아내느라 그의 발은 언제나 부르터 있었다 그의 가슴과 등은 그대로 밭이고 논이었다 잡초들을 뽑아내며 피를 뽑아내며 그는 마음 속 그리움들도 뽑아내려 에썼다, 그러나 김을 매거 또 매도 사라지지 않는 풀이 있었다 아무리 밟아도 아무리 뽑아도 죽지 않는 고향 아버지는 평생 북쪽에 두고 온 마음밭 김을 매셨다 -김애리샤 걷는 사람. 2021 -------------------------------------- 내 앉은 이 곳은 내 아버지가 남긴 묵정밭 소출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마른 풀만 뽑고 있노라면 깡마른 아버지 입성이 ..

수학자의 아침 /김소연

. 강과 나 / 김소연 지금이라고 말해줄게,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깊지는 않다고, 작은 배에 작은 노가 있다고, 강을 건널 준비가 다 됐다고 말해줄게, 등을 구부려 머리를 감고, 등을 세우고 머리를 빗고, 햇빛에 물기를 말리며 바위에 앉아 있다고 말해줄게, 오리온 자리가 머리 위에 빛나던 밤과 소박한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지구 건너편 어떤 나라에서 네가 존경하던 큰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도 들었다고 말해줄게 돌멩이는 동그랗고 풀들은 얌전하다고 말해줄게, 나는 밥을 끓이고 담배를 끊고 시간을 끊어버렸다고 말해줄게, 일몰이 몰려오고, 알 수 없는 옛날 노래가 흘러오고, 발가벗은 아이들이 발가벗고, 헤엄치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강가, 뿌리를 강물에 담근 교살무화과나무가 뿌리를 강물에 담그고, 퍼덕이는 ..

나는 왜 왼쪽에서 비롯되었는가?

나는 왜 왼쪽에서 비롯되었는가? 변변치 않은 시집을 한 권 내고 나니 여기저기서 묻는 사람들이 좀 있다. 왜 시집 제목이 ‘나는 왼쪽에서 비롯되었다’ 인가? 모름지기 시집 제목이란 시집 전체 또는 시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일 거라고 짐작하는데 이 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제일 클 것이다. 스스로 좌빨아라는 고백인가? 하는 의심이 제일 클 것이다. 보수 꼴통의 도시 내 고향 친구들의 경우는 거의 그렇게 단정하고 있는 것 같다. ^^ 그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다. 내 정치성향은 온건 진보이니 왼쪽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시집 제목은 위의 정체성 대변이외에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으면 좋다. 평생 광고쟁이로 살아온 내가 그걸 모르겠는가? 그 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고 할 수 있으려..

몰운대행/황동규

. 풍장 33 아내가 내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한다. 드디어 썩기 시작! 먼저 입이 썩고 다음엔 항문이 썩으리라. 마음을 마알갛게 말리는 저 창밖의 차분한 초겨울 햇빛. 입도 항문도 뭉개진 어느 봄날, 돈암동 골짜기 정현기네 집 입과 항문 사이를 온통 황홀케 하는 술 계속 익을까? -황동규문지. 1991 ------------------------------------- 그새 나이가 좀 더 먹긴 했나 보다. 근 십 년 맛있게 먹었던 황동규가 좀 싱거워졌다. 입이 썩은 것일까? 황동규의 시는 정답이라고 발문을 쓴 이가 말했다. 그래서 싱거워진 것인가? 항문이 썩은 것일까? 518이다. 울화로 썩은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22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