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469

수학자의 아침 /김소연

. 강과 나 / 김소연 지금이라고 말해줄게,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깊지는 않다고, 작은 배에 작은 노가 있다고, 강을 건널 준비가 다 됐다고 말해줄게, 등을 구부려 머리를 감고, 등을 세우고 머리를 빗고, 햇빛에 물기를 말리며 바위에 앉아 있다고 말해줄게, 오리온 자리가 머리 위에 빛나던 밤과 소박한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지구 건너편 어떤 나라에서 네가 존경하던 큰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도 들었다고 말해줄게 돌멩이는 동그랗고 풀들은 얌전하다고 말해줄게, 나는 밥을 끓이고 담배를 끊고 시간을 끊어버렸다고 말해줄게, 일몰이 몰려오고, 알 수 없는 옛날 노래가 흘러오고, 발가벗은 아이들이 발가벗고, 헤엄치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강가, 뿌리를 강물에 담근 교살무화과나무가 뿌리를 강물에 담그고, 퍼덕이는 ..

몰운대행/황동규

. 풍장 33 아내가 내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한다. 드디어 썩기 시작! 먼저 입이 썩고 다음엔 항문이 썩으리라. 마음을 마알갛게 말리는 저 창밖의 차분한 초겨울 햇빛. 입도 항문도 뭉개진 어느 봄날, 돈암동 골짜기 정현기네 집 입과 항문 사이를 온통 황홀케 하는 술 계속 익을까? -황동규문지. 1991 ------------------------------------- 그새 나이가 좀 더 먹긴 했나 보다. 근 십 년 맛있게 먹었던 황동규가 좀 싱거워졌다. 입이 썩은 것일까? 황동규의 시는 정답이라고 발문을 쓴 이가 말했다. 그래서 싱거워진 것인가? 항문이 썩은 것일까? 518이다. 울화로 썩은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220518

게 눈 속의 연꽃 /황지우

. 인천으로 가는 젊은 성자들 전철은 사람을 싣고 서울로 오지만 빈 전철은 사상을 싣고 인천으로 간다 盲人 父子가 내 主를 가까이 를 부르며 내게 가까이 온다 무슨 일이 잔뜩 임박해 있는 우중충하고 무거운 하늘 아래 안양천 뱀풀들이 멀리 하양 아파트 지대로 기어가고 버림받고 더러운 모든 것들이 신성하다 나는 연락하러 그곳에 간다 -황지우 문지. 1990 -------------------------------------------- 칠순이 된 황지우 시인은 이제 시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누가 ‘왜 시를 쓰지 않느냐?” 물었더니 ‘시는 젊은 사람들이나 쓰는 것이지.’ 라고 답했다 한다. 1990년, 시인은 서른 아홉, 시는 그 무렵에 쓰는 것이 맞는지 모른다. 나란히 두고 읽는 김소연의 시집 그녀의 나이..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

. 혼돈의 감정가 I A. 하나의 난폭한 질서는 하나의 무질서다. 그리고 B. 하나의 거대한 무질서는 하나의 질서다. 이 둘은 하나다. II 봄의 모든 초록빛이 푸른빛이라면, 그것은 그러하다. 남아프리카의 모든 꽃들이 코네티컷의 테이블 위에서 밝게 빛난다면, 그들은 그러하다. 영국인들이 실론의 차 없이도 산다면, 그들은 그러하다. 그 모두가 질서정연한 방법으로 진행된다면, 그것은 그러하다. 내재적 모순의, 본질적 통일성의 법칙은, 항구만큼 즐겁다. 한 나뭇가지의 붓놀림만큼 즐겁다. 더 위쪽에 있는, 특정한, 이를테면, 마천드에 있는 한 나뭇가지의, III 결국 삶과 죽음의 뚜렷한 대비는 이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서로를 취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적어도 그것이, 주교들의 책들이 세계를 설명할 때의 이론이었다..

자두나무 정류장 /박성우

. 종점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길 범일운수 종점에서 나는 내린다 종점 트럭행상에서 귤 한 봉다리 사서 집으로 간다 산골 종점에서 태어난 나는 서른일곱 먹도록 서울은 다 같은 서울이니까 서울엔 종점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다 종점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오래전 뛰쳐나와 다시 종점, 집으로 간다 - 박성우 ----------------------------------------------------------------------- 깜짝 놀랐다. 전북 정읍 자두나무가 있는 집에서 사는 줄 알았던 시인이 우리 동네 버스 종점에 내리다니 서울 금천구 시흥동 범일운수 종점, 내 사는 곳에서 귤 한 봉다리 사서 집으로 가는 시인이라니 10 년 전에 나온 시집이니 시인은 다시 자두나무 곁으로 돌아갔을지도 모..

가기 전에 쓰는 글들 /허수경

. 가기 전에 쓰는 글들 많은 경우, 이미 죽은 사람들의 글을 읽는다. 죽음은 오래 전에 떠나 책에는 그림자도 없다. 그저 잘 살아 있었을 때의 뜨겁거나 미지근한 가슴이 적혀 있을뿐. 우리는 그의 흔적을 읽고 느끼거나 놀라거나 가슴을 쓸어내린다. 여기,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 속에서 죽어간 사람이 죽어가면서 쓴 글이 있다. 읽는 나는 아직 식지 않은 그 소문의 안타까움과 함께 이제는 죽은 그의 글들을 읽는다. 시시껄렁하게 살고싶다 했던 그는 시시껄렁하게 죽어가진 못했다. 소문 때문이다. 죽은 허수경의 아직 산 목소리는 내용과 관계없이 우울하다. 220403 쓴다는 일과 생각한다는 일의 先後를 생각하게 된다. 종일 뭔가를 쓴 시인. 종일 뭔가를 생각해서일까? 종일 뭔가를 쓰느라 생각을 한 것일까? 어느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