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그때 19

1985년 세탁소

. 1985년 세탁소 아줌마 저예요. 하늬 엄마 전화기를 든 아내의 호들갑이 대단하다 그쪽도 만만찮다. 진정한 반가움은 고함을 동반한다. 1985년 1월 2일 덜컥 취직이 되고 출근을 위해 올라온 서울 연애중이던 아내는 대책 없이 따라왔다. 하루 여관서 자고 세탁소 문간방 한칸을 월세로 얻었다. 부엌도 화장실도 없는 단칸방 집 주인 이름이 임재덕이었다. 이 년 살았다. 저질러 놓은 동거를 되돌리지 못해 신입사원은 저녁마다 술집으로만 돌았다. 몇 푼 월급 대구 집으로 떼보내고 술값 하고나면 동거인에게 줄 돈이 없었다. 그 난감한 가난과 외로움의 시간에 아내는 세탁소집 주인네에 기대 버텼다. 밥도 얻어먹고 배신 중인 사랑에 대한 위로도 받고 삼십칠년이 흘렀다. 문득 그 세탁소 아직 있을까 물음에 인터넷을 뒤..

詩舍廊/그때 2022.04.15

1978년 깡다구

. 1978년 깡다구 사실 어중간한 것들은 아무도 잘 건드리지 않는 법이다 상징도 실익도 없으니까 사실 나는 어중간하지도 않았으니 누가 날 건드릴 가능성은 상당히 낮았는데 늘 누가 건드릴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무관심에 진저리쳤고 아무나 건드리기만 하면 하염없이 처맞더라도 한 판 싸우고 싶었다. 나도 싸울 줄 안다. 여기에 나도 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새 학년 새 반에 들어선지 한달쯤 뒤 이름도 기억없는 멀쑥한 녀석 하나 지나가는 한 마디를 던졌는데 나는 폭주했다. 의자를 집어 던지고 욕설을 퍼붓고 주먹을 날렸다. 훨씬 많이 맞았지만 끝까지 덤볐다. 녀석이 피했고 아이들은 뜨악해 했다. 세월 한참 지나고 사람들에게 한번씩 말하곤 했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학..

詩舍廊/그때 2022.03.30

그때, 91년 겨울, 대흥동

. 그때, 91년 겨울, 대흥동 졸업하고 서울 와 첫 직장 6년 술빚에 거덜나고 회사에서도 어머니 집에서도 쫒겨나 이대 앞 이층 싸늘한 단칸방에 피신했을 때 지난 봄에 태어난 둘째는 불기 없는 냉방에서 제 엄마를 울리고 멋모르는 첫째는 어쨌는지 기억 한 토막도 남지않은 시절 술값이 없어 더 술을 못먹는 놈을 두고 동료들이 애는 살리자 집앞에 분유며 기저귀 두고 가던 부엌도 화장실도 없는 그 이층 방에 네 식구 슬어 있던 때 무섭게도 무섭게도 그 오들오들한 시간을 혼자 버텼던 막 서른 살, 두 딸의 엄마 아직도 맘이 시린 아내는 그때를 절대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대 앞 대흥시장 오른쪽 골목 내리막 초입에 얼어붙은 그 이층집 단칸방 버러지 같았던 家長 한 놈 철도 염치도 없이 엎어졌던 그때 그 겨울 200822

詩舍廊/그때 2022.02.14

그때, 76년, 77년

. 그때, 76년, 77년 옛사람 만나러 빙 돌아 가는 버스 안 하굣길 계집아이들 여남은 명 탔다 뒷자리에 오글오글 모여 수다가 자글자글 하다 여고1이나 2쯤 되는 녀석들 내딸들도 벌써 십오 년 전에 지나온 나이들 저 퉁퉁하고 속 없는 것들이 뭐 좋다고 그때는 버스 정류장에서 집앞 골목에서 목 빼고 기다렸을까? 지들 끼리면 분명히 저렇게 조용필이나 산울림 이야기 하느라 아니면 총각 교생 사모 하느라 달 비린내 풍겼을텐데 왜 내 앞에선 턱이 치켜졌는지 그래봤자 뭘 하지도 못할 주제에 닭벼슬 같은 그 턱이 어찌 그리 보고 싶었는지 환갑의 버스 안 참새 소리 같이 쏟아지는 수다를 뒤통수에 맞고 있자니 자꾸 돌아보고 싶네 더이상 뛰지 않는 가슴 두들겨 돌아가고 싶네 220214

詩舍廊/그때 2022.02.14

그때, 13년 태평로

. 그때, 13년 태평로 더 내려갈 곳 없는 바닥 잠깐 매달렸던 보험쟁이 시절 나서면 초라하고 안 나서면 불안하던 하루하루 사무실에서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던 중에 지나가던 매니저가 한 말 늘 웃는 모습이 참 좋아요 웃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왜 웃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 바닥도 아닌 이곳에서 나는 왜 더 이상 웃지 못하는 것인가 201006

詩舍廊/그때 2020.10.10

그때, 81년, 진부한 사랑

. 그때, 81년, 진부한 사랑 고 3때 시화전에서 처음 만났던 그녀 한 두 번 억지로 만난 뒤 다시 볼 수가 없어 법무부장관 모교 앞에서 오래 기다려 겨우 만난 못생긴 친구에게 전해달라 부탁한 쪽지엔 첫 눈 오는 날 동성로 태극당에서 기다리겠노라 그 겨울엔 진눈개비 내리는 척 한 날도 있었고 잠깐 눈발 비친 날이 며칠 1월이 돼서야 첫 눈이 내렸는데 꼬박꼬박 두 시간씩 태극당 출입문만 바라 봤었는데 삼 년쯤 지났을까 길에서 만난 그 못생긴 친구가 전해준 말 그게 도대체 언제적 수작이니? 200809

詩舍廊/그때 2020.10.06

그때, 81년 북부경찰서

. . 그때, 81년 북부경찰서 잠깐 따라가자 했다 지프를 타고 시민운동장을 지나 도착한 북부경찰서 정보과 성도 잊어버린 느물했던 형사는 K의 누구누구에 대해 물었고 나는 마치 열사라도 된 양 임의동행을 따졌다 갓 스무살 아는 것도 없었고 한 것도 없었지만 나를 알아주는 대한민국 형사가 고마왔다 어느 날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했느냐 따위 몇 장의 진술서를 쓰고 나와 그가 사준 짬뽕을 먹고 학교로 돌아왔다 형우형은 물탱크 위에 올랐고 데모는 국지적이었다 아무에게도 경찰서 붙들려 갔다온 얘기는 안하고 나의 비겁은 슬금슬금 술집으로 향했다 무환이형이 곡주사에 씨알의 소리 맡겨놓았으니 찾아가라 했으나 학생증 맡기고 술만 먹었다 200829

詩舍廊/그때 2020.10.03

그때, 82년 복현동

. . 그때, 82년 복현동 오후 강의 제끼고 어디 막걸리 한 잔 없나 후문 식당들 기웃거릴 때 반쯤 문 열린 분식집 동창녀석 라면을 기다리는 모습 냉큼 들어서 한 젓갈만 먹자 하니 갑자기 제 먹던 라면에 침을 퉤 뱉어 휘휘 젓곤 이것도 먹겠냐 웃던 놈 조용히 수저 뺏어 국물까지 알뜰히 먹어치우고 가레라면 잘 먹었다 엿먹이고 나서는데 마른 목구멍에서 욕지기가 솟아오르던 그때 그 복현동 그 새끼 누구였더라? 201002

詩舍廊/그때 2020.10.02

그때, 그 야구장

그때, 그 야구장 의구가 4.5톤 트럭을 몰고 응원 왔던 날 목동이었나? 수원이었나? 이제는 그리 감격적이지 않은 모교의 고교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대통령기였나? 청룡기? 봉황대기? 아니면 황금사자기? 시상식이 진행되는 그라운드로 내려가 박수도 치고, 사진도 찍다가 상도랑 또 누구였는지 동창회장 헹가레를 쳤었지 뜬 놈도 띄운 놈도 다늙어 뜬 놈 바닥에 패대기 쳐버리고 바닥은 병원에 실려가고 두고두고 21대 놈들이 그랬다 말했다는 요 몇 년 새 엄청 유명해진 총장님, 우리 선배님 그때, 제대로 처리했어야 했다. 상도야 이 말 한다고 화내지마라. 양우야 이건 그냥 詩다^^

詩舍廊/그때 2020.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