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1전 발표 詩 127

자목련

자목련 겨울이 끝나가니 슬픈 이야긴 이제 그만 겹겹의 침묵들을 이제는 벗어버려 저것 봐 먼 산 기슭에 연두들이 오잖아 간질간질 햇살이 어깨를 두드리면 마지막 인사가 네 입술에 또 쌓일까? 검지로 살살 밀어내 말꼬리를 느껴봐 미련 같은 몇 마디 좌악, 벗겨낼 수 있을지 살짝 맺히는 비린내도 새삼스레 그리울 거야 저것 봐 봄이 왔잖아 네 입술을 열어봐 210330 개작 *한국시조문학 21호 2021년 여름호

천 년의 거리 한 뼘

천 년의 거리 한 뼘 경주 남산 약사골에 얼굴 없는 부처님 한 분 언제 목이 달아났는 지 알 수는 통 없지만 그 자리 지킨 건 천 년 먼 하늘은 알지요 얼굴 대신 하늘 걸고 앉은 부처 바라보며 사람들은 어느 허공에 절을 자꾸 했을까요 얼마전 땅을 더듬다 떠난 머리 찾았대요 몸에서 십 미터 땅에서 오십 센티 천 년의 거리치곤 너무 가깝지 않나요? 혼자서 바라보았을 안타까운 그 거리 비바람과 빈 눈초리에 온 몸 닳은 부처님은 얼굴 만나 어색했을까? 그래도 좋았을까? 아닌가? 그저 돌일뿐! 별 일 없다 했을까? *한국시조문학 2021. 제 20호

오래된 평화

오래된 평화 늙은 나무 밑동이 오래된 흙과 만나는 곳 그곳은 경계 하나 아무 나뉨이 없는 곳 무연히 서로 이어져 나무이고 흙이고 아래로 위로 옆으로 나무는 늘 천천히 걷고 흙은 언제나 그 자리에 덮어주고 밀어주고 평화를 이루었나니 서로 웃고 있다네 세상 어느 곳에서 저렇게 무심하게 간절히 부둥켜안은 평화를 볼 수 있을까 먼 바람 한 점 불어와 쓰다듬고 떠나네 2020한국시조문학 18,19호

별우물

별우물 가문 여름 그믐밤 삽 들쳐 맨 아버지 뒤를 아이는 물 찰랑이는 세수대야 들고 따른다 우물을 새로 팔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물 담긴 대야를 이리저리 옮겨보렴 대야에 담긴 물에 별이 내려 앉을 거야 많은 별 담기는 곳에 물이 제일 많단다 마당 돌며 별을 담던 아이가 고개 들어 아빠, 여기가 별이 제일 많아요 대야엔 찰랑이는 별 까만 밤이 한 가득 어린 앵두 기웃거리는 마당 한 겹 밑으로 눈 맑은 별들이 졸 졸 졸 모여들고 아이의 까만 눈에도 맑은 별빛 한 가득 2020한국시조문학 18,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