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좋은 詩 모음 215

김매는 사람 / 김애리샤

김매는 사람 / 김애리샤 그는 평생 김매는 사람이었다 배추밭에 감자밭에 어린 수수밭에 자라나는 잡초들을 뽑아내느라 고개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모낸 논에, 살아 보겠다고 자라나는 피들을 뽑아내느라 그의 발은 언제나 부르터 있었다 그의 가슴과 등은 그대로 밭이고 논이었다 잡초들을 뽑아내며 피를 뽑아내며 그는 마음 속 그리움들도 뽑아내려 에썼다, 그러나 김을 매거 또 매도 사라지지 않는 풀이 있었다 아무리 밟아도 아무리 뽑아도 죽지 않는 고향 아버지는 평생 북쪽에 두고 온 마음밭 김을 매셨다 -김애리샤 걷는 사람. 2021 -------------------------------------- 내 앉은 이 곳은 내 아버지가 남긴 묵정밭 소출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마른 풀만 뽑고 있노라면 깡마른 아버지 입성이 ..

언덕 꼭대기에서 소리치지 말라

. #굿모닝詩한편 . . 언덕 꼭대기에서 소리치지 말라 . . 저기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물론 당신이 하는 말은 옳다, 너무 옳아서 그것을 말하는 것 자체가 소음이다. 언덕 속으로 들어가라. 그곳에 당신의 대장간을 지으라. 그곳에 풀무를 세우고 그곳에서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라. 우리가 그 노래를 들을 것이다. 그 노래를 듣고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 . -올라브 H.하우게 ----------------------------------- 동지에게 외치는 건 잠시 멈추자. 주저하는 이웃에게 가서 망치질하고 노래하자. 그 노래를 듣고 그는 바르게 갈 길을 정할 수 있다. 지금 언덕 꼭대기에서 내려오시라. 페이스북 바깥으로 나가시라.

역사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역사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 일곱 개의 성문을 가진 테베를 누가 건설했는가? 책에는 왕의 이름들만 적혀 있다. 왕들이 울퉁불퉁한 돌 덩어리를 직접 날랐는가? 그리고 수없이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는가? 황금으로 빛나는 리마의 건설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는가? 만리장성이 완성된 날 저녁 석공들은 어디로 갔는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승리의 개선문들로 가득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는가? 끝없이 칭송되는 비잔티움제국에는 궁전들만 있었는가?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곳을 집어삼키는 밤에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어 가면서 그들의 노예를 애타게 불렀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 혼자서?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을 물리쳤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은 데려가..

사라짐의 기술 /나오미 쉬하브 나이

. 사라짐의 기술 . . 사람들이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죠?'하고 말하면 아니라고 말하라. 사람들이 파티에 초대하면 대답하기 전에 무슨 파티인지 잊지 말라. 그곳에서 누군가는 너에게 자신이 한때 시를 썼노라고 큰 소리로 말할 것이다. 종이 접시에 기름투성이 소시지를 들고서. 그것을 떠올린 다음에 대답하라. 사람들이 '우리 만나야 한다'고 말하면 '왜?'라고 반문하라.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소중한 어떤 것을 기억하려는 것일 뿐이다. 나무들과 해 질 녘 사원의 종소리를. 그들에게 말하라. 새로운 계획이 있다고. 그 일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군가가 식료품 가게에서 너를 알아보면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 양배추가 되라. 십 년 동안 소식 없던 누군가가 문..

빈집 / 김사인

빈집 김사인 문 앞에서 그대를 부르네. 떨리는 목소리로 그대 이름 부르네. 나 혼자의 귀에는 너무 큰 소리 대답은 없지 물론. 닫힌 문을 걷어차네. 대답 없자 비로소 큰 소리로 욕하네 개년이라고. 빈집일 때만 나는 마음껏 오지. 차가운 문에 기대앉아 느끼지. 계단을 오르는 그대 발소리 열쇠를 찾는 그대 손가락 손잡이를 비트는 손등의 흉터 문 안으로 빨려드는 그대의 몸, 잠시 부푸는 별꽃무늬 플레어스커트 부드러운 종아리 닫힌 문틈으로 희미한 소리들 새어나오지. 남아 떠도는 냄새를 긴 혀로 핥네. 그대 디딘 계단을 어루만지네. 그대 뒷굽에 눌린 듯 손끝이 아프지만 견딜 수 있지 이 몸무게 그리고 둥근 엉덩이 손이 떨리네 빈집 앞에서.

저녁노을처럼/ 서정주

. #굿모닝詩한편 저녁노을처럼 . . 산 밑에 가면 산골째기는 나보고 푸른 안개가 되야 자최도 없이 스며들어 오라 하고 강가에 가면 흐르는 물은 나보고 왼통 눈물이 되어 살구꽃 잎같이 떨어져 오라 한다 그러나 나는 맨발을 벗고 먼저 이 봄의 풀을 밟겠다 그리고 그다음엔 딴 데로 가겠다 접동새 우는 나룻목에서 호올로 타는 저녁 노을처럼 그다음엔 딴 데로 가겠다 -서정주. 현대시집3. 1950년. ---------------------------------------- 멜랑꼴리한 금요일 아침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이해하느라 기진한 탓인가? 남현동 예술인마을 시장통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미당이 딴 데로 간지도 한참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의 詩는 이렇게 남아 턱없이 어렸던 술친구를 위로한다..

선림원지에 가서 /이상국

. #시한편 禪林院址에 가서 / 이상국 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채는 아직도 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經典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

환한 걸레 / 김혜순

. #시한편 환한 걸레 / 김혜순 물동이 인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저 아래 우물에서 동이 가득 물을 이고 언덕을 오르는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땅속에서 싱싱한 영양을 퍼올려 굵은 가지들 작은 줄기들 속으로 젖물을 퍼붓는 여자들 가득 품고 서 있는 저 나무 아래 누워 그 여자들 가랑이 만지고 싶다 짓이겨진 초록 비린내 후욱 풍긴다 가파른 계단을 다 올라 더이상 올라갈 곳 없는 물동이들이 줄기 끝 위태로운 가지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중에 분홍색 꽃이 한꺼번에 핀다 분홍색 꽃나무 한그루 허공을 닦는다 겨우내 텅 비었던 그곳이 몇 나절 찬찬히 닦인다 물동이 인 여자들이 치켜든 분홍색 대걸레가 환하다 ---------------------------------- 나무는 여성적이다. 나무 아래서 ..

너를 이루는 말들 / 김소연

. 너를 이루는 말들 / 김소연 한숨이라고 하자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할 재간이 없어 지구 바깥을 맴돌며 평생토록 야간 노동을 하는 달빛의 오래된 근육 약속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한 번을 잘 감추기 위해서 아흔아홉을 들키는 구름의 한심한 눈물 약속이 범람하자 눈물이 고인다 눈물은 통곡이 된다 통곡으로 우리의 간격을 메우려는 너를 위해 벼락보다 먼저 천둥이 도착하고 있다 나는 이 별의 첫번째 귀머거리가 된다 한 도시가 우리 손끝에서 빠르게 녹슬어 간다 너의 선물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상어에게 물어뜯긴 인어의 따끔따끔한 걸음걸이 반짝이는 비늘을 번번이 바닷가에 흘리고야 마는 너의 오래된 실수 기어이 서글픔이 다정을 닮아간다 피곤함이 평화를 닮아간다 고통은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난다 소원이라고 하자 그것은 두 발 ..

독거 /이문재

. 독거(獨居) 강 건너가 건너온다. 누가 끌배를 끌고 있다. 물안개의 끝이 물을 떠난다. 봄이 봄의 안쪽으로 들어선다. 나무 타는 단내가 봄빛 속으로 스며든다. 내륙이 온통 환해지고 있다. 황급히 속옷을 챙겨 입던 간밤 꿈이 생생하다. 내가 홀로 서지 못히니 내가 이렇게 홀로 있는 것이다. 냉이 씻어 고추장에 버무린다. 물길 따라 달려가던 능선들이 문득 눈을 맞추며 멈춰 선 곳 바람결에 아라리를 배우는 곳이다. 끌배가 끊어진 길을 싣고 있다. 강의 이쪽을 끌며 건너오고 있다. 외로울 때면 양치질을 했다는 젊은 스님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