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식구 15

비우고 가야한다

. 비우고 가야한다 딱 죽을 힘만 남았을 때 그는 똥 싸러 일어났다. 그러나 한 번 더 넘어진 뒤 다시 침대로 올라가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 앉아 생각했다. 이건 어쨌던 비워야 한다. 한 팔은 바닥을 다른 팔은 침대 모서리를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죽음은 그를 잡아당겼다. 털썩 다시 주저 앉은 것은 그의 굳은 몸뚱이만은 아니었다. 털썩, 열린 괄약근 사이로 쏟아진 똥. 그는 똥바닥에 주저 앉았다. 어쨌던 쌌다. 왜 비우고 가야한다 생각했는 지는 미끈거리는 악취와 함께 사라지고 그는 눈을 감았다. 긴 잠이 시작되었다. 아들이 와서 바닥을, 엉덩이를 누렇게 닦아내는 동안에도 그는 깨지 않았다. 자면서 새 옷을 입고 그는 반나절 뒤 갔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하면서. 220514

詩舍廊/식구 2022.05.19

한 편의 詩

. 한 편의 詩 또 넘어진 어머니는 한바탕 검은 똥을 싸고 그 위에 주저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어머니의 하초를 닦고 지워지지 않는 어머니의 속을 닦았다 그리고 그만 잠깐 잠든 어머니는 다시 깨지 않았다 대신 집요하게 유언 대신 한 무더기 검은 똥만 남기고 그 난감한 처치의 뜻만 남기고 갔다 칠갑의 문장 그 짙은 침묵으로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하신 것일까 詩 쓰는 아들에게 남긴 詩 한 편, 그 뜻이 무엇일까 201022

詩舍廊/식구 2022.02.14

두물머리에 서서

. 두물머리에 서서 딸에게 네 결혼을 앞두고 시 한편 건네자 오래 마음 먹었다 한 일 년을 실감이란 말에 매달렸다 네가 핏덩이로 내게 온 것도 네가 오늘 결혼을 하는 것도 아빠에겐 참 실감나지 않는 일 하지만 그 말은 너무 무책임 하더구나 그러다 얼마 전 강가에 서서 문득 생각했다 삼십 몇 년 전 어느 낯선 기슭에서 맑은 샘물 한방울이 솟았고 이태 뒤 또 어느 숲속 풀잎 위에서 이슬 한 방울 떨어졌을 것이다 두 방울 물은 따로 바위틈을 비집고 실개천을 따라 흐르다 조그마한 시내를 이뤘겠지 하나는 너른 들판을 하나는 푸른 계곡을 부딪히고 넘어지며 흘러왔겠지 그런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여기 따로 또 같이 두물머리에 닿은 너희 둘 이제는 강이 될 시간이다 우리가 전에 흘러 네게 새긴 물길은 모두 지워버리고 ..

詩舍廊/식구 2022.02.14

改葬 1

. 改葬 1 습이 많이 찼구먼요. 그런 셈치고는 잘 가셨네유. 젊어서 돌아가셨나보네유. 치아가 곱게 남았네유. 사십년이라는데 참 용한 일이지유. 베옷이 참 질기지유. 살이 다 녹고 뼈가 삭는 동안에도 삼베는 여즉 그대로잖아유. 남은 유골을 꽉 붙들고 있지유. 그 베 머리를 잡아당기면 쑥 온몸이 딸려나오지유. 보세유. 겨우 발목 하나만 빠지고 다 나왔잖어유. 발치께 조금만 파면 빠진 발목도 나올거유. 갈비뼈가 없다구유? 갈비뼈는 제일 먼저 녹아유. 그 다음엔 척추가 녹구유. 틀을 짜고 버티는 것들은 제 할 일 끝나면 먼저 사리지는 법이유. 그 참 치아가 어찌 저리 멀쩡할까유. 파헤쳐진 무덤 옆에 깔린 하얀 전지 종이 위에 아버지는 대충 위 아래 순서로 얼기설기 누웠다. 사십년 만의 햇발은 유난히 눈부셨지만..

詩舍廊/식구 2021.04.29

임종

. 임종 1. 아들아 네 손으로 따뜻한 네 손으로 내 마지막 찌꺼기들을 치워주려마 이제는 가야할 때 제일 먼저 내 속부터 비우련다 그러니 아들아 네 손으로 따뜻한 네 손으로 네가 나온 곳 들여다보며 깨끗이 닦아다오 그 어두운 곳이 우리 인연이란다 나 떠난 뒤에도 냄새는 남을 터 그건 그냥 구린 미련이라 생각하거라 2. 아들아 이제는 떠나야겠다 나를 침대에 뉘어주겠니 너는 아마 내가 잠든 줄 알겠지만 조금씩 깊이 나는 떠난단다 오래 깨어나지 않아도 놀라지 마라 누구든 언젠가는 깨지 않는 잠을 잔단다 아들아 너를 한번만 더 볼 수 있을까 이 무거운 잠을 아마도 벗을 수 없을 것 같구나 3. 아들아 왜 내 곁에서 울고 있니 네 목소리 들리느냐고? 그래 듣고 있다 네 따뜻한 손도 만져지는구나 너는 아직도 모르는..

詩舍廊/식구 2020.09.28

맏이

맏이 얼마 전 분가한 큰 딸 방에 자보려고 누웠다. 바닥에 매트 두 장을 겹쳐 깐 자리는 살짝 불편하다. 침대를 사주려 해도 굳이 싫다 했었다. 제 나름 편안한 잠자리 스타일이 있겠거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분가하면서 녀석이 제일 먼저 산 가구는 침대였다. 그간 잠자리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저 엄마 아빠 돈 쓰게하기 싫어 참았던 것. 제 동생도 침대 생활을 한지 오래 됐는데 혼자 바닥에 누워 삼십년을 잠들었던 내 큰 딸. 그 자리에 닿은 등에 칼날이 닿는 듯하다. 맏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참 서럽고 나쁜 서열이다. 나도 아내도 맏이이건만.. 190522

詩舍廊/식구 2019.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