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GEO 110

소나무

. 소나무 삼십 년 전 어쩌다가 폭삭 망한 아들 탓에 떠밀린 내 어머니 꼿꼿한 울화 대신 서슬이 솟아오르던 소나무 하나 있었다 오십은 팔십이 되고 이제는 떠난 어머니 다 시든 섭섭함으로 내려다 보고 있나니 이마에 서리를 꽂고 죽지 않는 소나무 무던히 키만 자라 철도 없는 우듬지 아무리 애를 써도 오층을 못넘기고 욕처럼 매단 솔방울 흐득흐득 흘리네

詩舍廊/GEO 2022.02.14

할미꽃

. 할미꽃 오래 주무신 아버지 깨우러 올라갔더니 어릴 적 당산 마루 부스스 폈던 할미꽃 꼬부랑 고개 숙이고 어서 오게 부르네 봄볕은 한결 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막 돋는 풀 들쑤시며 철 없이 낭자한데 떠난 이 마음이 깊어 못 떠나는 할미꽃 지난 가을 곱게 다듬은 무덤자리 양지뜸에 유난히도 많이 핀 건 소식 미리 들은 탓인가 사십 년 누운 자리가 흰머리로 가득하네 210414 /211029

詩舍廊/GEO 2022.02.14

시나나빠

. 시나나빠 유채란 이름은 서른 지나 처음 들었다네 연두들 고개 내미는 요맘 때면 푸성귀라곤 냉이 달래 봄동이 전부 김장독도 비어가고 푸르딩딩 풋것이 궁금할 때 시나나빠가 상에 올랐다네 쌉싸름하고 아삭아삭하던 진한 멸치 젓에 잘 버무린 시나나빠 겉절이 군둥내 쌓인 밥맛을 깨웠었는데 서울 와서 어머니가 몇 번 담궈주셨던 게 끝맛이었는데 그때도 이미 옛적 맛은 아니었다네 이유가 뭘까? 시나나빠 아니라 유채나물이라 그런 건 아닐까? 일본말이란데 그것도 정확하진 않다네 하여간 시나나빠 김치는 맛있었고 유채김치는 별로 였다네 그나마 어머니 돌아가셔서 시나나빠도 유채도 김치되긴 틀렸다네 먼 기억의 맛이라네 210309

詩舍廊/GEO 2021.03.09

꽃 차례

. 꽃 차례 삼년전 어느 길가 북새에서 마른 꽃대에 매달린 정구지 씨앗 한 주먹 털어 담아 왔었다 아이 얼굴만한 화분에 좌르르 쏟아 얼금얼금 덮고 잊어버렸다 이듬해 봄 더벅머리 총각 머리숱처럼 빽빽한 잎 돋았다 가을이면 화르르 주저앉고 그 다음 봄에 또 파란 숱 가득하다 가을에 곧장 시들었다 꽃 한 줄 못피우고 경칩 지난 작은 무덤에 또 간난쟁이 앞니처럼 새 잎 포릇 솟아 오른다 삼년 동안 올해는 네가 나가고 내년엔 또 니들이 나가고 삼년째 이제는 니들 차례다 지들끼리 순서라도 정해둔 것일까 잔뿌리 빽빽한 작은 행성에서 제 차례를 기다렸을 새까만 정구지 씨앗들 이번에는 하얀 별빛 같은 꽃송이 몇이나 피워낼려나 아직도 엎드려 속절없는 제 차례 기다리는 친구들 위해 또 그냥 줄기만 폈다 접고 비켜줄려나 21..

詩舍廊/GEO 2021.03.07

소금쟁이 2

. 소금쟁이 2 소나기 지나고 바람 잦은 날 한껏 늘어진 버드나무가 곤한 못물에 재우면 바늘끝 같은 점으로 면을 찍은 직선이 착착 이동한다 회전은 없다 후진도 없다 앞으로이 가나 좌향좌 우향우 뿐인 교련시간 같은 제식의 오후 하늘을 그으며 먼 산 그늘 뿌리 자르며 수직 바늘 끝의 소리 없는 종횡무진 금간 면경 위로 지난 자리 재바르게 따르는 그림자와 뒤로 번지는 물결의 살짝 웃는 입꼬리 외에는 없고 팽팽한 비닐 가르듯 쭉 뻗는 칼질로 한 나절 수면을 모두 베고나면 소리도 없이 서쪽 핏빛 속으로 사라지는 참 가느다란 오후 육각형 소실점 210109

詩舍廊/GEO 2021.03.07

세인트루이스의 흰고래

세인트루이스의 흰고래 사월, 비 그친 미주리는 구역질을 쏟는다 붉은 옆구리에 연신 부딪히는 속도들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 미시시피를 만날 때 까지는 쇳소리 섞인 클라리노를 멈추지 않는다 바다는 낡은 기억 거슬러 오른 길들은 넓이를 잃고 길이를 얻었다 정수리에서 솟구쳐 오르는 한숨만큼 굶주림 속으로 부조리는 꾸역꾸역 쌓인다 상류는 지워지고 발원은 도처에 생긴 강 시간이 무너져 내린 절벽 아래로 죽은 것들을 모아 산 것들을 키우며 흐르는 미시시피 델타에 부려놓을 것들과 어쩔 수 없는 끼니를 고른다 축 늘어진 수염으로 거른 세인트루이스의 어제는 반쯤 녹은 페놀로 끈적하고 반짝이는 것들이 쌓이는 뱃속은 자꾸 견고해진다 썩지 않는 바다는 등 뒤에서 유구하다 구토를 받아 먹고 서서히 녹슬어가는 고래 한 마리 하얗게 ..

詩舍廊/GEO 2021.01.10

서쪽이 우는 소리

. 서쪽이 우는 소리 쿠우 쿠우 쿠우우 해질 무렵이면 자주 서쪽이 울곤했다 낡은 기적소리처럼 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오래 궁금했다 꼼짝않는 찌를 바라볼 때 뜨거운 날 해방촌을 지날 때 불은 라면을 먹을 때 강아지가 멀뚱히 나를 볼 때 서쪽은 느닷없이 울곤 했다 쿠우쿠 쿠우쿠 쿠우우 빈집 한 켠이 무너지는 소리 녹슨 철골 쓰러지는 소리 채석장 떠낸 돌이 갈라지는 소리 대체로 무언가 상실에 가까운 소리로 서쪽은 울었다 쿠쿠 쿠쿠쿠 쿠쿠 쿠우우 믿을 수 없었지만 산비둘기 울음이라 했다 설움의 더께를 긁어내는 듯한 소리로 새는 왜 서쪽에서 우는 것일까 붉은 지평선 토하며 누구를 부르는 것일까 쿠우쿠 쿠쿠 쿠우우쿠 210109

詩舍廊/GEO 2021.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