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2습작 29

유월

. 유월 * 친구 어림도 없는 시애틀에서 친구가 왔습니다. 멀리서 온 것 만큼 먼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세월이 그냥 가는 건 아니었고 소주는 여전히 무책임 했습니다. 판단이란 건 다 틀렸더군요. * 사람을 오래 만나면 다음 하루는 힘들다. 예의는 체력을 먹고 차려진다. * 잘 지낸다. 큰 근심도, 대단히 아프지도 않고 혼자서 잘 지낸다. 보고싶은 사람은 오래 참다가 간신히 보고 그리고 후회하며 잘 지낸다. 빈 방에 혼자 앉아 잘 지낸다, 스스로에게 소식을 전하며 나도 잘 지낸다. * 오늘은 아무 일도 없는 날 시집 한권 내고 나니 뚝 끊어진 詩 아쉽진 않아 사람 마음 다 거기서 거기 슬픔은 지난 세월 속에 맺혀 있으니 또 언제고 스멀스멀 기어 나올 테니 * 부모님 두 분 인천 앞바다로 떠나신 뒤론 비만 ..

돌담 풍경

. 돌담 풍경 / 김재덕 겨울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희미한 남쪽 바다 멀리 낮은 섬 웅크린 대평포구 무뚝뚝한 절벽까지 아무도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장작 옮기는 사내 입 다문 검둥 개 겨우 파란 마늘밭 낮게 엎드린 마당까지 모두 슬픈 줄 알았습니다 울타리 넘은 바람 한 줄기 코끝을 지납니다 가느다란 스침을 따르는 조용한 미소를 봅니다 참 낮은 목소리들이 들렸습니다 바다는 잘게 소근거리고 섬은 두근거립니다 풀잎도 설핏 인사를 건네고 절벽은 푸르게 웃습니다 아, 그것은 조용한 대화였습니다 돌담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선 수 많은 수평들이 귓속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 마음을 눕혀 놓고 돌아 왔습니다. 2016

오월

. 오월 * 시작부터 지쳤다. 봄 바람이 드세다. 미운 곳에서 청탁이 왔다. 칠월의 일을 논하는 일, 아직은 잊자. * 내 몸인데 왜 당신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가 가족은 모두 당신 사랑의 틀에 맞아야 하는가 당신의 생각 대부분 맞지만 어디 세상이 정답으로만 살아지는가 당신의 불편함 그것 때문에 나는 얼마나 침묵해야 하는가 * 내가 지긋지긋하다.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 90년대 초의 시집을 읽는 일 30년, 긴 목숨의 황지우, 황동규. 내게 詩는 그저 저 시절. * 예술은 예술가가 하는 것 허수경은 그렇게도 예술가가 되고자 했는데 詩는 꼭 예술이어야 하는가? 詩는 詩면 되지 않나? 그래서 난 예술을 못하나? 어쩔 수없는 딜레땅뜨여.. * 트레이너는 자꾸 가슴을 펴라 한다. 가슴이 하늘을 보게 하라 한다...

모태신앙

. 모태신앙 어머니 살아계신 동안은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의 하나님을 위해 어머니의 하나님을 믿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하나님에게로 돌아갔고 어머니의 하나님도 갔다. 엉거주춤한 나를 남겨놓고 어머니도 하나님도 돌아간 교회 목사님은 하나님 이야기 몇 번에 교회 이야기를 수십번 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으니 예수는 못박혀 돌아가지 못하고 기도들 끝에 매달려 돌아간 하나님께 아멘을 전달한다. 집요한 사랑의 이름으로 교인들이 교회에 오지 못해도 헌금은 줄지 않았다 한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은 태연했다 하나님이 떠났어도 교회는 남아 있으니 하나님이 떠났으니 목사님이 하나님보다 교회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못박힌 예수를 인질로 잡고 있는 한 부자는 나사로를 전령으로 보내는 일에 실패했다. 하나님이 여..

乾川

. 乾川 경주 전이던가 경주 지나서이던가 아득하다 건천 마른 들 휘돌아가며 흐르던 낮은 돌들의 강 물을 본 기억이 스며들어 건천인지 낙향지인이 어설프게 소를 키운다는 소문 같은 건천 단 한번도 목적지가 된 적 없어 지나치게 지나친 건천 자갈의 강 그 따그르르 흐르는 건천 경주 전이었나 경주 다음이었나 입술 훔치고 마른 침 삼키는 건천, 거기 건천 220515

사월

. 사월 * 사월이다. 아마도 아직 만나지 못한 코로나 굳이 만날 것 같은 사월이다. * 운동을 시작했다. 쉬 죽진 않을 것 같아서. 그 날을 향해 걸어가기 위해서 야쿠시마 여행을 위해서 열심히 할것이다. * 시간만 정한 약속에 장소가 없다. 어디로 가야하는가? * 지금 詩를 생각하지만 멀지 않은 시절에 神 생각으로 바뀔줄 안다. 詩는 결국 神에 닿을 것이다. * 혹시 누가 오지 않을까 하는 매일 역시 아무도 오지 않는 매일 * 어깨가 아프다. 짊어지지 않아도 될 것들을 돈 주고 짊어진 탓이다. 건강도 아파야 오는가? * 아직 까먹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평생에 처음 있는 일. 잊지마라. 너는 아직 까먹을 수 있다. * 금방 마음이 편해졌다.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이는 결국 나다. 아니다. 돈이다. *..

골로 가는 길

. 골로 가는 길 골로 가는 수가 있다 어릴 적 심심찮게 들었던 협박이다 골은 어디일까? 얼마나 무서운 곳일까? 생각했었다 트럭 뒤에 무작정 싣고 골로 가면 아무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더라 철 들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해줬다 오늘에서야 제대로 알았다 가창골이라 했다 1946년 학살이 있었던 곳 민간인을 트럭에 싣고 가 죽이고 묻었다는 골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으면 겁주는 말이 되었을까 골로 간다는 말 그 공포는 이제 입을 열 수 있을까 201106

보이차를 마시며

. 보이차를 마시며 두번째 우려낸 보이차를 마시며 그를 생각한다. 아침에 우린 보이차 한 주전자를 종일 마신다는 그. 코끝에 어리는 향과 혀에 닿는 느낌 그리고 따뜻한 기운이 좋다는 그. 어제 그와 절연했다. 같은 보이차를 마시지만 나는 맛을 잘 모른다 했고 그는 잘 안다 했다. 그는 나를 더 잘 아는 듯하고 스스로의 웃음은 우아하다 말했다. 나는 나를 잘 모르고 그의 웃음은 불편하다. 그는 자신의 표현이 잘못된 것처럼 말했으나 여전히 내 잘못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선을 넘지말라는 그에게 주저하지 말고 넘으라 말했다. 사실 난 보이차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처럼. 22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