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1습작 498

. 힘 . . 한 며칠 소주값이나 벌어보자 남들 다 한다는 주식을 해봤다 남들 다 번다는 돈은 못벌고 눈알 빨개지고 마음만 뒤숭숭해졌다 늘 하듯 책은 읽었으되 마른 바닥에 다 튕겨져 버렸고 언제 뭘 쓴 적이나 있었던가 머리 속이 뻘밭이다 돌이켜보면 이런 일 솔찮이 있었더랬다 입술 꿴 미늘 가느다란 힘에 썩은 내장 뿌리까지 끌려나오던 그런 일 201212

십일월

. 십일월 * 태초 이래 나고 죽은 생명들이 내 숨결을 드나드는 걸 느끼는 일 * 묵은 친구를 만나는데 자꾸 떠오르는 반성 살아온 지난 날이 모두 두려움 * 금요일 일주일이 지쳐 긴 하루가 미리 목놓는 시간 *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택시를 탈 수 있고 밥을 사먹을 수 있는 형편 가을에 침묵할 수 있는 형편 * 최근의 측은은 모든 강아지에 닿아있다.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아 불타는 도미니끄를 벌떡 일어나 바라보는 세퍼드 그 측은 죽음보다 더한 사랑의 측은 * 아내의 생일에 이젠 좀 과하게도 살자 마음 먹는다. * 늘 그런 첫눈이 섭섭하게 왔다. 강아지를 혼자 집에 두고 나서는 길 무겁다. * 어머니 아버지와 바다에서 헤어질 때 타고 남은 두 분 한 점씩 가져올까 했던 생각 구차하다는 생각 지금 어느 바다를 ..

매너리즘

. 매너리즘 장률이라는 영화감독의 후쿠오카를 보고 그의 또 다른 영화 경주를 본다 후쿠오카는 몇 겹 인연이 묘연한 무의미로 나타나고 사진을 찍는 나를 찍는 경주는 한 겹 벽지 속 리비도 며칠째 읽고 있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지금 매너리즘 내가 잃은 길의 시작을 본다 길은 잠시 다시 나타났다가 영원히 사라진다 하고 나는 그 길 속에 있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사라지는 것이 길이라면 그 속의 나를 잃는 건 당연한 일 잃은 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조각난 사금파리로 알 수 없는 걸 비출뿐 부숴진 주장을 이해하지말자 공간과 삶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경주는 아직은 느린 신파 중앙시장 안쪽의 운동구점 생각이 났지만 그것보다는 어제 어느 선배가 남긴 감은사지 석탑의 실루엣으로 지우는 허술한 논리 나는 이제 겨우 시작..

시월

. 시월 * 아무 일 없는데 너는 왜 조마조마하니? * 아무 생각없는 노인에게 소리를 듣게 해주는 일, 생각보다 어려운 일. * 요양원. 용무가 있더라도 저승사자는 출입을 금합니다. * 가을보다 추위가 먼저 왔다. 뭔가 등을 떠미는 배후가 있다. * 무사한 세월이 지나고 습관 같이 하찮은 불화는 또 왔다. 詩는 식었고 딸 아이 혼사가 슬슬 끓고 있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다. * 지금은 십일월 시월은 이제 없다

가을 전쟁

. #가을전쟁 언젠가부터 가을은 모기의 계절이다. 빗소리 들으려 열어둔 창문으로 급강하 폭격기처럼 모기들 쏟아져 든다. 바늘을 투하할 지점은 옷으로 가리지 못한 팔뚝과 목덜미뿐. 하얀 천장에 붙어있다 방심한 틈을 타 급강하 한다. 오른 손에 대공포를 쥐고 완강히 저항한다. 격추한 적기는 십 여 대, 아군의 피해는 팔뒤꿈치 한방. 창문을 닫지 않으면 공습은 끝나지 않을 텐데 비에 실려 오는 가을 젖은 표정을 놓치긴 싫으니 도무지 대공포를 놓을 수 없다. 곁에 또 급강하 한 폭격기. 손바닥 기총소사로 격추. 미드웨이는 살벌하게 익어가는 계절 속이다. 211006

구월

. 구월 좀 더 잘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자주 생각하는 구월이 왔다 * 내 아버지와 나와 내 동생의 계절 한 사람은 떠나고 둘이 나란히 그 뒤를 따르는 계절 * 새벽이 서늘하다 발목이 가벼워진다 * 바이러스와 타협했다 몸이 불편해 한다 * 아침 여섯시반에 집을 나서며 '다녀올게' 한 이후 다섯 시간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 * 추석이 지나고 추분이 지나고 어머니 떠난 날 왔다. 내 슬픔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모조리 미안함이다. * 그때 내가 '살아있기가 참 힘들다' 말했을 때 너는 깜짝 놀랐다. 네 속의 말을 들은 것이니? * 구월은 어제 떠났다. 211001

한바퀴

. 한바퀴 하나는 제 생과 짝을 맺고 또 하나는 제 거울과 짝을 맺는다 어머니는 맞춤하게 떠나셨고 아버지도 사십년만에 기다리던 햇빛 쬐고 뼈 섞어 바다로 가셨다 한 십 년 먹고 살 일 만들었으니 쉬엄 쉬엄 늙어가도 괜찮으리 뜻 없는 한바퀴지만 세상이 그렇다 하니 이제 그만 뒤를 걷고 남은 복이나 세어볼거나 남은 것 둘 미련한 詩를 묶고 미안한 아내 등이나 살뜰히 긁어줄 일 한 갑자 두께보다 가볍지 않지만 쉬 죽진 않을테니 어찌어찌 애쓰다보면 될 수도 있는 일 210916

집들이

. #집들이 살면서 내 딸의 집들이를 할 줄은 몰랐다. 할 수 있는 일,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참치회에 싱글몰트 위스키. 입이 호사를 하고 한참 웃다 돌아왔는데. 자리에 누워 생각하니 꿈결 같다. 꼬마가 자라 어른이 되고 제 집을 꾸려 부모를 부르는 일, 세월의 강에 실려 떠내려 가는 동안 아이는 제 여울을 만들었구나. 멀지 않은 곳, 하구를 자주 바라보지만 등뒤에 흐르는 세찬 물줄기 소리가 실감은 나지 않으니 한 사람 삶의 행복이란건 이렇게 두물이 스치는 언저리에 살짝살짝 이는 파도 같은 것. 막 강으로 나서는 푸른 시내에 발을 적시고 오니 실감이라는 말 그 깊은 자국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되네 21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