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明盛藥局 48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지금까지 열다섯 개 이빨이 빠졌다 빈 자리는 몇 없다 볼트로 채워졌다 입구는 언제나 먼저 봉쇄되는 법이다 가늘고 짧은 왼쪽은 십 년 전에 기울었다 오래 걷지 못하고 마디는 쉬 아픈데 멀쩡한 오른 어깨는 왜 반대로 기우는지 작년에는 묵은 뿌리를 바다에 버렸다 근거는 흘러갔고 가지도 늙는 중 아직은 미련하게도 욕심 몇 점 여전해 세상에 내가 속해도 세상을 이겨보겠다 꼿꼿이 고개 들고 먼 길을 바라보는데 자꾸만 울리는 소리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선 자리 흔드는 시간의 실금들 가슴에 무릎에 조금씩 그어지니 오래된 동행의 얼굴 미안하기 그지없다

따는 일

. 따는 일 엄지 손가락을 명주실로 친친 동여매고 나면 손가락끝은 검붉게 부풀었다. 밤새 답답했던 당신의 속처럼. 성냥불로 바늘끝을 사르던 어머니와는 달리 당신의 문명은 작은 새 바늘을 카드리지로 꽃았다. 몇 번 허공을 딸깍이던 바늘이 엄지 손톱 그믐달 아래를 찌르면 녹슨 청동의 피가 솟았다. 명치끝이 답답한데 손끝을 찌르는 일이 무슨 소용인가 했지만 검은 피가 솟는 건 막힌 길을 뚫는 것이라 당신은 믿었다 하얀 휴지를 점점이 물들이며 당신의 길은 둥글어진다 조였던 실을 풀고 손끝이 안색을 되찾을 때 당신이 트림을 뱉었던가 따는 일이 트는 일이라 믿었던 당신 아직 멀리서 안녕하신지 220324

와우!

. 와우! 귀는 죽어도 잠깐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죽은 뒤에 듣는 소리는 슬플까? 고막을 울린 그 소리 가장 작은 뼈 몇개를 때리고 소리는 액체로 바뀐다 죽은 뒤에 듣는 소리는 끈적할까? 귓속에 튼 또아리 입구는 높고 출구는 낮다 평생 먼저 소리를 받은 몇몇은 먼저 죽었다 죽은 뒤에 들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다 딸의 목소리, 아내의 인사는 희미하다 아들의 고함이 출구를 울린다 죽은 뒤에 들리는 소리는 낮은 소리 달팽이관은 그 마지막 소리를 듣기 위해 또아리를 버틴다 죽은 뒤에 들리는 소리가 지나가면 정말 죽은 것이다 작별이란건 다분히 집요한 면이 있다 220315

님에게

님에게 크리스마스에 귀 시린 계단을 오른다. 조각 침대에 누워 아픈 마음을 내려놓자 - 님 좀 어떠세요? 작고 친절한 의무가 안부를 묻는다. 손끝엔 파르르 시침을 겨누며 - 님 오늘은 두번 하겠습니다. 천장을 쪼갠 커튼이 자르르 흐르고 벽 너머 어느 영감의 가래소리 끓는다. - 님 불편하신 거 없으세요? 장석남의 격렬비열도엔 눈이 내리고 손목 찔린 천장에선 시가 흔들린다. - 님 뜸 떠드릴게요. 슬안에 마른 쑥 타오르는 냄새 찌르고 지지고 찌릿찌릿한 무릎 - 님 수고하셨습니다 비틀대며 내려와 사천구백원 계산을 하고 크리스마스 시린 계단을 내려 간다 - 님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시나봐요? 꽁꽁 언 자동차에 거푸 시동을 걸며 무릎에 잔뜩 늘어 붙은 님을 턴다. 20101224 /20220221 개작

마스크. KF94

. 마스크. KF94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더러운게 아니라 입에서 나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 라고 말하면서 나를 지켜야지 생각한다 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더럽고 내 입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은 더 더럽다 방법은 입을 없애는 것뿐 거리는 더러운 출구가 모두 막혔고 그래서 깨끗하다 맨홀 뚜껑 같은 마스크 아래는 지옥이다 220214

졸피뎀

. 졸피뎀 휴일 낮잠이 깊었다 잠의 총량이 탕진되었으니 다시 떠나기 힘들다 잠들지 못하는 어둠은 뜻없이 맑아지는 조난이다 알약 한 알 냉수에 삼키면 좌두엽을 두드리며 금새 중심을 읽는다 좌우가 흔들린다. 글자를 정확히 쓸 수 없다 받침이 흘러다닌다 일어서면 목덜미를 잡아채는 중심 안착하시라 좁아지는 미간에서 쏟아지는 푸석한 명령 결박은 느슨하지만 밧줄은 촘촘해 감아라 감아라 들러오는 소리들 웅웅 울리며 구멍으로 당긴다 조금 남은 마음에 검은 향신료 뿌려지고 어두워진다 왜 버티고 있지 하는 목소리 들리고 비틀대며 화장실로 가는 나를 본다 한올 한올 풀리다 화르르 뒤엉키는 난발의 정신 그런데 여기 누워 나를 보는 이놈은 정말 누구인가, 등뒤에 휘장을 잔뜩 지고서 곧 덥치려는 이놈은 21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