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애완事物 11

애완事物, 지갑

. 애완事物, 지갑 오른쪽보다 한 치는 낮은 왼쪽 궁댕이 집을 나설 때면 남자는 주머니에 돈이 좀 들어있어야해 어머니 말씀으로 높이를 채운다 지전 열 몇 장 카드 두 개 운전면허증과 버리지 못한 영수증 따위로 빵빵해진 지갑 왼쪽 뒷주머니에 꽂는다 이 년전 생일에 둘째가 사준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 번도 내 손으로 지갑을 사본 적 없다 돈 벌어오라고 꽉꽉 채워 오라고 그 밥 먹고 산 식구들이 사줬다 한 때 끈 떨어져 빚으로 먹고 살 때도 지갑은 어떻게든 채워졌었다 밑천처럼 노자처럼 마중물처럼 개평처럼 빈 궁댕이에 납작 엎드려 맥 없는 걸음을 재촉했었다 지금은 책상 한 켠에 던져놓은 자존심 겉은 검고 속은 고동색 닥스 열흘째 한 푼도 드나들지 않은 느린 생계 기우뚱 주저앉은 왼궁댕이 혼자 결핍이 서럽고 이제는..

애완事物-주전자

. 애완事物-주전자 맡겨놓은 것도 아닌데 받아오라고 했다 정지 한 귀퉁이에 찌그러져 있던 채권자를 흔들며 받으러 다녀오는 길은 늘 불안했다 채권자도 더 찌그러질까 무서웠을 것이다 한 번 받아오면 반드시 두 세 번은 더 받아와야 했다 두 번 정도에 채권자가 나가 떨어지기도 했다 시멘트 마당에 패대기 쳐져 새 귀퉁이가 찌그러지고 찌그러진 귀퉁이 얼결에 펴지는 사이 골목은 난리가 나곤 했다 받아오라던 이는 벌써 떠났고 받아오던 나도 제법 늙었는데 어쩌자고 싱크대 안 어두운 저 구석에 찌그러져 웅크리고 있는지 어머니 남긴 살림 버리다 말고 물을 끓인다 보리차 우려 천천히 한 잔 마시고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받아오라 보낼까 한다 차라리 아주 찌그러지는 게 낫지 싶다는 생각에 아, 보리차 말고 막걸리를 마실 걸 그..

애완事物, 식탁

. 애완事物, 식탁 한번도 보지 못했던 배를 천정을 향하게 엎어 놓고 드라이버로 하나씩 다리를 떼낸다 십 년 전 코딱지만한 내 집을 팔고 서러운 아내를 달래느라 데려왔던 놈 옆구리와 네 다리를 훑고간 끌의 흔적 고통의 무늬를 아름답다 속이며 부렸던 시간들 낡은 얼굴 위에 언젠가의 끼니가 스며있다 혼자 마셨던 소주 기름 튀던 삼겹살 고스란히 떠받들었던 저 표정 딸들은 놈이 떠먹여주는 밥을 먹고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우리는 몇 번인가 또 이사를 하고 늙고 아내는 시간을 씻어버리고 싶었나보다 이제 그만 헤어지자 날렵하게 살고싶어 나는 얼굴 따로 다리 따로 온몸으로 껴안고 아파트 아래로 끌어내렸다 어두운 나무 아래 얼굴도 다리도 눕히고 돌아서는 마음이 컴컴하다 어디로 가서 무엇이 될까 우리의 십 년을 바라보..

애완사물, 걸상

. 애완 사물, 걸상 여덟 살 아이가 서른 되도록 잘 앉혔던 당신도 이제 물러 앉았군요 그 아이는 제 집을 꾸려 떠났어요 그림책들은 오래 전에 버렸고 교과서들도 얼마 전에 버렸지요 엉덩이 가벼운 아이를 붙들어 앉히느라 당신 꽤나 고생하셨지요 귀퉁이 헤진 당신 얼굴 아이는 못보고 떠났지만 너무 아쉬워 마세요 당신과 아이가 오래 함께 앉았던 그 방은 열려 있어요 닫아두기 싫은 빈 방 당신이 좀 지켜주세요 열린 문에 낡은 턱을 궤고 당신 얼굴에 쌓인 그 아이 세월도 지켜주세요 그래도 이젠 더이상 당신 헤지진 않을거예요 가끔 그 아이 돌아오면 또 당신에게 온몸 맡기고 그럴겁니다 그러면 당신도 행복하실거예요 그게 당신 전부였으니까요 그렇죠? 201002

애완事物, 안경

애완事物 - 안경 세상은 사라졌습니다 먼 것은 멀리 가까운 것은 더 가깝게 사라진 것들이 먼지 같은 것들을 남겼습니다 닦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편도 오래되면 편한 친구가 되나 봅니다 보기 싫을 땐 치워버려도 아무 말 없습니다 한편 권력은 드세어서 저 없인 아무 데도 못가게 합니다 눈에 뵈는게 없는 외출은 위험하지요 지금은 내 곁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갇혀 있으니까요 덕분에 사십 년 콧대는 많이 눌렸습니다 200829

애완事物, 습진

애완事物, 습진 내 병은 다 지병 기본 병력 오십 년 양 손 양 발 모조리 벗겨지고 갈라지다 이제는 저도 지쳤나 오른발만 남았다 스스로는 그러려니 끼고 살자 싶은데 옆지기는 보기 싫다 병원 가라 지청구 가봤자 몇 달 떠났다 슬그머니 또 올텐데 잔소리 하 무서워 억지로 피부과행 의사는 무심하게 달래가며 살라하네 그 친구 내 맘 같으니 자네 바로 명의일세 200820

애완사물, 구두

. 애완사물, 구두 부끄러운 날에는 곧잘 그대에 얹혀 나섰습니다 줄 세운 바지 아래 코 끝이 빛나는 그대와 함께 나서면 허리가 곧추서곤 했습니다 도시의 거리는 그대의 뒷굽에 맞춰져 있습니다 계단을 내려와 단단한 보도블록 위를 걸으면 헛기침 소리가 발목에 울리곤 했습니다 따각또각 마음의 뒷꿈치를 들어 올리는 소리 누구를 만날 지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그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지만 그저 몇 센티 콧대를 높이고 언제나 나를 격려했지요 경쾌하게 멋있게 잠시나마 200526

애완事物 - 시계

애완事物 - 시계 . 이십육 년째 뺑뺑 돌고있는 저 녀석 대여섯 번 이사통에 불알은 달아나고 중심을 잃어 자꾸 왼쪽으로 기울지만 시간은 어김없이 기록중 거듭되는 뺑뺑이 속에는 아내와 나의 주름 흰 머리칼 겹겹의 신경질 같은 것들 얽혀있을 터 모두 잠든 밤이면 유난히 철컥거리며 낮의 기억을 동그라미 속에 새기고 몇 몇 꿈을 내게로 보내기도 하지 한번도 눕지 못하고 못 하나에 덜컥 걸려 벽에 박힌, 이 분 정도 늦게 시간을 찍어내느라 한 두 걸음 뒤에서 걷는 오래된 원심력의 역사 아마 벽 속에는 녀석이 찍어낸 이십육 년이 녹슨 못 뿌리에 걸려 울울첩첩 하리라 지금은 두 시 십오 분 녀석은 두 시 십삼 분 20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