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반고개 추억 48

불구경

. 불구경 그 시절 서문시장에는 불이 잦았다. 누군가 큰장에 불났다 외치면 조무래기들은 득달같이 두류산에 올랐다. 언덕배기에 서서 바라본 북쪽은 취객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난리가 났을 것이다. 물을 퍼나르고 포목을 꺼집어 내 아래로 던지고 목숨을 건지려는 안간힘들이 불길 속에서 함께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무료한 조무래기들에게 큰장의 큰불은 혁명의 행진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산 아래 어른들은 리어카를 끌고 달렸다. 불난리에서 건져진 경황 없는 남의 재산들 아수라를 틈타 실어올 요량으로 불길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허겁지겁 달렸다. 모든 혁명에는 피의 부스러기를 얻어 먹으러 달리는 이들이 있음을 한참 뒤에 알았다. 220524

6번 버스

. 6번 버스를 타면 반고개 지나 대영학원 지나 상서여상 지나 서문시장 지나 반월당 지나 명덕로터리 지나 영대앞 지나 봉산동 지나 파동까지 갈 수 있었다 대부분 대신동이나 대명동 앞산 밑에서 내릴 일이 많았지만 공연히 외로운 날에는 내처 파동 종점까지 가곤 했었다 그땐 버스에서도 담배를 폈었고 재털이도 있었다 여름날 창문을 있는 대로 열어도 버스안은 뜨거웠다 그저 창밖으로 덜컹덜컹 지나가는 봉덕상회 삼성복덕방 간판이나 정화여고 여학생 흰색 칼라나 보든가 대책없이 붙은 똥개 따위나 보며 내가 지금 뭐 하는 지 어디로 가는 지도 잊은 채 그렇게 가곤 했었다. 지금 나는 사당동 가는 5413 버스 안에서 그 파동 가던 날을 덜컹덜컹 생각하는데 저 앞 낙성대 모롱이 돌면 꼭 개울물 흐르던 파동 종점이 나올 것 ..

버스정류장

. 버스정류장 새길시장 앞 우시장 왼쪽 서대구시장 건너편 산격동 다리 곁 경북여고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버스를 타러 올 그녀를 기다린 날들 있었다. 키 키고 날씬했던 그녀 한 살 많았던 누나 눈빛이 야무졌던 동창 늘 싸늘하던 문우 보고싶지만 피한다는 꼬마 사랑하는 사람은 철따라 어쩔 수 없이 바뀌었지만 그리운 마음은 그대로여서 언제 올 지 모르는 버스처럼 내가 타지 못할 그 고운 버스들은 쉬 볼 수 없었다. 지각하기 직전의 시간까지 가방을 들고 서성이던 버스정류장들 제자리에만 잔뜩 찍힌 발자국들. 어쩌다 나타나도 멀찍히 바라보다 떠나는 뒷모습만 보던 맥 없는 그리움. 어떤 날 우시장 왼쪽에서는 한꺼번에 두 사랑을 기다리기도 했던 그 시절 무모한 버스정류장 220411

두류반점

. 두류반점 대책없는 창업이었다. 밀가루로 짜장면을 만드는 것보다 나무로 배달통을 만드는 것이 쉬운 아버지는 먹성 좋은 주방장을 들였고 가난한 산밑 동네 사람들은 인사차 한그릇씩 먹고난 이후엔 슬금슬금 피해다녔다. 어떤 날은 주방장 혼자 먹은 볶음밥 한그릇이 그날 요리의 전부이기도 했다. 어쩌다 배달 주문이 오면 국민학교 오학년 아들이 나갔는데 도착하면 짬뽕국물이 하나도 없을 때도 있었다. 딱 석달 하고나니 주방장이 그만 뒀다. 요리 할 일이 없었으니... 두류반점 문 닫아놓고 아버지는 남은 고량주를 굳이 도꾸리에 따뤄 마셨다. 불 붙여 화주도 만들어보고 점점 더 취해갔다. 한달 문 닫고 두류반점은 간판을 바꿔 달았다. 두류만두로 그후 두달 간 아들은 매일 도시락으로 만두를 싸갔다. 그리고 두류만두는 두..

국민주택

. 국민주택 아파트 하나도 없었던 시절 반고개 옆 동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빽빽했는데 동사무소 옆에서 구남여상에 이르는 언덕길엔 국민주택이 있었다. 번듯한 담장 안에는 알록달록한 시멘트 기와 지붕을 인 예쁜 집들이 반듯했다. 청수탕 옆에는 우철이가 살던 그보다 좀 오래된 기자주택이 있었는데 비길 바가 못되게 삐까번쩍 했다. 일학년 한반이었던 미혜도 거기 살았는데 걔 아버지는 달성공원 앞 치과의사라 했다. 흙마당에 슬레이트 지붕 집이지만 우리도 국민인데 왜 그 동네만 국민주택이라 이름 지었는지 의사 아버지쯤 돼야 국민 자격이 있는지 늘 기분 나빴지만 어쩌다 미혜네 집에 놀러가면 세상이 좀 다르긴 했다. 그때 생각했던 것 같다. 국민이 되려면 더 노력해야겠구나 우리 아버지는 국민..

화신다방 - 입문

. 화신다방 - 입문 지하는 지르박 추는 클럽 일 층은 오비호프 삼 층은 당구장 가지 못하는 곳의 문이 다 열린 날 계단을 올라 이 층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둠속에서 어려운 형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씩 웃으며 퇴폐의 소비에 들어선 너를 축하하노라 삼백원짜리 첫 커피 한 잔은 태수형이 사줬다 지옥문을 들어섰음을 안 건 십년은 더 지나서의 일이었다 210418

전화번호부

. 전화번호부 아는 것은 전화번호뿐이지만 네가 사는 곳을 알고 싶다 부끄러운 골목에 숨어 집으로 들어가는 너를 보고싶다 오 센티미터 두께의 노란 전화번호부 그 속에 내가 아는 전화번호가 있고 너도 있다 생각한다 네가 김씨가 아닌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전화번호부는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지만 전화번호로 너를 찾는 일은 전화번호부로는 쉽지 않다 전화번호부 속에 짝지워진 이름과 번호들이 너무 많다 같은 성을 앞세우고 가나다 순으로 차례차례 늘어선 이름들 그리고 제각기 다른 번호들 전화번호부에서 전화번호를 찾는 방법은 요령부득이다 주소번호부는 왜 없는가 200524

내당동

. 내당동 내 어려 오래 산 동네 서구에서도 내당동 두류산과 반고개 사이 굽이치던 골목길 이구못 지나면 땅골 그 끝에는 당산이 애락원에서 궁디산길 양쪽으로 나뉜 가난 동쪽에 붙어야 살고 서쪽에 붙으면 망해 땅골에 살던 정도는 멀리해야할 친구였네 두류산 옆 낮은 당산 그 아래 깊은 땅골 먼 옛날 당집이라도 있었으니 내당동 뿌리는 거기 있으나 기억마저 가난해 동쪽으로 동쪽으로 몸 눕히던 땅골은 떠나온 지 사십 년 남루도 개벽했을 터 이름도 바뀌었다네 내당동이 두류동 211018

수렵시대

. 수렵시대 눈 덜 녹은 이른 봄날 당산 아래 골짜기로 꾸역꾸역 내려가서 젖은 돌틈 손 넣으면 따뜻한 목숨 있었다 깜짝 놀란 어린 새 땡볕 따가운 여름 날 취수장 개울가에서 거머리 잡아 떼며 빤스바람 풀숲 헤치면 몸부림 하나 잡혔다 손안에 든 새끼 붕어 도토리 쏟아지는 가을날 숲속 들어 여름내 풍뎅이 잡던 떡갈나무 기어 오르면 도무지 잡을 수 없는 청솔모가 달아나고 철개이도 다 사라진 얼어붙은 이구못엔 썰매타는 조무래기들 발목 노린 숨구멍 사냥이 끝난 겨울은 사냥꾼을 노렸지 211024

짤짤이

. 짤짤이 주머니에 동전이 들면서부터 딱지나 구슬은 멀어졌다 가장 오래된 승부의 경제 일이는 하수들이 삼이는 고수들이 교실 뒷편에 음모처럼 모여 손을 흔들었다 대찬 놈들은 십원을 잃으면 이십원을 지르고 이십원을 잃으면 사십원을 질렀다 한 번만 걸리면 끝난다 그 지독한 공포 막다른 골목에서 교정 담벼락에서 예비군 훈련장에서 무료의 빈틈을 어김없이 메꾸어주던 한탕의 짜릿함 어쩌다 선생에게 걸리면 딱 잡아떼다 물구나무 서봐 시키면 동전 주르르 쏟아지던 싱싱했던 태초의 도박 근성 신용카드가 빼앗아간 경제학원론 22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