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전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던 여름 어느 날을 잊지 못한다.
이른 아침, 안양 사무실을 가기 위해 폭우 속으로 15년 된 낡은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평소에도 큰 비가 오면 물난리가 나곤 했던 사당사거리는 넓은 강이 되어 있었다.
순간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별 일이야 있겠나 하는 마음으로 물웅덩이를 헤치며 핸들을 꺾었다.
자동차 앞 창으로 흙탕물이 크게 튀어 오르는가 싶더니 남태령을 향하던 차는 그만 푸르르 시동이 꺼지고 말았다.
아무리 시동 키를 다시 돌려도 시동은 다시 걸리지 않았다. 남태령 고개로부터 빗물이 계곡물처럼 길 위로 쏟아지고
그렇지 않아도 꽉 막힌 도로 한 가운데서 속절없이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돌아 온 대답은, 서울 전역에 물난리가 나서
긴급 출동 서비스 차량은 언제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무책임 무대책이었다.
쏟아지는 비와 급류를 뚫고 근처 카센터를 찾았으나 아직 문도 열지 않았었다. 온 몸은 다 젖고 비상등을 켠 내 차 뒤로 꼬리를 문
차들의 경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살면서 그렇게 막막했던 경험을 다시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삐죽 열어놓았던 창문도 닫을 수 없어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한 시간 남짓 망연하던 차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집 가까운 곳에 있어 늘 주유를 하던 남현주유소 생각이 난 것이다. 지갑을 뒤져보니 어젯 밤 주유를 하고 결제한 카드 영수증이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낯 익은 목소리가 전화기 속에서 들렸다. 주유하면서 가끔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남현주유소의
대리님이었다. 거두절미하고 지금 내가 처한 낭패의 상황을 하소연하고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다. 대리님은 '아무래도
물웅덩이를 지나면서 엔진룸에 물이 들어가 전기 계통에 문제가 생겼을지 모르겠다'는 나름대로의 진단을 내리고 내가 있는 정확한 위치를
물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응급조치할 방법을 찾아 연락을 하겠노라고 했다.
통화를 끝내고 삼십분 가량 지났을까? 사차선 도로를 꽉메운 차들 사이를 비집고 오토바이 한 대가 빗속을 달려왔다. 대리님이었다.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배터리 주변 전선이 젖어 시동이 걸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배터리와 점프선을 빌려왔노라 했다.
비를 흠뻑 맞으며 보닛을 열고 배터리 연결을 시도했다. 그래도 시동은 쉬 걸리지 않았다. 한 오분 씨름을 했을까?
쇳소리만 내던 시동 모터에서 가는 목숨같은 시동 소리가 났다. 얼른 액셀레이트를 밟으라 대리님이 소리를 쳤다. 드디어 시동이 제대로 걸렸다.
배터리 점프 하느라 흠뻑 젖은 채 대리님은 일단 다시 시동이 꺼지지 않도록 차를 운행하라고 했다.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앞만 보고 비가
쏟아지는 남태령을 넘었다. 우여곡절 끝에 과천에 도착해서 카센터에서 차를 수리하는 사이에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는 멎었다.
차는 다행히 큰 탈은 없고 들이쳤던 빗물이 마르면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그제서야 어렵게 시동을 걸고 출발한 내 차 뒤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걱정스레 날 바라보던 대리님 생각이 났다.
나름 단골 고객라고 해도 정비사도 아닌 주유소 직원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 성심껏 주변에서 해결책을 찾고,
빗속을 뚫고 직접 배터리 점프를 해주러 오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황망했던 차라 오후의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남현주유소로 대리님을 찾아갔다. 다시 넘어가는 남태령은 폭우가 할퀴고 간 흔적으로 도로가 온통 파이고 나무가 넘어지고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 내가 두 시간 가량 대책없이 서 있었던 자리도 이젠 차들이 정상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대리님은 예의 그 사람좋은 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셨다. 괜찮으셨냐고, 많이 놀라시지 않았냐고 오히려 나를 걱정하셨다.
정신이 없어 정말 고맙다는 인사도 못드려서 죄송하고 너무나 무리한 부탁을 성심껏 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대리님은 우리 주유소를 늘 이용해주시는 단골 고객이자 이웃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하는 것 아니냐며 손사래를 치셨다.
들고 간 음료수 박스를 전해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꾸 웃음이 나왔었다. 각박하다는 세상이지만 이런 따뜻한 이웃이 있다면 살만한
세상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남현동에서 평촌으로 이사를 해서 최근에는 옛날처럼 남현주유소를 자주 들르진 못한다. 하지만 근처를 지날 일이 있으면
일부러라도 남현주유소를 들러 주유도 하고 세차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얼마전 들렀을 때는 그 대리님이 능력을 인정 받아 주유소장으로
승진을 했 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업과 직접 연관도 없는 고객의 어려움도 헤아릴 줄 아는 유능하고 올바른
직원을 제대로 알아본 주유소 사장님의 안목이 참 훌륭하는 생각도 했다.
언뜻 남현주유소의 대리님, 아니 소장님이 미혼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아내에게 부탁을 했다.
어디 좋은 아가씨 있으면 좀 소개시켜 주자고. 그 정도 사람이면 그 아가씨가 땡 잡는 거니까 잘 찾아보라고 말했다.
조만간 중매하러 오일뱅크 남현주유소를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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