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인 인기를 가진 시들의 약점
최동호(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쉽게 쓰여진 시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다. 그러한 대중시는 청소년들의 정서함양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쉬운 시의 영향으로 누구나 젊은 시절 한 때 시인이 되고 싶어한다. 좋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꾸게 할 수 있다면 대중시도 그리 나쁜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를 계속 좋아하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젊은이들은 한 때 시원한 청량음료처럼 시를 좋아하다가 탄산수의 거품처럼 금세 사라지는 시적 정취를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게 된다. 이제 그들은 시보다 무협지나 판타지 또는 대하소설에 관심을 빼앗겨버린다.
그들이 한 때 좋아했던 그 유행가 같은 시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말 그게 시였을까? 좋은 시는 사는 동안 가슴에 묻어둔 비문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 꺼내어 그 반짝이는 언어를 담아봐도 싫지 않을, 그런 진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쉽게 써진 시는 우선 감정의 처리가 값싸 보인다. 그저 말하기 좋은 고독, 이별, 사랑, 죽음, 슬픔 등의 주제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주제는 사실 모든 문학작품의 근원적인 문제로 많이 다뤄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시인의 깊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기보다 독자들의 인기에 영합하려고 끌어다 붙인 말초적인 감각에 의존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결과 읽기 쉬운 시가 되어버린 이것들이 다른 이의 정서를 위축시키고 동적인 삶의 체험을 정태적으로 둔화시키는 역할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쉽게 쓴 시의 특징은 시인의 감정 처리가 안이하다. 편의주의에 감상만을 가미하여 시적 효과를 둔화시키고 자신의 감정을 국화빵처럼 찍어내듯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접하기 쉬울 만큼 표현이 평범하다. 이는 지적 실험의식을 내세운 난해시의 불필요한 난삽성을 반박하는 것이 될 수 있고, 우선 읽혀진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시는 긴장이 너무 이완되고 정서적 깊이가 얕아, 잘 쓰여진 산문에 못 미치는 꼴이 되므로 경계해야 한다.
미숙한 시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적절하지 않은 수사를 반복으로 감추면서 음악적 효과를 지닌 것처럼 만드는 점에 있다. 단순 반복의 리듬감이 시적 능숙함과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화감으로 곡해되어 독자들에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위안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이것이 참으로 우려될만한 점이다.
다원화 시대에 민중시 또는 순수시만이 의의가 있다는 주장은 억지이고 독선적인 논리일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시가 졸렬하다는 생각도 역시 획일적인 생각이다. 나쁜 시는 유행가처럼 일회성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 읽혀지는 시는 결코 나쁜 시가 될 수 없다. 시는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한 삶의 가치를 눈뜨게 하고 완성시켜주는 예술적 양식이기에 진정한 가치를 가진 시는 어느 시기에건 그 가치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시가 생명으로 숨쉬는 것이기에 살아있는 한 결코 외면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시는 어떤 시일까?
살아 있는 시는 유행에 매달리지 않고 시대를 초월한 시다. 시가 정서적 이유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으면 건강하지 않은 시다. 그러나 세상살이를 정직하고 진지하게 노래한 것이라면 그 건강이 시의 향기가 되어 나타난다. 그런 시는 영혼의 울림을 줄 수 있는 시다.
끝으로 우리가 시를 쓰면서 경계할 이념들을 살펴보려 한다.
가장 먼저 순수주의를 경계할 일이다. 순수 지상주의는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독자적인 시 세계를 개척하듯 보이지만 김소월이나 윤동주같은 시 세계를 답습하는 꼴일 수 있다. 현실을 부정하고 비판하지 않으며 온갖 서정성만 그럴듯하게 발라내기로 자족하는 순수시는 게으른 삼류시와 같은 것이다.
둘째는 지나친 민중주의를 경계할 일이다. 특정 이념에 자신의 사상을 고정시켜 놓은 시각은 위험하다. 그것이 왜곡된 신념이라면 특히 위험한 일이다. 민중주의는 그릇된 역사를 바꾸고 싶어하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다양성이 있어야 할 삶의 근본을 박탁하려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것은 또 다른 기회주의와 다름이 없다.
셋째는 미욱한 자의 달관주의다. 달관주의는 신선사상에 근거한다. 그들은 삶의 궁극을 제대로 파악도 못했으면서 달관한 체 하기 쉽다. 이것은 극단적인 허무주의가 모습을 달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괴주의이다. 모든 존재는 모순으로 무너지면서 진화 발전하고 다시 생성된다. 새로운 발전을 위한 파괴는 언제나 유혹적이다. 그러나 새로운 생성을 모르는 파괴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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