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영화읽기

자산어보

취몽인 2021. 6. 2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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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를 뒤늦게 본다.

조선후기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했던 정약전, 약용 형제가 정조 사후 서학을 했다는 이유로 흑산도로 강진으로 유배를 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잘 알려진 대로 동생 다산은 강진 유배시기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방대한 저술과 후학을 남기고 후일 유배에서 풀려나와 귀환을 한 반면 정약전은 당시로서는 절해고도였을 흑산도에서 주류 학문과는 무관한 자산어보 같은 실용저술에 집중하다 그곳에서 생을 마친다.

이준익감독은 이 영화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나는 인류가 지금 처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메시지를 정약전과 창대를 통해 이야기 하고 또 하나는 다산과 창대를 통해 정치의 한계, 진보의 한계 같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정치는 그것이 진보이건 보수이건 지배의 이데올르기를 기반으로 한다. 그것이 정치의 한계이자 존재이유일지 모른다. 백성을 위한다는 선명성은 언제나 정치인이 백성 위에서 이끌어가야 한다는 욕망을 뿌리에 감추고 있다. 민주화에 가까이 이르렀다는 지금 우리나라 정치 또한 다르지 않다 생각한다. 그들과 백성은 언제나 멀다. 가까이 온다 떠들지만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다. 정치는 백성을 위한다는 외침 속에서 자신들을 위하는 기제일 뿐이다.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때로 창대라는 인물의 삶과 다산의 행보를 통해 보여주는 이 정치의 한계를 약전은 비주류의 행동으로 벗어나거나 극복하고자 한다.

한 실사구시 성리학자가 남긴 어류도감 자산어보는 그저 생태적 인간과 자연의 가치, 슬로우 라이프 따위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당시 나라를 지배한 사회적 모순 '백성은 밭에 씨를 뿌려 먹고살고, 아전은 백성들에 씨를 뿌려 먹고산다'는 다산의 목민심서에 나온 구절에 대한 적극적 반동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 몸에 씨를 뿌려 먹고 사는 자가 혹시 없는가? 자본, 정치, 언론, 권력이라 이름하는 이들이 그들 아닌가? 진보는 그렇지 않은가?
결국 그렇지 않은가? 자산어보의 갑오징어가 묻는다.

영화 끝에 창대는 흑산도로 돌아온다. 암울하고 비관적인 흑산도를 새로움을 낳고 키우는 자산도로 바꿔 부르며 돌아온다. 자산어보는 그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생선들과 바다 그리고 바닥 풀뿌리들의 목숨과 절대 지혜를 빌려 너의 삶을 지키라는 목소리를 전하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흑백의 흑산도도 깡마른 설경구도 찰진 남도의 욕지꺼리도 잘 버무려져 쌉쌀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늦게라도 잘 봤다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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