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泊
(1990.8.)
택시는 사정없이 훤히 밝은 여름 새벽을 가로질러 달렸다.
지금보다 더 이른 새벽녘에 모질게 뒷덜미를 잡아채는 졸음과 싸웠던 상흔 으로
커다랗게 둥지를 하나 튼 운전사의 뒷통수를 보며 모돌씨는
카악! 한웅큼의 가래를 목으로 부터 뽑아 차창 밖으로 패대기를 쳤다.
장마끝에 묻어온 습기찬 새벽 공기가 모돌씨의 뺨을 호되게 후려치고
뒷편으로 잽싸게 달아났다.
여섯시 오분. 건너편 차선에는 때이른 출근을 서두르는 자가용들이 어느새
제법 부산스럽다. 모돌씨가 늘 어둠이 어슴프레 깔리는 퇴근 시간 무렵에나 집을 향해 지나던 청계고가는 일상의 혼잡스러움을 찾아볼 수도 없으리 만큼 텅 비어 있다.
신나게 택시를 모는 운전사의 어깨너머로 계기판 바늘이 시속 100Km를 기웃거린다.
그때 일어났어야 했어...
모돌씨는 입안 가득 텁텁한 후회를 삼킨다.
지난달에 신접 살림을 차린 최대리 집들이에 초대받은 모돌씨 일당은 늘 그랬듯이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은 그많은 음식이며 술들을 최단시간내에 먹어 치웠다.
그리고 전자레인지 부터 콘돔에 이르기 까지 무려 스무가지가 넘는 제각기 포장된
선물들을 최대리 부부의 노래 몇곡에 팔아 넘기고 협동정신(?)을 발휘하여 밥상을
물렸다. 누가 시작하자고 하지도 않았지만 일당들은 널찍한 거실에 삼삼오오 자리를 잡았다. 네명씩 두팀, 다섯명 한팀으로 성원이 이루어진 고스톱판은 제각기 경쟁이나 하듯 전투를 개시했다.
모돌씨는 화투패를 나누면서 적들을 살펴 봤다. 집주인 최대리,자취하는미스터김,
와이프가 애 놓으러 처가로 간지 보름되는 이과장, 면모면모가 쉽사리 자리를 뜰
사람들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모돌씨는 집에서 기다릴 아내를 생각했다.
12시쯤 일어나리라. 모돌씨는 속으로 다짐을 했다.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모돌씨는 운좋게도 시종 판을 주도 했다. 그리고
고 소리가 거듭되면서 아내의 얼굴은 모돌씨의 머리를 떠나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옆의 두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송대리가 자기
차를 태워 주겠다는 소리조차 모돌씨는 무릎앞에 �인 지폐로 덮어 버렸다.
한시간만 더있다 갈테니 먼저 가.
송대리를 보냈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대세는 반전이 되어 모돌씨 앞의 지폐더미는 어느새 옆자리의 이과장 앞으로넘어가 버렸고 고스톱판은 더더욱 치열해져 밤새 돌아갔다.
절대로 오지 않을 듯 하던 아침이 덜컥 베란다 창문에 푸르스럼하니 깃들었다.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모돌씨는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외박의 아침이 모돌씨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택시는 어느새 워커힐 고개를 감아 돌고 있다. 출근 차량은 아까보다 훨씬
더 많아져 멀리 내려 보이는 천호대교 위로 꼬리를 문 채 늘어서 있다.
모돌씨는 변명거리를 찾느라 아까 부터 머리를 주억 됐지만 묘책은 떠오르질 않는다. 갑자기 친구 아버님이 별세를 하셔서 문상을 갔었다. 아니면 술이 너무 취해서 정신을 일었는데 깨어보니 여관이더라.그도 아니면 솔직하게 최대리 집들이 가서 밤새
고스톱을 쳤었다. 그어느 변명도 아내의 서슬퍼런 눈빛과 그집엔 전화도 없어요? 라는 단 한마디 질문을 대항할 방도가 없다.
택시는 다시 언덕베기를 시원하게 내려와 길게 늘어선 차량들을 스치며
천호대교를 가로지르고 있다. 한강에 길게 펼쳐진 은빛 아침 햇살이 꼭 섬뜩한
칼날처럼 모돌씨에게 느껴진다.
모돌씨는 한달 전쯤의 어느날 저녘을 생각했다.
그전 날 고향 친구들과 술을 엉망으로 마시고 정말(?) 외박을 했었다.
오랜만에 만난 탓에 술도 많이 마셨을 뿐더러 총각때 처럼 놀아보자는 치기까지
가세하여 사차 오차까지 호기를 부렸던 것이다. 눈을 떠보니 여관이었다. 근무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 퇴근을 한 그날 저녁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보따리를 싸들고 친정으로 간다며 울어대는 마누라를 붙들고 빌기도 하고 애원도 하고 협박도 해가며 새벽녘까지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결국 새벽 네시가 되어서야 다시는 외박을 하지 않겠노라. 다시 외박을 할 시에는 부인이 하자는 데로 모든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각서를 쓰고 다음날 저녁에 외식과 영화 구경이란 부대 서비스 까지 약속을 하고서야 눈을 붙일 수가 있었다.
그날 그각서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았을 한달만에 다시 모돌씨앞에 무지막지하게
버티고 선 외박의 아침. 모돌씨는 눈을 질끈 감는다.
몇단지 내리십니까?
지저분한 뒷통수의 기사가 물었다.
이 단지요.
..............
.........
이단진데 좌측으로 들어 갈까요?
아파트 입구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 아! ... 아닙니다. 여기서 세워 주십시오.
사지로 들어가기 전에 모돌씨는 변명을 확정할 시간이 필요하다.
시계는 여섯시 삼십분을 가리키고 있다.
아내는 분명 잠을 자지 않았을 것이다. 거실 쇼파에 쪼그리고 앉아 시계와 현관문을
번갈아 노려보며 밤을 고스란히 밝혔을 것이다. 분노와 불면으로 눈은 충혈되었을
것이며 내가 문을 들어서는 순간 등받이 쿠션이라도 집어던질지 모를 일이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모돌씨는 여전히 적당한 변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보따리를 싸서 처가로 가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부터 퍼붓기 시작하면 출근은 어떻게하나? 미리 회사로 전화를 걸어 조금 늦겠다고 이야기 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현관 문앞에 서서 모돌씨는 망연한 심정으로 문만 노려봤다.
그러다가 답답한 심정을 가라 앉힐 겸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한모금을 엉망이 된 목구멍으로 힘껏 밀어 넣었다. 그러나 밤새 스트레스와 담배연기에 찌든
목구멍은 연기가 넘어오자 대뜸 기침을 쏟아놓는다. 아차, 모돌씨는 자기 기침소리에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아내가 안에 있다면 기침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모돌씨는 더이상 현관 앞에서 서성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실대로 이야기 하는 수 밖에 없다. 설마 남편인데 �아내기야 하겠나.
자조와 함께 모돌씨는 담배 꽁초를 바닥에 부벼끄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 돌린다. 잠겨있다. 주머니를 뒤져 키를 찾는다. 철컥 ! 채광이 시원찮은 거실은
희끄므레하다. 일단 등받이 쿠션은 날아오질 않았다.
한껏 조아렸던 머리를 들어 쇼파쪽을 본다. 아내는 없다. 안방에 있나?
조심스레 안방으로 다가간다. 인기척이 전혀 없다.
그래! 씩씩하게 살자. 사내가 돼가지고 외박 한번 했기로서니 이꼴이 뭐냐?
불끈 오기가 솟는다. 까짓 살기 싫음 관두라지 뭐. 덜컥! 문을 밀친다.
안방은 텅 비었다. 아차 정말 도망 갔구나. 금방 불끈하던 호기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모돌씨는 이마를 탁 쳤다.
횡하니 빈방이 모돌씨의 뻥한 머리속을 공명하듯 빙빙 돈다.
어깨죽지 부터 기운이 한꺼번에 빠지는 걸 느끼며 모돌씨는 물먹은 푸대처럼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처가로 전화를 할 요량으로 전화기가 놓인 화장대로 가는 모돌씨의 눈이 화장대
거울로 갔다. 거울은 부시시한 몰골의 모돌씨를 똑같은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부시시한 몰골의 모돌씨가 가슴께에 하얀 쪽지를 붙이고 있다. 메모지다.
여보 외삼촌이 위독하데요.
저 지금 수원으로 가요
늦더라도 저녁 꼭 먹어요.
밥은 밥통에 있고 반찬은 식탁위에 차려 놓았어요. 찌게 덥혀서 드세요.
내일 아침에 회사로 전화할께요.
-- 사랑하는 아내가 --
모돌씨가 젖힌 거실 커튼 속에서 상큼한 구름위로 터질듯 빛나는 태양이
고개를 들고 파안대소하고 있었다.
** 꼬리 말 :
한일그룹 그만두기 전 해에 쓴 글 같군^^
그 땐 참 고스톱 많이도 쳤는데.. 점심 시간에도 치고.. 퇴근하고 여관 잡아서도 치고..
따지도 못하면서 뭔 욕심으로 따라 다녔는지.. 그 때 그 사람들이 이제는 다 50대..
첫 직장의 기억이 이젠 새롭고 그립기도 하네
'이야기舍廊 > 짧은 이야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Freshman과 잠자리 (0) | 2007.07.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