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밟고 가는 모든 길들은/정우영
1
길 위로도 길이 지나고 길 아래로도 길이 지난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게 그리 오래지 않다. 사람도 웬만큼 나이를 먹으면 예지가 번득이는 모양이다. 어느날 갑자기 길이 느껴졌다.
2
내 말이 믿기지 않거든, 내가 시키는 대로 한번 해보라. 저녁 어스름 얕게 깔리는 시각, 오래된 느티나무에 등을 기대고 반드시 동남방을 향하여 오줌 줄기를 세울 것(나무는 느티나무가 아니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단지 오래되어 신령기가 느껴지는 나무라면). 그리고 골고루 당신 주위에 뿌릴 것. 마치 비의(秘儀)를 집행하는 접신자처럼. 그리하면 틀림없이 당신의 발밑에서 신음소리 같은 게 들려올 테니. 그때 눈 쫑긋 세워 둘러보면 마침내 보일 것이다. 당신 발 아래 웬 사람의 어깨가 놓여 있음을. 걸어온 길 돌아다보면 그 길이 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와 등과 머리였음을. 거기에 화인처럼 찍힌 당신의 익숙한 발자국들을.
3
곤혹스러워 발 떼려고 할 때, 분명 당신 어깨가 시려올 것이다. 고개 들어 쳐다보지 않아도, 누군가 당신을 밟고 지나가는 게 선득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르신들이 유달리 어깨가 시리다 하고 등이 저리다 함은 다 이 때문이다. 살아오신 동안 나무 많은 사람들에게 어깨나 등을 내맡겼던 것이다.
출처 : 시세상
글쓴이 : 조찬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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