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폭력 창고

김예슬 이야기 스크랩

취몽인 2010. 4. 14. 16:41
 
 
 
 
 
 
 
스크랩 1. 경향신문 인터뷰
 
ㆍ고려대 자퇴생 김예슬씨 인터뷰

“안녕하세요.” 지난 12일 오후 7시 경향신문사를 찾은 김예슬씨(24·여)는 밝게 웃었다. 대학 교정에 대자보를 붙이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한 달째.
세상으로 다시 나온 그의 손엔 「김예슬 선언」이라는 125쪽 분량의 작은 책자가 들려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대학을 거부한다는 게 단순히
치기어린 행동은 아니었다”며 “대학생활 내내 스스로에게 던졌던 물음 중 일부가 대자보의 내용이고 더 많은 고민들을 책으로 담아봤다”고 말했다.
“사실 답보다는 물음이 많은 책”을 썼다는 그와의 인터뷰는 경향신문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ERISS) 사무실에서 2시간 넘게 진행됐다.
그의 이야기는 차분했지만 때로 단호했고, 함께 고통 받는 이들을 말할 때는 따뜻함도 느껴졌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난달 10일 대자보를 붙이고 한 달 사이 비판이든 지지든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어떻게 지냈나.

“생각지도 못하게 격렬한 반응이 있었던 것 같다. 나로선 한 달 동안 (스스로) 차분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김예슬이라는 개인보다는 메시지에 주목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처음엔 루머나 개인에 대한 관심이 제기됐지만 많은 분들이 갈수록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주셨다. 생각의 힘도
부족하고 살아낸 것도 부족한 터라 비판해주시는 분들이나 속울음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많은 분들이 쏟아낸 이야기를 통해 어떤 것을 느꼈나.

“3월 첫 수업시간에 대자보 전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선생님과 중학생, 거대한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고 싶다고 토로하는 직장인들, 대학을 그만둘 용기
 없지만 마음만으로라도 대학 보이콧을 하겠다는 대학생이 있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접하며 서로의 생각이 연결되는 시간이었다. 이것이 정말 우리
사회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라는 걸 느꼈다. 교육과 대학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고통이 돼 버렸다.”

-조용히 그만둘 수도 있었는데 대자보를 붙이고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이유는.

“너무나 약해서였다. 다시 비겁해질까봐, 다시 받아달라고 학교 문을 들어설까봐. 내 안의 비겁함과 싸우기 위해 그렇게 했다. 거대한 사회적 모순은 은폐되고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인 양 떠넘겨지는 세상이다. 그래서 무력한 개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고통이 깊어가고 있으니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했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대학생들이 대기업 하청업체가 된 대학에 절망하면서도 트랙에서 계속 경주를 이어간다. 실존적인 결단을 내리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용기라기보다는 끝이 안 보였다.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좋은 결혼을 하면, 뭐 하면, 뭐 하면…. 언제까지 트랙에서 경주마로
달려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앞으로 달려가야 할 길은 보이는데 내 영혼은 등을 돌려 불화하기 시작했다. 아파야 나으니까. 나부터 끝도 없는 트랙에서
멈춰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왜 살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런 큰 물음을 할 수 있도록 특권처럼 주어진 게 대학 시절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불가능해진 시대다. 대학(大學) 없는 대학이 인생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지 않은가.”

-대학생활의 고민을 압축해 본다면. 대학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고려대에서 보낸 생활은 스펙에 매달리자니 젊음이 아깝고, 다른 걸 하자니 뒤처질까 두려웠던 시간이었다. 크게는 세 번의 사건이 있었다. 2005년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을 짓는 데 400억원을 기부한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가 수여되는 것을 막으려던 학생들이 출교당한 사건, 2006년 이스라엘과
 미국이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불의한 전쟁에 침묵하는 ‘글로벌 코리아’ ‘글로벌 고대’에서 지내고 있는 나를 되돌아본 사건,
2008년 경영대 ‘이명박 라운지’에 앉아 신문에서 ‘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다’라는 말을 읽었던 사건이다. 이건 비단 고려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학이 이런 가치관을 부추기고 기업의 탐욕에 활짝 열려도 좋은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대학 내에서 대학을 바꿔보는 운동을 해볼 수도 있지 않으냐는 얘기도 나왔다. 이른바 ‘극단적인 선택’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대학 내에서 대학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중요하고 그런 분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대학은 공고해진 하나의 거대한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됐다.
기업에 인재를 조달하고 채용 일제고사를 기업 대신 실시해 등급을 매기고 있다. 대학의 존재 자체가 변화된 상황에서 안에서 바꾸는 것 이외에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성적경쟁의 의자에 앉아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야 하는 지금의 삶이 되레 더 극단적인 것 아닌가.”

-대학거부 선언 후에 많은 ‘각주’들이 달렸다. 88만원 세대론에 대한 논의도 다시 불이 붙은 것 같다.

“우리 세대의 현실 문제를 88만원이라는 숫자로 풀어낸 부분은 인정한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숫자만으로 담을 수 없는 진실이
 축소되고 단순화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대학 거부선언 이후 88만원 세대의 저항이 시작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88만원을
188만원으로 올려달라는 것이 아니다. 등록금을 인하하고 비정규직 대신 정규직 일자리를 늘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청년실업의 문제를 넘어
국가가 모든 배움을 독점한 의무교육 제도, 자격증 유일잣대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 진보는 몸으로 살아내고 일상과 긴밀히 연결된
진보는 아닌 것 같다. 더 나아가 대학·국가·시장의 3각동맹이 공고히 하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 도시·기계 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의무교육이 아닌 대안적인 배움의 장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안 대학의 구체적인 상은 어떤 것인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이 있었다. 인간 자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한 나라 교육의 목표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모든 사람들이 인적자원화의 과정을 겪어
대학과 기업에 차근차근 보내지는 것이 의무교육의 실체다. 의무교육 문제는 말 그대로 배움의 권한을 국가가 독점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과정
속에서 배우고 겪는데 학교에서 커리큘럼을 잘 이수해야만 다음으로 갈 수 있는 자격증을 받게 된다. 또 의무교육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고 하지만 실은
 처음부터 패배자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대안 대학은 구체적인 상을 이거다라고 제시하긴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지옥으로 가는 길을 알면 천국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나. 문예창작과를 가지 않고도 시를 쓸 수 있고, 미대를 안 가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의 편리를 위해 개성이 무시되는 걸 인정해선 안 된다.”

-지인들과 부모님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특히 부모님의 반대가 컸을 것 같다.

“물론 반대를 많이 하셨다. 사실 부모님은 내가 배신했다고 느끼실 거다.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은 진정한 나 자신의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시대의
 부모님들께 말씀을 드리면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모의 기대, 미련 이런 것들이 실상 어떤 것인가를 돌이켜보셨으면 좋겠다. 촛불집회 때 만난 중·
고등학생들이 명박산성보다 넘기 힘든 게 부모산성이라고 하더라. 그 자체가 미래인 아이들이 상처받더라도 스스로 독립성의 날개를 키울 수 있게 사랑의
 이름으로 길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대학·시장·국가의 3각 동맹에서 예슬씨 몫의 돌멩이가 빠졌지만 탑을 새로 세우려면 개인의 탈주만으론 불가능할 것 같다.

“방법론적인 이야기보다 각자가 품은 씨앗에서 어떤 꽃이 피어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학습된 두려움이나 난 무력한 개인이라는 두려움 앞에 지레 포기하지
 않고 서로 격려하고 북돋우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미 균열은 시작됐다고 했지만 일상의 속도로 시스템은 계속 굴러가고 내 선언은
잊혀질 거다. 막막한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큰 존재다’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큰 존재들이 자기 안에 있는 물음들로
시작하고 옳은 일을 옳은 방법으로 밀어가는 힘을 믿으면서 갈 뿐이다.”

-세상에 하고 싶은 또 다른 말이 있다면.

“사실 이 말로 인터뷰를 시작해야 됐는지도 모르겠다. 대학문을 넘지 않아서 수많은 차별을 감내하고 사는 농촌, 노동현장의 수많은 분들에게 나의 선언이
또다른 상처가 되었다면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다. 그런 곳에서 고되게 일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힘들다고 주저앉거나 절망할 수 없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런 분들도 기업이나 시장에서 제품처럼 쓰고 버려진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박지연씨처럼. 비단 대학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학 나오지 못한 분들의 고통은 더 크다. 대졸자가 주류인 사회라 더 조명되지 않을 뿐이다. 그분들을 내 삶의 거울로 비추면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20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정해진 몇 개의 직업이 꿈이 되어버린 것들에 대해 분노하면서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상상력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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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연중기획]지금 대학생은 대학과 싸운다

위클리경향 | 입력 2010.04.15 11:53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4·19혁명 50년 오늘의 캠퍼스 풍경… 자본에 물든 기업논리에 홍역 앓아

1960년 4월. 합동통신사 외신부 5년차 기자 리영희는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3월 15일 이후 남쪽으로부터 불어온 뜨거운 혁명의 바람이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청년 시절을 회고하며 쓴 책(〈역정: 나의 청년시대〉, 창작과비평)에서 그는 "4월 19일의 격동은 편집국의 의자에 앉아서 견디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시간마다 앞을 지나가는 역사의 파동은 나의 젊은 가슴에 피를 끓게 했다"고 회고했다.

그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파동 한복판에 있었던 것은 혈기왕성한 20대 대학생들이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시대가 바뀌면서 싸움의 대상이 달라졌다. 4월혁명
 때 대학생들이 정권과 싸웠다면 요즘 일부 대학생들은 대학이라는 체제 자체와 싸운다. 이들에게 대학은 대기업 자본이 주도하는 구조조정의 대상이거나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거부해야 하는 대상이다.


중앙대 중앙도서관 뒤편에는 '의혈탑'이라는 게 있다. 4월혁명 당시 고병래(상학과), 김태년(약학과), 서현무(법학과), 송규석(정외과), 지영헌(신문학과),
전무영(신문학과) 등 6명의 중앙대 학생들이 희생됐다. 의혈탑은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60년 9월 '중앙대 총장 및 교직원 일동'이 세운 것이다. 탑의
표지석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꽃은 피어 지나 뿌리가 깊고 씨를 맺어 긴 겨울 지나 새싹 틔워 꽃무리 이루니 여기 꽃다운 젊음을 조국과 민주의 제단에 바쳐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젊은 혼들이
있으니 민족의 대지에 피와 살을 묻어 통일을 잉태하나니 우리는 이를 의혈이라 부른다."

50년 전 의혈탑의 주인공들은 거리 시위를 했다. 2010년 '의혈 중앙' 재학생 세 명은 고공시위를 벌인다. 4월 8일 중앙대는 오전 10시30분쯤 시작된 이사회에서
단과대 통폐합과 모집단위 광역화를 뼈대로 한 '학문단위재조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철학과 김창인씨(21)와 김표석씨(21)는 이사회가 열리기 전인
오전 8시쯤 서울 한강대교 아치에 올라갔다.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라는 펼침막을 내걸었다. 두 사람은 오전 9시30분쯤 내려와 경찰에
연행됐다. 독문과 3학년 노영수씨는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학교 안 R & D센터 공사 현장 타워크레인에 올라갔다. 그는 기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구조조정
최종안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학내 민주주의가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의 입과 귀가 되는 학내 언론은 대학 당국의 철저한 감시 속에
탄압받고 있고, 우리의 자유로운 활동과 목소리가 보장돼야 할 대학에선 학생자치 탄압이 버젓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노씨는 낮 12시쯤 크레인에서
내려와 경찰에서 업무방해 혐의로 조사를 받은 다음 오후 3시쯤 귀가했다.

대학과 학생들의 입장은 접점 없는 평행선이다. 노씨는 전화통화에서 "독문, 일문, 불문과 학생들은 무력감을 느낄 정도다. 인문대 기초학문 단위가 폐지될 위험에
 처했다"면서 "대학을 비판하는 게시물을 걸면 곧바로 철거당한다.

더 이상 통상적인 방법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올라갔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 학교 관계자는 "기초학문 단위를 말살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과 이름은 사라지지만 커리큘럼은 그대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세 학생에 대한 징계를 검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표현의 자유가 허용하는 정도를
넘어섰다고 본다"면서 "학생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학교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학문단위재조정안은 지난해 12월 29일 1차안 이후 학내 의견을 모두 수렴해서
만든 것이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노씨는 "학교가 강경하게 나온다면 우리도 대학생답게 참신한 아이디어로 싸우겠다"고 말했다.

중앙대 학생들이 고공시위를 하던 날 오후 5시 고려대 안암캠퍼스. 학생회관 앞 민주광장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 대학 동아리연합회가 주최한 '김예슬
선언으로 바라본 대학의 기업화와 20대의 현실' 토론회다.

"내 삶이 시들기 전에 대학을 거부한다"


민감한 현실 인식을 지닌 대학생은 이제 부패한 정권을 거부하기 이전에 먼저 대학을 거부한다. 지난 3월 10일 이 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로 시작하는 대자보를 교정에 붙였다. 그는 "국가는 의무교육의 이름으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고,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업체가 되었다"면서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라고 썼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한국사회연구회 김소리씨는 "학교는 (김예슬씨 선언에 대해) 어떤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자보를 철거해 갔다. 학교 당국만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도 자퇴 여부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이도 많다. 그러나 '김예슬 선언'이 던진 메시지는 사회적 문제임과 동시에 바로 우리 문제"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대학의 기업화를 성토하고, 스펙 쌓기 경쟁 속에서 시들어가는 20대의 삶을 괴로워했으며, 대학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다.
 그러나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은 20명도 되지 않았다.

고려대에는 4.19 기념비가 없다. 대신 4.18 기념비가 있다. 4월혁명 당시 고려대 학생들은 4월 18일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날 고려대 학생들이 반공청년단과
정치깡패들로부터 폭행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4월 19일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기념비는 학교 본관에서 민주광장으로 꺾여 내려가는 오른쪽 길 모퉁이에
서 있다. 1961년 4월 18일에 세워진 기념비 표지석에는 당시의 뜨거운 열정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사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분노의 불길을 터뜨린, 아! 1960년 4월18일! 천지를 뒤흔든 정의의 함성을 새겨 그날의 분화구 여기에 돌을 세운다."

1960년 4월, 대학은 한국 사회 민주화를 요구하는 혁명의 열기로 들썩였다. 2010년 4월, 대학은 자본의 질서가 만든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소수 학생들이 대학과
부딪치며 심한 홍역을 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