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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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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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 정호승 사랑이란 오래 갈수록 처음처럼 그렇게 짜릿짜릿한 게 아니야. 그냥 무덤덤해지면서 그윽해지는 거야. 아무리 좋은 향기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면 그건 지독한 냄새야. 살짝 사라져야만 진정한 향기야. 사랑도 그와 같은 거야. 사랑도 오래되면 평생을 같이하는 친구처럼 어떤 우정 같은 게 생기는 거야.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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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대하여 / 정호승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제 좋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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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편지 / 정호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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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앞에서 / 정호승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 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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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내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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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며 / 정호승 내려가자 이제 산은 내려가기 위해서 있다 내려가자 다시는 끝까지 오르지 말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 춘란도 피고 나면 지고 두견도 낙엽이 지면 그뿐 삭발할 필요도 없다 산은 내려가기 위해서 있다 내려가자 다시는 발자국을 남기지 말자 내려가는 것이 진정 다시 올라오는 일일지라도 내려가자 눈물로 올라온 발자국을 지우자 눈도 내렸다가 그치고 강물도 얼었다가 풀리면 그뿐 내려가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함께 올라왔다 내려가자 사람은 산을 내려갈 때가 가장 아름답다 산을 내려갈 때를 아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강요당하지 말고 해방되기 위하여 속박당하지 말고 내려가자 북한산에도 사람들은 다 내려갔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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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없다 / 정호승 나무에게는 무덤이 없다 바람에게는 무덤이 없다 깨꽃이 지고 메밀꽃이 져도 꽃들에게는 무덤이 없다 나에게는 추억이 없다 추억으로 걸어가던 들판이 없다 첫눈 오던 날 첫 키스를 나누던 그 집 앞 골목길도 사라지고 없다 추억이 없으면 무덤도 없다 추억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꽃샘바람 부는 이 봄 날에 꽃으로 피어나던 사람도 없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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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기도 / 정호승 이제는 홀로 밥을 먹지 않게 하소서 이제는 홀로 울지 않게 하소서 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길을 열어주시고 때로는 조그만 술집 희미한 등불 곁에서 추위에 떨게 하소서 밝음의 어둠과 깨끗함의 더러움과 배부름의 배고픔을 알게 하시고 아름다움의 추함과 희망의 절망과 기쁨의 슬픔을 알게 하시고 이제는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리어카를 끌고 스스로 밥이 되어 길을 기다리는자의 새벽이 되게 하소서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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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서울역 / 정호승 선운사 동백꽃을 보고 돌아와 서울역은 붉은 벽돌 하나 베고 지친 듯 잠이 든다 나는 프란체스꼬의 집에 가서 콩나물비빔밥을 얻어먹고 돌아와 잠든 서울역에 라면박스를 깔고 몸을 누인다 잠은 오지 않는다 먹다 남은 소주를 병나발을 불고 나자 찬비가 내린다 동백꽃잎 하나가 빗물을 따라 플랫폼 쪽으로 흐른다 보고 싶은 사람은 흐르는 물과 같이 내버려두어도 언젠가는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게 되는지 한 미친 여자가 찬비에 떨다가 내게 입을 맞추고 옆에 눕는다 옷을 벗기자 여자의 젖무덤에서도 동백꽃 냄새가 난다 낡은 볼펜으로 이혼신고서를 쓰던 때가 언제이던가 헤어지느니 차라리 그대 옆에 남아 무덤이 되고 싶던 날들은 가고 다시 병나발을 불자 비안개가 몰려온다 안개 속에서 포크레인이 서울역을 끌고 어디로 간다 동백꽃 그림자가 눈에 밟힌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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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 정호승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워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워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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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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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느 별에서 /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는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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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배를 기다리며 / 정호승 노을 지는 강가에 나가 막배를 기다리며 이제 기다릴 것은 다 기다렸으나 기다리는 막배가 오지 않았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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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날개 / 정호승 푸른 하늘이 아니라도 좋다 햇살이 빛나는 눈물의 가을 하늘이 아니라도 좋다 너의 봄에는 별이 오지 않아도 좋고 너의 가을에는 낙엽이 떨어지지 않아도 좋다 너는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으므로 몰매를 맞고 사막의 언덕처럼 무릎을 꿇고 돌아왔으므로 가랑비도 내리지 않고 밤은 고요히 깊어갔으므로 어머니의 손길이 너의 가슴에 닿았을 때 너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으므로 푸른 하늘이 아니라도 좋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어둠이 내리고 별이 반짝여도 네가 날아가야 할 가을 하늘이 아니라도 좋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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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편지 / 정호승 가을에는 사막에서 온 편지를 읽어라 가을에는 창을 통하여 새가 날으는 사막을 바라보라 가을에는 별들이 사막 속에 숨어 있다 가을에는 작은 등불을 들고 사막으로 걸어가 기도하라 굶주린 한 소년의 눈물을 생각하며 가을에는 홀로 사막으로 걸어가도 좋다 가을에는 산새가 낙엽의 운명을 생각하고 낙엽은 산새의 운명을 생각한다 가을에는 버릴 것을 다 버린 그런 사람이 무섭다 사막의 마지막 햇빛 속에서 오직 사앙으로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이 더 무섭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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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꽃 / 정호승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으면 죽어서도 그대로 피어 있는가 장미는 시들 때 고개를 꺾고 사람은 죽을 때 입을 벌리는데 너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똑 같구나 세상의 어머니들 돌아가시면 저 모습으로 우리 헤어져도 저 모습으로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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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 정호승 순아 오늘도 에미는 네가 보고 싶어 아픈 몸을 이끌고 역에 나갔다 와닿는 열차의 어느 칸에서고 네가 금방이라도 웃으면서 내릴 것 같아 차마 발길을 못 돌리고 에미는 또 울었다 남들은 다들 배우러 간다는데 원수놈의 돈을 벌어보겠다고 이른 새벽 종짓불 밝혀서 쑥국밥을 먹고 네가 고향을 떠나던 날 웬놈의 진눈깨비는 그렇게 뿌렸는지 처음엔 어느 곳 시다로 있다더니 곧 미싱사 보조가 되어 월급도 올랐다고 좋아라고 보내오던 네 편지 봉투째 부쳐오던 네 월급 이번 구정엔 틀림없이 에미 보러 온다기에 에미는 동네마다 옷장사를 나갔는데 눈 오는 시장바닥을 떠돌면서 기다렸는데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네가 먼저 가다니 이 에미를 남겨두고 네가 먼저 가다니 썰렁한 네 자취방 윗목에는 아직도 빈 라면 봉지가 나뒹구는데 순아 하늘에는 겨울에 무슨 꽃이 피더냐 이 겨울 하늘에도 눈물꽃이 피더냐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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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서울에도 오랑캐꽃이 피었습니다 쑥부쟁이 문둥이풀 마늘꽃과 함께 피어나도 배가 고픈 오랑캐꽃들이 산동네마다 무더기로 피었습니다 리어카를 세워놓고 병든 아버지는 오랑캐꽃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물지게를 지고 산비탈을 오르던 소년은 새끼줄에 끼운 연탄을 사들고 노을 지는 산 아래 아파트를 바라보며 오랑캐꽃 한 송이를 꺾었습니다 인생은 풀과 같은 것이라고 가장 중요한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산 위를 오르며 개척교회 전도사는 술 취한 아버지에게 자꾸 말을 걸고 아버지는 오랑캐꽃 더미 속에 파묻혀 말이 없었습니다 오랑캐꽃 잎새마다 밤은 오고 배고픈 사람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산그늘에 모여 앉아 눈물을 돌로 내려찍는데 가난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함께 가난을 나누면 된다는데 산다는 것은 남몰래 울어보는 것인지 밤이 오는 서울의 산동네마다 피다 만 오랑캐꽃들이 울었습니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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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위하여 / 정호승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첫아이를 사산(死産)한 그 여인에 대하여 기도하고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청년의 애인을 위하여 기도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 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저 새벽별이 질 때까지 슬픔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말라.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슬픔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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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게 / 정호승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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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 정호승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들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 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면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하느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있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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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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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 정동진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벋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형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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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올때는 첫사랑을 시작하지 마세요 / 정호승 첫사랑이니까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거니까 소나기 내리는 한여름 날씨처럼 불안하니까 소나기가 그치면 사랑도 끝나지는 않을까 그런 필요없는 걱정을 하게 되니까 '첫사랑은 원래 이루어질 수 없는 거래' 이런 말들로 아무리 위로를 삼으려고 해도 해마다 여름만 되면 여름마다 소나기가 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나면 그곳에, 우리들이 처음 만난 그곳에 소나기를 피하러 온 사람들만 처음보는 사람들만 비를 맞아서 그런 건지 눈앞은 흐릿하기만 소나기가 올 때는 그애도 내 생각을 할까 고민만 하게 되니까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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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 정호승 사람은 죽을 때에 한번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새들도 죽을 때에 푸른하늘을 향해 한번은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나 죽을 때에 한번도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길에 핏방울만 남기게 될까봐 두려워라 풀잎도 죽을 때에 아름다운 종소리를 남기고 죽는다는데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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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연애편지 / 정호승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별들이 하나씩 있지. 우리가 사랑 한다는 것은 서로의 가슴속에 있는 그 별을 빛나게 해주는 일이야. 밤하늘에 저렇게 많은 별들이 빛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별들이 많기 때문이야. 우리의 만남에는 어떤 절대자의 힘이 작용되었을 거야. 그건 분명해. 난 지금까지 널 만나기 위해 기다려왔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은 자기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게 가장 중요해.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데 따라서 인생이 달라져. 그동안 내가 어떤 부도를 만났느냐. 어떤 스승을 어떤 친구를 만났느냐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어. 그런데 어떤 여자를 만날 것인지는 널 만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어. 이제 널 만나게 되어 정말 기뻐. 정말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야. 우리는 무엇보다 중매로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한때 중매를 통하여 평생 같이 살 여자를 만나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던 적이 있어, 중매는 자칫 잘못하면 사랑의 바탕도 없이 조건적, 타산적, 이기적인 결혼으로 몰고 갈 위험이 다분히 있거든. 중매라는 형식 자체보다는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인 모습이 나는 싫어. 나는 내 삶의 자유스러운 형태 속에서 운명적으로 한 사람을 만나게 되길 원했는데, 이제 널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야. 정말 신의 축복을 받은 거 같애. 우리들의 사랑에는 신의 축복이 있어야만 해. 나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널 사랑할 때와 사랑하지 않을 때와 세상 모든 것이 어쩌면 그렇게 달라 보일 수 가 있을까. 함께 오가던 집 앞의 골목길도, 버스정류장 앞에 모인 사람들도, 거리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도, 플라타너스 잎새에 스치는 한 줄기 바람과 햇살까지도 예전에 보고 느끼던, 그런 것들이 아니야. 심지어 시내버스가 내뿜고 가는 매연까지도, 쥐약 먹은 쥐들이 물을 찾다가 그대로 죽어 있는 시궁창까지도 내겐 아름답기 그지 없는 하나의 풍경이야. 그뿐만이 아니야. 버스를 타고 무악재 고개를 수 없이 오가면서 본 인왕산이 갖가지 형태의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도, 그 인왕산 너머로 펼쳐진 하늘이 청자빛처럼 곱고 푸르다는 사실도. 비가 오다가 갠 날 밤에는 인왕산 밤하늘에 유난히 달무리가 곱게 진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밤하늘에 별이 많다는 사실도 난 너를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었어. 예전에는 밤하늘을 쳐다보아도 별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널 사랑하고부터는 밤하늘에 왠 별들이 그렇게 반짝이던지... 우리의 사랑을 신념화해야 해. 릴케가 그렇게 말했어. 감정을 신념화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건 인간의 감정만큼 변하기 쉬운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거야. 사랑의 감정도 변하기 쉽기 때문에 신념화하는 것만이 그 사랑을 변하지 않게 할 수 있다는거야. 사랑한다는 감정의 기초가 튼튼하면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적어도 우리한테는 말이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을 필요로 해. 우리는 서로 자라온 성장과정이나 환경, 형성된 성격이나 인격 삶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나 미래에 관한 꿈, 소망 등 모든 것이 다 달라 . 그런데 이렇게 다른 두 개체의 만남이 결혼까지의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고, 또 어떠한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일까. 내 생각엔 무엇보다도 서로를 이해 할 수 있는 성실한 노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야. 이해할 수 없으면 사랑할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방에 대해 진실되지 않으면 안돼. 그래야만 그 진실을 바탕으로 서로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형성될 수 있는 거야. 서로 믿음 없이는 사랑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우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해. 사랑도 노력이야. 또한 용기이기도 하고, 어떤 죽음보다 강한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어. 나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나는 그런 열정적인 꽃들이 좋아. 너도 잘 알겠지만 개나리, 진달래, 목련, 매화 같은 꽃들이 바로 그런 꽃들이야. 다른 꽃들은 잎이 난 뒤에 꽃이 피는데, 유독 그런 꽃들만은 그렇지가 않아. 겨우내 꼭 죽은 것 같기만 하던 가지 어디에 그런 꽃들이 숨어 있었는지 정말 신비한 일이야. 나는 그런 꽃들을 볼 때마다 나도 그런 꽃들처럼 열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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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 정호승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 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 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일 뿐 너를 사랑하고 죽으러 가는 한낮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배고픈 별빛들이 오랜만에 나를 포식하고 웃음을 떠뜨리며 밤을 밝히리라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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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 정호승 해질 무렵 서울 가는 야간열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산 그림자가 소리없이 내 무덤을 밟고 지나가면 아직도 나에게는 기다림이 남아있다 바람도 산길을 잃어버린 산새마저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 두 번 다시 잠들 수 없는 밤이 오면 아직도 나에게는 산새의 길이 남아 있다 어느날 찬바람 눈길 속으로 푸른 하늘 등에 지고 산을 올라와 국화 한 송이 내 무덤 앞에 놓고 간 흰 발자국만 꽃잎처럼 흩뿌리고 돌아선 당신은 진정 누구인가 어둠 속에서도 풀잎들은 자라고 오늘도 서울 가는 야간 열차의 흐린 불빛을 바라보며 내가 던진 마음 하나 별이 되어 사라지면 아직도 나에게는 그리움의 죄는 남아 있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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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꽃 / 정호승 죽은 아기를 업고 전철을 타고 들에 나가 불을 놓았다 한 마리 들짐승이 되어 갈 곳 없이 논둑마다 쏘다니며 마른 풀을 뜯어 모아 죽은 아기 위에 불을 놓았다 겨울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붉은 산에 해는 걸려 넘어가지 않고 멀리서 동네 아이들이 미친년이라고 떠들어대었다 사람들은 왜 무시래기국 같은 아버지에게 총을 쏘았을까 혁명이란 강이나 풀, 봄눈 내리는 들판 같은 것이었을까 죽은 아기 위에 타오르는 마른 풀을 바라보며 내 가랑이처럼 벗고 드러누운 들길을 걸었다 전철이 지나간 자리에 피다 만 개망초꽃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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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을 밟으며 / 정호승 모닥불을 밟으며 마음을 낮추고, 그대는 새벽 강변을 떠나야 한다. 떠돌면서 잠시 불을 쬐러온 사람들이, 추위와 그리움으로 불을 쬘 때에, 모닥불을 밟으며 꿈을 낮추고, 그대는 새벽 강변을 떠나가야 한다. 모닥불에 내려서 타는 새벽이슬로, 언제 다시 우리가 만날 수 있겠느냐. 사랑과 어둠의 불씨 하나 얻기 위해, 희망이 가난한 사람이 되기 위해, 꺼져가는 모닥불을 다시 밟으며, 언제 다시 우리가 재로 흩어지겠느냐. 사람 사는 곳 어디에서나 잠시 모닥불을 피우면 따뜻해지는 것이 눈물만이 아닌 것을, 타오르는 것이 어둠만이 아닌 것을, 모닥불을 밟으며 이별하는 자여. 우리가 가장 사랑할 때는 언제나 이별할 때가 아니었을까. 바람이 분다. 모닥불을 밟으며 강변에 안개가 흩어진다. 꺼져가는 모닥불을 다시 밟으며, 먼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은 모두 꿈이 슬프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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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 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 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옆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
2005-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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