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춘문예 당선 시 감상>
한 시대의 이정표, 신춘문예 작품의 새로움을 탐색한다
시인 유창섭. [본지편집주간]
신년 정초에는 언제나 맞게 되는 일 중, 시를 공부하고 시에 관심을 가지는 시인들에게는 신년의 출발과 동시에 자신의 작품을 돌아보고 새로움을 다시 생각하여보게 되는 신춘문예 작품의 발표가 시작의 이정표가 될지도 모르겠다.
신춘문예 제도가 가지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나 한계, 그리고 심사의 공정성 의문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그 경향을 탐색하여 보고, 한 시대의 흐름을 견주어 보며 읽어볼 가치가 있는 이만한 일이 있을까? 그리고 금년에는 어떤 작품들이 우리 신춘문예 시단에 출현하게 되었을까?
매년 맞이하는 신춘문예 당선 시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는 시를 읽고 시에 대한 새로운 흐름을 찾아보며 새로이 시를 공부하려는 독자들에게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마치 의상 디자이너가 새로운 흐름을 창조하는 패션.쇼를 준비하고 그 의상 발표회가 한 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듯, 우리는 이러한 연례행사와도 같은 신춘문예 작품을 읽으면서 앞으로의 시적 흐름이나 담론에 대한 생각과 반성을 겸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작품의 세계는 시인으로서의 작품활동을 시작하는 신인의 등장이라는 의미에서 기성 시인들의 사시斜視가 섞인 눈길을 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흐름의 역사가 이미 80여 년을 넘겨 진행되어 왔고, 또 그러한 흐름 속에서 새로운 시적 흐름을 형성하기도 하면서 발전적 역할을 ‘일부’ 감당해 왔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좋던 나쁘든 간에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가치로 은연중 형성된 선민의식의 하나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앞서 이 시대에 선각자적인 활동을 했던 김춘수 시인이나 오규원 시인, 이승훈 시인과도 같은 여러 시인들이 극단의 실험적 시 세계를 천착했던 것처럼 기성 시인들이 감당해 내어야 할 적절한 시적 실험이나 시적 발전에 대한 새로움을 이러한 신춘문예에 떠넘기고도 반성보다는 새로움에 대한 폄하나 비판적 시선을 보내는 것이 마치 기득권인양 생각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도 일견 모양새가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신춘문예에서 시도되거나 형성된 하나의 실험적 성향이 일회성으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그 추진하려는 힘이 신인이라는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중단되는 경우를 자주 목도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도 매우 의미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깊이 음미하여 보는 일도 한국시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필자 역시 한 때는 그러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대열에서 신춘문예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이러한 신춘문예 작품을 추적하고 감상하면서 그러한 소아적 생각이 우리 시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평가하고 수용하기도 하면서 그것이 가지는 장단점을 보완하여 발전시키는 일이 보다 더 미래의 우리 시를 값지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미래는 현재의 젊은이들---신인들 세대의 몫이며 결국 미래는 그들의 세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라고 기성세대만큼 고뇌하며 좋은 시를 추구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소위 요즘의 유행어처럼 ‘개념 없는 세대’보다는 더 ‘개념 있는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1. 한 시대의 문화 코드code 또는 새 경향
‘총체적 감춤’에서 ‘개별적 감춤’의 시대로
한 시대를 규정하는 문화 코드code나 문화적 경향---또는 문학적 경향이라고 해도 좋을 것임---이 형성되는 것은 어느 특정한 한 해의 흐름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한 흐름은 어느 때에 일시적으로 등장하여 그 힘을 축적하면서 변화하며 진화한다. 그러므로 2011년에 나타난 하나의 경향이 2010년도에 형성된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아마도 과거 몇 년 동안의 의식이나 의미가 점진적으로 모여 하나의 힘으로 작용하면서 형성되는 흐름, 또는 경향이라고 보아야 옳다.
정보의 흐름이 빨라진 현대에는 그 전파력이나 형성과정이 생각보다 더 넓고 유연하며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주게 된다.
먼저, 새로운 경향의 하나로 정리될 수 있는 흐름이 감지된다. 그것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유행처럼 번지던 난해시적 경향이나 실험적 시도는 그 중립화과정, 즉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과정을 겪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2010년부터 자리 잡던 시적 흐름의 하나로 신서정주의로의 복귀현상은 금년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흐름이 보이는데, 이것은 전에 비해 비문이라 비난받던 난해성은 크게 줄어들었고, 지난해에 지적하였던 것처럼 금년부터는 ‘압축’의 시대적 개념은 사라지고 ‘풀어냄’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한 점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종전의 압축이라 할 수 있는 ‘총체적 감춤‘의 현상에서 시적 흐름은 ’ 개별적 감춤‘의 시대로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짧은 시 속에 전 우주적 관점이 투영되고 인간의 고뇌가 투영되는 전체적 ‘압축’이라는 의미의 시적 흐름---예를 들면 서정주의 ‘문둥이’나, ‘동천’과도 같은 시---이 개별적 시적 행간에 그 의미의 결이 형성되는 ‘개별적 감춤‘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젊은 시인들이 각각의 시의 개별적 행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소위 ‘낯설게 하기’의 표현기교를 그 개별적 행에 투입하는 데에 치중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러한 개별적 행---따로 행을 분리하여 표현하는 행---의 1~2행에 시인의 사상이나 의미를 감추어 시적 호응을 깊이 끌고 가 감동에 이르게 하려는 의식이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세 번째로는 과거의 산문시가 줄어들고 자유시의 경향이 늘어난 대신 그 시에 투여된 행의 길이가 산문의 경계까지 확장될 만큼 행의 길이가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결과 시의 길이도 전에 비해 많이 길어지고 있는 추세를 보인다.
우스갯소리로 세간에 ‘신춘문예 시 작품은 21행에서 23행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지만 요즘의 시는 28행에서 30행을 넘는 시도 등장할 만큼 시가 길어졌다.
그만큼 사물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언술을 끌어내려면 언어적 감수성이나 억지스러운 상상력이 끼어들 가능성이 많아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징후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미 4~5년 정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극도의 산문시적 성향이 줄어들면서 산문적 장점---그 자유롭고 활달한 언술의 전개를 대체할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산문의 경계까지 바짝 다가서는 긴 시행의 형식으로 진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을 하게 된다. 바로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압축이라는 과거의 형식을 밀어내게 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로 나타나는 현상은 연 나누기 형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한 세 번째의 변화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지만 또 하나의 형식적 변화로서 연 나누기 형식으로부터의 탈출은 유려하게 흘러넘치는 의식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드러내려는 의도로 보이기도 하고, 과거의 한 행, 또는 연에 감추어진 긴장감을 속도감으로 바꾸어 긴장감을 만들어내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모든 시가 연 나누기 형식을 버리고 붙여쓰기 형식을 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간혹 연을 나누는 형식을 추종하더라도 하나의 연의 구성이 긴 호흡을 가진 형식으로 존재하여 그 의미가 전과는 판이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내용적 변화를 살펴보면 과거에는 시적 정서가 유장하고 그릇이 큰 내면의 인식에 시선을 두고 있었던 점에 비하여 현대의 경향은 보다 세밀하고 작은 움직임, 그 새로운 시선에 치중하고 있다는 인식이 짚여진다. 마치 현미경으로 사물을 관찰하듯 시적 화자의 감수성이 깊은 내면의 사소한 움직임을 표출하듯 미시적인 표현기교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적 흐름이 마치 현대 미술사조의 한 흐름---극사실주의---처럼 아주 미세한 정서적 흐름을 포착하려는 의식이 강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시의 정서적 중심에 있는 시적 대상이 커다란 인식대상이 아닌 것에 지나친 세밀한 의식을 투영시켜 표현기교로 포장하여 시적 아름다움이나 표현의 신선함을 부각시키는 데에만 시적 역량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그 많은 미세한 언술이 끌고 오는 세밀한 감성의 밀도가 부지불식간에 다각적으로 설명적 기능을 수행하여 시가 전에 비해 쉽게 읽히고 이해하기 쉬워졌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그러한 세밀한 부분에 대한 지적이나 비합리성을 개별적으로 지적하여 논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종전에 어느 평론가가 “적어도 시인은 최소한의 문법적 소양은 갖추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그러한 문법적 소양도 갖추지 못한 시를 당선작품으로 선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지만, 아직도 문법적 합리성이 결여되거나 이미지의 결합이 적절치 못한 시적 언술도 눈에 띈다.
한 편, 새로운 보수 정부의 등장으로 사회전반적인 문화적 흐름이 긍정적인 면 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다.
새 정부 출범 초기부터 문화를 담당한 장관이라는 사람의 정부친화성을 지향하는 편파적 행동이 세간의 이목을 찌푸리게 하였으며, 작가들에게 반정부적인 글을 싣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첨부시켜야 정부의 지원금을 주겠다든가 하는 졸렬한 움직임도 있었고, 민족의 정신적 혼을 고양시키기 보다는 실용이라는 미명하에 영어몰입교육이니 하는 모국어 폄하정책을 펼쳐오는 등의 치졸한 문화정책이 새 정부의 문화코드로 등장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척박한 문학적 현실을 견디면서 우리의 전정한 문학이 꽃을 피우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 심각한 사회적 불편이 야기되어 용산 사태, 촛불사태, 인터넷 글에 대한 정부의 무분별한 고발과 억제장치의 시행---그러한 사태가 지난 1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대법원의 무혐의 확정 판결을 받게 됨으로써 언론의 기능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행위---을 의도적으로 자행해 옴으로서 양심의 자유를 자기검열의 대열에 몰아넣었다든가, 인권에 대한 후퇴를 가져온 인권위원장의 등장과 인권에 대한 현저한 제약에 저항하는 일부 의식 있는 사람들의 인권상 시상거부는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시인들의 자각과 대응은 어떠했을까?
매우 소극적이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보신주의 속에 자연 발화되는 시적 고발이나 정서적 발화는 적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이 없지 않다.
아직도 영향력있는 매체이며, 신춘문예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하여온 조,중,동을 비롯한 정치세력과 줄을 대고 이익을 챙기려는 기회주의적 신문매체들의 신춘문예에는 그러한 사회고발적 시선이 담긴 작품이 설 자리는 없었으리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오직 정부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중단하지 않는 “경향신문”에서나 그러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선을 읽을 수 있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러한 사회적 시선이 담긴 시적 흐름이 여기저기에 나타났으리라는 것은 경향신문의 심사평 모두에서 발견되는 언술로 보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연유로 많은 사회적 갈등이 존재하고, 약자의 보호보다는 가진 자의 이익에 충실한 “정의“에 대한 시인의 시선과 비판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가 사회적 문제나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눈과 귀를 닫아건다면 이 사회를 정화시키고 치유하여야 한다는 문학적 소명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당선 시 작품과 그 의미있는 심사평을 발췌하여 인용 게재해 읽어 보기로 한다. 여기에 인용되는 당선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 읽어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 내용 속에 축적된 여러 가지 형식이나 의미에 대하여는 시를 읽고 시를 쓰는 시인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러한 신춘문예 작품에 대한 각 신문사의 당선 시와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이다.
2. 신춘문예 당선 시詩와 심사위원의 심사평
아버지의 발화점 / 정창준<경향신문>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 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가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냄새가 났다.
여름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뚝뚝 끊어졌고 물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할까. 학교를 그만 둘 작정이에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잖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없을 거에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어디 있는 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를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 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 거예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버릴 집을 지은 걸까요.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란 걸. 네 아버지는 아닐거다.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촛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의 발화發火.
(*)조세희 작<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함.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보수 정부가 들어선 뒤 일상화한 사회경제적 위기의식이 예비시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고이면서, 불안을 나누고 싶은, 나아가 희망을 찾고 싶은 연대의식, 소통 욕구가 발현된 것일 수도 있겠다........늘 최종심에 오르지만 결국엔 내려놓게 되는 시들이 있다. 언뜻 아주 시적이나 공허하고 생명감이 없는 시들. 경험이 내재화돼 있지 않은, 육체가 없는 시들...... 정창준의 시들은 우선 신선하다. 우리 시단에서 꽤 오래 실종됐던 현실인식이나 생활감각을 가진 시를 보게 된 것도 반갑지만, 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발성이 새롭고 독창적이어서 더 반갑다. 정창준의 시들은 감동적이다. 뭉클하다. 심금을 울린다. (심사 ; 이시영 시인, 황인숙 시인)--경향신문
파밭 - 홍문숙<세계일보>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오늘의 한국시가 갇혀 있는 프레임을 과감하게 깨트리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홍문숙의 ‘파밭’ 등은 시를 쓴다는 경직된 포즈가 안 보이면서, 자연스럽고 신선하게 읽혔다. 속도감도 있는 데다 요즘의 유행과도 한 발 떨어져 있는 것도 미덕이었다. 그러나 투고한 작품들의 편차가 심해 쉽게 신뢰감이 가지 않았다. (유종호 / 신경림)---세계일보
덩굴장미 / 김영삼 <강원일보>
저 불은 끌 수 없다
차가운 불
소나기 지나가자 주춤하던 불길 거세게 되살아나 담장을 또 활활 태운다 잔주름 늘어나는 벽돌담만 녹이면 단숨에 세상을 삼킬 수 있다는 건가 막무가내로 담장을 오르는 불살, 한 번도 불붙어 본 적 없는, 마를 대로 마른 장작 같은 몸뚱이 확! 불 질러 놓고 재 한줌 남기지 않고 스러져도 좋을 무덤, 큼직한 불꽃이 서로 팔들을 엮고 저들의 등을 밟고 올라선 불꽃들이 또 하나의 일가를 이룬 곳으로 나는 걸어 들어간다 나에게 불을 다오, 저들의 영토에 손을 내미는 순간,
나는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
불똥은 땅에 떨어져 꽃으로 자꾸 피어나는데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상투적인 언어의 시들과 신춘문예라는 옷을 입고 등장한 작품이 많았다. 그런 작품들은 자칫 진실성이 결여되어 가식적이고 허영적인 글이 되기 쉽다.....`덩굴장미'를 `차가운 불'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또한 “자신이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라는 비유는 매우 신선하고 감각적이었다. 주제의식 역시 보편성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특히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라는 표현은 생명의 상징성을 아이러니한 표현 기법으로 승화시킨 뛰어난 작품이었다. (심사위원 이승훈·이영춘씨 )---강원일보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 김지혜 <국제신문>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대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는 민들레의 씨앗이라는 미시적인 사물들에서 유목민들의 삶을 거시적으로 이끌어내는 발상이 참신한 시다. 민들레의 꽃말에서 유목을, 민들레 홀씨가 부푼 모양에서 유목민의 텐트인 게르를 연상하고, 이를 수태차, 말발굽 등으로 이어나가는 이미지가 자연스럽다. 이를 통해 유목민의 고단한 삶을 봄의 이미지를 살려 밝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점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본심 심사위원 ; 정희성 강영환(이상 시인) 허정(문학평론가) )---국제신문
1770호 소녀/우광훈 <매일신문>
꿈꾸듯, 한 편의 오래된 우화(寓話)가 소녀의 동공 깊숙이 스며든다. 소녀는 과묵하고 비밀스런 눈빛으로 책장만을 넘겨댄다. 별이 뜨고, 소녀는 마을 어귀 파피루스 숲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광활하고 황량한 사막이 있는, 때론 우아하고 권위적인 무덤이 있는 이곳 오시리스 동물원으로 흘러든다. 바다표범도, 펭귄도, 사막여우도, 치타도, 판다도 없는 이곳에는 햇볕에 잘 그을린 허허로운 얼굴에 키 큰 금발의 코끼리가 있다.
소녀는 향수어린 얼굴로 코끼리를 바라보다 석관 속에 놓인 접시저울을 조심스레 끄집어낸다. 타조깃털만큼이나 가벼운 그녀의 심장. 사육사의 경쾌한 신호음에 맞춰 코끼리가 저울 위로 올라선다. 똬리를 튼 비단뱀처럼 매끄럽게 내려앉는 그녀의 영혼. 순간 불꽃이 흩날리고, 파도가 울부짖고, 사자(死者)가 춤을 춘다. 기괴하고, 음울하며, 극도로 염세적인 그들만의 연극. 불멸을 향한 오래된 문명의 허망한 몸짓.
나일강에 물그림자 드리우고, 피안(彼岸)에 다다른 소녀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목욕을 한다. 늙은 고양이처럼, 별과 달이 질 때까지
그녀의 푸른 목덜미 아래로
모래 이빨 자국만이 선명하다.
☆ 1770호 소녀= 1976년 맨체스터대에서 로잘리 데이비드 박사가 집도한 이집트 미라. 학자들은 방사능 분석을 통해 서기 105~405년 사이에 미라로 제작된 갈색 눈의 소녀로 추정하고 있다.
당선작에서 보듯이 이 작품은 스케일이 참 크다. 시인의 상상력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깊은 사유를 거느린 채, 그것도 아주 느리게, 우주와 역사, 문명세계를 거닐며 현실과 삶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 시인은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닦아 쓰는 말의 절차탁마가 보였고, 행간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오랜 내공이 느껴졌다. 신뢰가 가는 시인이다. (심사위원 도광의(시인)· 문인수(시인))---매일신문
나무의 문 / 김후인 <부산일보>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그 몇 층 사이 긴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을 것 같다
바람이 층 사이에 머무르는 종種들이 많다
발아發芽라는 말 옆에 온갖 씨앗을 묻어 둔다
여름, 후드득 소리 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말해본다
나는 조용히 입 열고
씨앗을 뱉어낸 최초의 울음이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창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방 하나 들였다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었다
지붕이 비었을 때엔 빗소리가 크다
빈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밀어 넣으면
물이 날아올랐다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이
방안을 채울 줄 알았다
아궁이 옆에서 뜨거운 울음의 족보를 본다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
초여름, 초록이 타고 푸른 연기가 날아오르고
까만 오디가 달렸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이는 강습 등을 통해 만들어진 시가 아닌 자생적인 시 쓰기가 회복되고 있는 조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김후인의 시들은 단단하고 치밀한 문맥, 팽팽한 거리두기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동안 연마한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보내온 다섯 편 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좋을 만큼 수준도 골랐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견고한 윤곽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시의 힘은 숨 쉴 여백을 만들며 출렁거릴 때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정진규 시인 강은교 시인 최영철 시인)---부산일보
오래된 골목 / 장정희 <전북일보>
작은 아버지 바지가 걸린 바지랑대 사이로 푸석한 골목이 보였다.
구암댁 할아버지 이끼 낀 돌담을 짚으며 모퉁이를 돌아가고
양철대문이 덜컹, 삽살개가 기다림의 목덜미를 물었다.
입대한 큰아들 주검으로 돌아오던 그날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는 좀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발가락이 오그라든 대문은 문패를 버리고 밤새
신작로 쪽으로 귀를 던져 놓고 있었다.
낮은 지붕을 내려온 거미가 먼저 발을 내딛는 골목,
목줄을 잡아 맬 수 없는 굴뚝으로 연기는 담쟁이넝쿨같이 기어 나왔다.
뼈마디 드러난 상처를 덮듯 배추는 또 자라나고
햇살은 어두운 골목에 도둑고양이의 눈빛을 씨앗처럼 심어주었다.
다섯 살 박이 손자가 작은 아버지 팔을 잡아당기며 대문을 나서고.
나는 빨랫줄 문 집게처럼 뻣뻣한 골목의 시간을 만지고.
바람이 골목에 발을 담글 때마다, 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수없이 들여다보았다.
좋은 시는 남들과 다른 언어를 건지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그렇게 태어난 시는 이기적이면서 품이 넓다. 그런데 비유가 생경한 시, 비문이 노출된 시, 인위적으로 제작하는 데 급급한 시들이 적지 않았다. 다들 조바심을 내는 듯했다.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친 시들이 그만큼 아쉬웠다는 말이다......장정희 씨의 '오래된 골목'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언뜻 보면 평이해 보이지만 자신의 사유를 잘 간추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는 시다. 군데군데 참신한 묘사적 표현이 시에 생기를 더하면서 '오래된 골목'의 전경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황동규(시인·서울대 명예교수),안도현(시인·우석대 문창과 교수))---전북일보
외출을 벗다 / 장요원 <무등일보>
한낮의 외출에서 돌아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어둑하다
탄력에서 벋어난 하반신이 의자에 걸쳐 있고
허공 한쪽을 돌리면
촘촘했던 어둠들, 제 몸쪽으로 달라붙는다
의자의 각을 입고 있는 외출
올올이 각角의 면을 베꼈을 것이다
이 헐렁한 정류停留의 한 때와 푹신함이 나는 좋다
실수를 엎질렀던 재킷과
몇 방울 얼룩이 튄 블라우스의 시간을 벗을 수 있는 헐렁한 집
여전히 외출들은 걸려 있거나 접혀져 있다
그러고 보면 문 밖의 세상은
모든 외출로 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빛도 식욕도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도 모두 외출에서 돌아와 있는,
텅 빈 건너편이 조용히 앉아있는 의자
침묵의 소요들이 모두 돌아간
세간들에 달라붙는 귀가한 소음들
왜 집안엔 깨어지기 쉬운 소리들만 있는 것인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녁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도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눅눅한 각을 입고 있는 스타킹과
긴 팔을 뻗어 아카시아 이파리를 헹구는 바람의 시간
잠든 몸을 조용히 돌아다니는 숨소리
괄호를 열고 몸을 구부리는 잠이 깊다.
세 편의 투고작이 고른 수준에 올라 있는 장요원의 시 '외출을 벗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도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는 '스타킹'의 환치는 비교적 젊고 튼튼하게 읽혔다. 한 편으로 어딘지 수사와 외피에 조율하는 듯 여겨지는 그의 시업의 미래는, 현재의 바탕 위에서 '깊이'의 모서리를 체득하는 일에 한동안 복무해야할 것으로 비쳐졌다. (심사 ; 정윤천(시인))---무등일보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 강은진 <문화일보>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결국 당선작은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으로 결정되었다. 이 시는 ‘눈썹 문신’을 하는 우리 삶의 독특한 한 현상을 발견한 시적 눈의 신선함에 일단 호감이 갔다. 특히 눈썹 문신을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에 빗된 점이 해학적이고 애절하다. 그러나 이 시에 존재하고 있는 ‘이만호 할머니’가 시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음으로써 대표성을 잃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이만호 할머니가 누구인지 암시가 있었으면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자폐적 상상력이 판치는 한국시단에서 삶의 건강한 구체에서 꽃핀 이만한 작품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이 시를 당선작으로 밀 수 있는 이유였다. (심사위원 ; 황동규·정호승) ---문화일보
유빙(流氷) / 신철규 <조선일보>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신춘문예 투고 시는 한국 현대시의 미래를 밝히는 작품이어야 한다......‘유빙’에는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개성적인 눈이 있다. 현대사회의 개체적 삶을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에 은유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시 본래의 내재적 리듬감을 살려 유연한 속도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신인다운 내면적 사고의 흐름도 알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과장된 이미지나 허장성세가 없고 기성의 어떤 억지스러운 틀에 갇혀 있지 않아 자유분방하다. ( 문정희· 정호승 시인)---조선일보
분천동 본가입납(本家入納) / 이명 <불교신문>
태어나 최초로 걸었다는 산길을 돌아
푹신한 나뭇잎을 밟으며
청주 한 병 들고 능선을 밟아 내려갔니더
누님이 벌초를 해놓은 20년 묵은 산소는
어둡고 짙은 주변의 빛깔과는 달리 어찌나 밝은지
무덤이 아니었니더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담한 봉오리
그랬니더, 그것은 어매의 젖이었니더
진초록 적삼을 살짝 풀어 헤친 자리에 속살이 드러나고
빛이 쏟아져 나왔지요
나는 그만 아기가 되어 한참동안 보듬고 쓰다듬고
얼굴을 파묻었을 때는 맥박소리가 들려오고
숨이 턱 막혔었니더
내가 오는 줄 알고
미리 나뭇잎으로 길을 덮어두고
아삭아삭한 소리까지 그 속에 갈무리해 두었디더
나는 낙엽을 밟으며 산등을 넘고
어매는 그 소리에 옷고름을 풀었겠지요
적삼 속에서 영일만 바다가 아장아장 걸어 나오고
해안선이 출렁거리고
몽실몽실한 백사장이 예전과 같았니더
이 젖의 힘으로 여태껏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 살고 있고
하늘 가득 씨앗들이 날아오르고
파릇파릇 아기 부처들이 자라나고 있었니더
시도 예술의 한 양식인 이상 시대적 패러다임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몇 해 특히 신인들이 좇아가는 시의 흐름은 우리 시의 정체성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당선작 ‘분천동본가입납’은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어메의 젖”과 만나는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을 살고 잇는” 정경들이 크게 꾸미지도 않으면서 깊고 은은한 가락으로 펼쳐진다. 다시 아기가 되는 화자와 어메와의 해후가 “…니더”의 화법으로 전해주는 잘 익은 말의 빛깔이 오래 묵은 향기로 피어난다. 함께 보내온 ‘추사가 보내온 저녁’이 작품을 끌어올리는 밑밭침이 되었음을 덧붙인다. (이근배 시인 )---불교신문
아주 흔한 꽃 / 변희수 <영남일보>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을
안녕이란 말 대신 쓰고 싶어질 때
쓰레기통 옆 구두 한 켤레
말랑한 기억의 밑창을 덧대고 있다
달릴수록 뒷걸음 치는 배경 박음질 해나가듯
나란히 하나의 길을 꿰고 갔을 텐데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가진 한 짝
축을 둥글게 깎고 고르는 순간
길은 저마다 제 발에 꼭 맞는 문수로
열려 있었을 것이지만 떠날 때는
모두, 안개를 배경으로 걸었을 것이다
가파른 직선 혹은 곡선의 에움길을
밀어 넣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구둣볼
끈을 고쳐 매고도 매듭 없이
결의만 다지던 저녁이 온 것처럼
코끝을 돌려놓고 자도
늘 잘 못 든 길처럼 헛갈리는 아침
이정표 없는 허방에도 덜컹, 꽃피는 길 있었는지
밑창에 찍힌 발가락 모양이 꾹꾹 눌러놓은
압화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다
어느 고대국가의 지층에 새겨진 족적처럼
누구나, 뒤축이 닿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탁본하게 되는 것이므로
몫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놓고
서늘하게 빠져나간 맨발
얼룩도 꽃의 흔적을 닮을 수 있는지
헐렁한 구두 속의 여백이 꽉 찬다
변희수씨는 전체적으로 사물과 세계를 적절히 통제해 시적 긴장을 부여할 줄 아는 응모자로 여겨졌다. ....범상한 소재들로 삶의 미묘한 국면들을 저울질하고, 그만한 짜임새의 시로 격상시킨 것은 그의 수련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아우를 만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까 기대하게 하였다. .....심사위원들은 변희수씨의 응모작 중에서 '아주 흔한 꽃'이 고단하게 걸어온 삶의 내력을 행간과 행간 사이로 더욱 섬세하고 선명하게 부조(浮彫)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심사위원 이하석·김명인) ---영남일보
고사목 / 고경숙 <한라신문>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고경숙씨는 언어를 다루는 재치가 상당해보였다. 묘사의 선명성이나 비유의 참신함에 위트까지 두루 갖췄고 리듬에 대한 고려도 엿보인다. 그러나 재치가 승해서일까, 가끔씩 어휘가 시적 맥락 안에서의 조화를 잃고 튀는 흠결이 있었다. 나름대로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근본 명제를 들어 우리는 최종적으로 고경숙씨의 '고사목'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김승립·시인>---한라신문
새장 / 강정애 <서울신문>
나무 밑 떨어진 이파리들은 모두
누군가 한 번쯤 신었던 흔적이 있다
낡은 그늘과 구겨진 울음소리가 들어있는 이파리들
나무 한 그루를 데우기 위해
붉은 온도를 가졌던 모습이다
저녁의 노을이 모여드는 한 그루 단풍나무 새장
새들이 단풍나무에 가득 들어 있는 저녁 무렵
공중의 거처가 소란스럽다.
후렴은 땅에 버리는 불안한 노래가 빵빵하게 들어 있는
한 그루 새장이 걸려 있다
먼 곳을 날아와 제 무게를 버리는 새들
촘촘한 나뭇가지가 잡고 있는 직선의 평수 안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후드득, 떨어지는 새들의 발자국들
모든 소리를 다 비운 새들이 날아가는
열려 있으면서 또한 무성하게 닫혀 있는 새장
허공의 바람자물통이 달려 있는 저 집의
왁자한 방들
잎의 계절이 다 지고 먼 곳에서 도착한 바람이
그늘마저 둘둘 말아 가면
새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새의 혀들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의 혓바닥들만 부스럭거릴 것이다
모두 그늘을 접는 계절
간혹, 지붕 없는 새의 빈 집과
느슨한 바람들만 붙어 흔들리다 간다
한 그루 단풍나무가 제 가슴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저녁
후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나무의 귀
누군가 새들의 신발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다.
응모작들이 기성 시단의 어떤 흐름에 깊이 감염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말과 말 사이의 공간이 너무 커서 완전한 독해가 어려운 시들이 적지 않았고, 유행하는 소재를 검증 없이 끌어다 쓰는 안이한 시도 여럿 있었다. 감동을 생산하려는 의지보다 시를 잘 만들려는 욕망이 비대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시의 리얼리티에 대한 배려가 전반적으로 부족해 보였다.
강정애씨는 시적 대상을 객관화하면서도 충분히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시인이다. 당선작 ‘새장’은 생각과 언어의 결이 살아 있는 시다. 자칫하면 상투성의 늪으로 빠질 수 있는 나무나 새와 같은 소재를 붙잡고 묘한 긴장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감정을 자제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대상을 자기 안으로 바짝 잡아당겨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방증이다. (시 부문 본심 심사위원 백무산·안도현 / 예심 심사위원 유성호· 손택수 )---서울신문
손톱 안 남자 / 송해영 <전남일보>
매니큐어 칠을 한 손톱 안엔
내 손톱을 장악한 한 남자가 살고 있다.
자꾸 자기 말 좀 들어보라며 나를 불러들인다.
무시를 할수록 자꾸 성가시게 군다.
귓가에 쟁쟁하게 맴도는 그 말은
달콤한 사탕을 물려주는 유혹과 같다.
더욱 들여다보라고 보채는 남자,
이 남자가 주는 카타르시스라니!
칠을 벗길수록 더욱 강해지는 스릴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어 나를 정도껏 조종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한다.
바르라는 속삭임이 귓바퀴를 타고 들려오면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고 한참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이것으로 나는 어디에서나 돋보일 것을 예상한다.
그냥 이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일주일은 잠잠할 테지.
손톱 속 남자는 변덕이 심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 것, 어느새 이 유혹에 빠져 있다.
손톱 안에 살고 있는 남자,
칠을 지우면 죽어버리는 가혹한 운명의 남자,
내 손톱 안엔 한 남자가 징그럽게 살고 있다.
시들의 경향은 전반적으로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퇴조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라고 치부하기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의 약화가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이를 대체한 얄팍한 생태주의, 깊은 사유에 도달하지 못한 채 감상주의에 머무른 많은 내면의 시, 그리고 판타지들을 보면서 괴로움이 많았다......송해영의 <손톱 안 남자>엔 반전이 있다. 일찍이 서정주의 시 이래 여자의 '손톱'은 성적코드였다. 이 손톱에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하는 남자의 요구에 부응한 메니큐어칠 행위는 남자의 변덕스런 욕망에 노예가 되어가는 여자의 안쓰러운 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반전은 남자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진술로, 이는 우리 마음속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갈등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의 마음은 남자의 '조종'을 거부하면서도 또 다른 마음은 어느새 나도 그를 조종하고 싶은 성적욕망 말이다. (고재종 시인. 광주ㆍ전남작가회의 회장)---전남일보
마드리드 호텔 602호 / 이재성 <경남신문>
독한 럼주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하급선원들이 돌아온 바다와
떠나갈 바다를 위해서 건배를 하는 사이
호텔 602호는 마스트를 세우고 바다 위에 떠있다.
아니 이미 항진 중인지도 모른다. 바다에서
허무, 낡은 시집의 행간, 해무는 같은 색이다.
점점 깊어지는 밤의 해무
수시로 무적이 길게 혹은 짧게 울리고
J는 아직 조타륜을 잡고 자신의 바다를 항해 중일 것이다. 조타실의 문을 열자
바다 속에서는 해독할 수 없는 안개가 타전되고
나는 이미 길을 잃은 한 척의 운명
해도를 펼쳐 북극성의 좌표를 찾는다.
J도 이 바다를 떠나 희망봉을 찾아 갔을 것이다.
스무 살, 바다를 잡을 때마다
늘 빈 손바닥이었다.
지금도 바다는 나에게 오리무중이다.
늙은 고양이가 친숙한 비린내를 풍기며
안개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안녕, 이 하룻밤도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안녕, 나도 사라질 것이다.
J가 누워 있던 침대엔
낡은 바다가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이번 항해가 길어질지 모른다.
어쩌면 무사히 귀항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드리드 항에서 이 호텔은
항해사들로 이미 만원이다.
하지만 이 호텔에는 602호는 없다.
‘마드리드호텔 602호’는 오랜만에 만나는 신춘문예 풍의 시다. 28행의 비교적 긴 시인 데도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만만찮았다. 한 번 읽으면 끝까지 읽게 하는 환상적인 시적 매력에, 바다에 대한 이해력도 뛰어났다. 마드리드호텔 602호에서 시작되는 바다 이야기가 마지막에 가서 ‘하지만 이 호텔에는 602호가 없다’는 반전이 시의 맛을 진하게 느끼게 했다. (심사위원 이광석· 정일근)---경남신문
팔거천 연가 / 윤순희 <경상일보>
여름밤 내내 *팔거천변 돌고 또 돌았습니다 아직 물고기 펄떡이는 물 속 물새알 낳기도 하는 풀숲 달맞이꽃 지천으로 피어 십 수년째 오르지 않는 집값 펴지기를 깨금발로 기다리지만 대학병원 들어서면 3호선 개통되면 국우터널 무료화 되면 하는 황소개구리 울음 텅텅 울리는 탁상행정 뿐입니다
풀숲에서 주운 새들의 알 희고 딱딱한 것들 날마다 수성구를 향하여 샷을 날려 보내지만 죽은 알들은 금호강을 건너지 못하고 팔달교 교각 맞고 튕겨져 나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강을 건너지 못하면 저 물새들 살얼음 낀 물속에서 언 발 교대로 들어 올렸다 내릴 텐데
환하게 타오르던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의 불빛 온기는 어디까지 번져 갈 것인지요
물새들의 울음소리 팔거천 가득 울려 퍼지는 날 낮달 같은 새댁들 강변 가득 붉은 나팔 불며 여덟 갈래 꿈꾸며 비상 하겠지요.
(*팔거천 : 팔공산 자락에서 흘러든 여덟 갈래 물줄기가 합쳐져 대구의 강북인 칠곡 신도시를 거쳐 금호강으로 흘러드는 하천,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달집태우기 행사를 한다.)
‘팔거천 연가’는 다른 작가의 작품들에 비해 삶의 무게나 연륜이 느껴지는 구체적인 표현들이 안정감이 있고 감수성도 예민하여 호감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제출된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의 질량도 듬직했다. ( 정희성 시인) ---경상일보
모래내시장 / 하미경 <전북도민일보>
야채 썩는 냄새가 고소해지면
장터는 복숭아처럼 익는다
중고 가게 앞 내장을 비운 냉장고가
과일의 단내며 생선냄새며 땀내 들을
가리지 않고 거두어들일 무렵
은혜수선집은 벌써 불을 켜고 저녁의 한 모퉁이를 깁는다
박미자머리사랑을 지나면 몽땅 떨이라느니
거저 가져가라느니 농약을 치지 않은 다급한 말들이
등을 타고 내려 고무줄 늘어난 추리닝처럼
낭창낭창 소쿠리 속으로 들어간다
남들 보기 거시기 하다고 자식들이 말려도
팔 것들을 꾸역꾸역 보자기에 챙겨 나온 할머니는
돌아갈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지
빠진 이 사이로 질질질 과즙을 흘리며
복숭아 짓무른 데를 떼어 물고 오물거린다
문 닫는 속옷 가게에는 땡땡이무늬 잠옷이
잠들지 않고 하늘거린다 잠옷을 입고
늘어지게 자고 싶은 허리 대신
빈 바구니마다 어느새 어둠이 드러누웠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맨 앞에 내세운 작품들은 흔히 말하는 ‘신춘문예적 경향’을 의식하느라 온몸에 힘이 들어간 것 같고, 그런 경향으로부터 조금 비껴 선 두 번째 작품들이 비교적 안정감을 유지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분천동 본가입납」과「모래내시장」두 작품을 마지막까지 저울질하다가 작품의 안정감과 말맛과 그 정감들이 다소 돋보이는 하미경의「모래내시장」을 당선작으로 뽑으면서 동짓달 긴긴 밤, 뽑지 못한 작품들 때문에 못내 마음이 무겁다. (정양 시인)---전북도민일보
오늘의 운세 / 권민경 <동아일보>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몸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시적 언어의 능력과 상투성을 비껴가는 감각이 돋보였다.
작품들이 가진 안정감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들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으나, 설명적인 부분들이 감상적인 의미 안으로 시를 가두었다. 권민경 씨의 시는 묘사와 표현의 감각이 청신했다. 당선작이 된 ‘오늘의 운세’라는 작품의 경우, 개인적 운명과 삶의 시작을 둘러싼 시적 해석이 세밀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으며, 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심사위원들은 시간의 아이러니에 살아있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능력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이시영 시인. 이광호 문학평론가)---동아일보
3. 당선 시 작품의 감상
앞에서 19개 일간지에 발표된 신춘문예 당선 시 작품을 발췌하여 인용해 보았다.
이 정도의 작품을 정리한다면 금년의 신춘문예에 대한 경향이나 특징을 살펴본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대표성이 있는 내용을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심사위원들의 개별적 평가와 의견이 있으므로 그 내용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적당치 않아 보인다. 그것은 시를 읽는 감상자, 또는 독자의 수준과 가치관에 따라 그 의견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선작품은 “심사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당선자가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는 지난해에 있었던 어느 심사위원의 토로는 매우 솔직하며 그 의견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 당선작을 살펴보면서 좀 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생각을 덧붙여가며 작품을 읽어 보기로 한다.
“아버지의 발화점”(정창준<경향신문>)에서 지적한 “아주 시적이나 공허하고 생명감이 없는 시들. 경험이 내재화돼 있지 않은, 육체가 없는 시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들은 육화되지 않은 생경한 이미지들을 걸러내어 잔뜩 표현기교로 치장하려는 얄팍한 시창작 태도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이러한 시들은 자칫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내면을 음미하려 하면 그 자체 스스로 그 속성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행간에 다소의 이미지 연결성이 매끄럽지 못한 점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다행이 경향신문에서는 지난날, 용산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절박함이나 가지지 못한 자의 비애가 살점처럼 묻어나는 시를 당선작으로 뽑아 낸 것 같다.
“파밭”(홍문숙<세계일보>)에서 심사위원들의 기준에서 언급된 요즘의 “한국시가 갇혀 있는 프레임을 과감하게 깨트리는 작품”이란 무엇일까? 그 정의나 핵심은 시인과 독자의 상상에 맡겨져 있다. 아마도 모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현대시의 진화 과정의 한 모습을 지칭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보다 새로운 장치가 숨겨진 어떤 다른 창조적 형식이나 이미지의 발현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당선시는 심사위원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요즘의 유행과도 한 발 떨어져 있는 시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도 그러한 유행의 한 조각처럼 여겨지는 애매성이나 자기 담론으로 보이는---“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와 같은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던 것인지 해독하기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덩굴장미”( 김영삼 <강원일보>)에서 말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상투적인 언어의 시들,…. 그런 작품들은 자칫 진실성이 결여되어 가식적이고 허영적인 글이 되기 쉽다”는 심사위원의 지적은 한 때 유행하던 난해성이나 애매성에 기반을 둔 시를 지칭한 듯이 보인다. 사실 시를 가르치고 있는 어떤 교수들조차 그런 형식의 시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조심스럽게 개진되곤 하였다.
이 시대에 그런 심상 구조를 모두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일 터이므로 그런 질문에 대하여는 ‘무의견’으로 넘기는 것이 현학적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서정성이라는 표찰을 달고 나타난 시들이 과거의 틀을 깨고 새 형식으로 탈바꿈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릇 새롭다는 것은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김지혜 <국제신문>)을 읽으면서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인다면 국제신문은 다소 보수적인 틀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매년 좋은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내는 선 굵은 시선을 가진 것 같다.
이번에도 시적 상징성이 높은 환기력이나 연상성이 높은 시가 뽑혀 그 상상력의 공간을 넓혀 놓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1770호 소녀”(우광훈 <매일신문>)라는 작품은 시에서 독자에게 주는 상상력이나 그 상상력을 통한 감동의 결이 폭넓게 유지되도록 하는 시적 환기력은 시의 성취에 깊은 인상을 준다. 또 그러한 예각적 시선이 우리 현대 시를 더욱 발전시키고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믿는다.
하나의 역사성을 상징하는 고대 미이라를 응시하면서 그 이미지와 의미를 걸러내는 이 시는 ‘시인의 상상력이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준다.
“나무의 문”(김후인 <부산일보>)를 읽는다.
당선시를 재평가하는 일이 필자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시를 읽으면서 생기는 의문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단단하고 치밀한 문맥, 팽팽한 거리 두기가 믿음직스러웠다.’라는 평가를 읽으면서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는 구절을 떠올린다. 아마도 ‘바람이 실어온 씨앗을 키 작은 뽕나무로 키웠다‘는 의미일 것 같은데 문장의 합리성이 다소 떨어진다. 이 시에서 느껴지는 ’연마한 내공이 만만치 않음‘도 인정이 되지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 초록의 연기가 / 다 빠져나가고 있다”는 언술 뒤에 무엇이 상상되는 것일까? 한참을 생각해 보게 된다.
“오래된 골목”(장정희 <전북일보>)은 대단히 현란한 묘사 중심의 표현의 기교를 가진 시인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남들과 다른 언어를 건지려는 노력’에서 나온 결과일까? ‘오래된 골목’의 전경에서 감상자는 무엇을 느끼게 될 것인가? 쓸쓸함? 삶의 곤고함? 여러 가지 삶이 오가는 작은 일상적 공간의 평이함 속의 비범함과도 같은 것들일 것인가? 시적 언술이 매우 활달하다. 참신한 표현들이 마음을 현혹시킨다. 그러나 그 뒤에 숨겨진 감동은 무엇일까.
이 시의 소재도 신춘문예 작품에서 많이 보아온 소재의 상투성이 느껴지는 소재의 하나로 생각된다.
“외출을 벗다”(장요원 <무등일보>)에서는 외출에서 돌아온 방안의 모습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조립하여 재미있게 그려낸 시로 읽힌다.
그 속에 단단하게 뭉쳐진 외로움이 보인다. 그 조용한 소리들의 세계에서 심사위원의 지적처럼 “수사와 외피에 조율하는 듯 여겨지는……. 현재의 바탕 위에서 '깊이'의 모서리를 체득하는 일”이 충족된다면 발전이 기대된다는 말에 공감한다.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강은진 <문화일보>)을 읽으면 한 때, 눈썹을 밀어내고 눈썹을 눈썹 연필로 그리던 시절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 시절을 건너온 할머니가 아예 눈썹 문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때가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시에 존재하고 있는 ‘이만호 할머니’가 시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음으로써 대표성을 잃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처럼 그 할머니에 대한 심상은 절제되고 시인 자신의 심상으로 대체시키고 재단하여 자신의 의지를 억지스럽게 밀어붙인 것 같은 점이 생명력을 감소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유빙(流氷)”(신철규 <조선일보>)에서는 ‘신춘문예 투고 시는 한국 현대시의 미래를 밝히는 작품이어야 한다’고 심사위원들이 개괄적 틀을 밝히고 있다. 미래를 밝히는 작품이란 어떤 작품일까?
내용과 형식 면에서 종전과는 다른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이나 내용에 상투성이나 익숙함이 드러나지 않는 새로운 시적 상상력과 정서적 발현이 드러나 보이는 시선이 조합된 작품이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빙‘에서는 인간관계에서 서로 어긋나는 삶, 함께하면서도 각기 대립되어 마주보는 삶에 대한 통찰이 보인다. 그 인간적 대립이나 상반되는 삶에 대한 긍정적 시선이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이 시에서도 요즘의 새로운 경향이 일부 접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천동 본가입납(本家入納)”(이명 <불교신문>)에 대한 심사평에서 심사위원이 ‘시도 예술의 한 양식인 이상 시대적 패러다임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몇 해 특히 신인들이 좇아가는 시의 흐름은 우리 시의 정체성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지적은 음미할만한 지적이다.
모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현대시의 한 경향을 볼 수 있는 이 시대의 신춘문예 작품에서는 새로움을 앞세워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의 변화가 기성의 틀을 부수고 그 나름대로 ‘새로운 정체성 실험’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분천동 본가입납‘이라는 시는 예스러운 제목에 현대적인 이미지와 형식을 투입한 역설이 존재하는 시적 분위기를 던져 준다.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어머니의 정을 추모하고 과거의 기억들과 재회하며 그 기억들이 세상을 먹여 살리는 힘이 되고 있음을 설파한 이 시는 토속어와 곁들여 정감을 이끌어 낸다.
“아주 흔한 꽃”(변희수 <영남일보>)이라는 이 시가 시적 정서의 환기력이 높고 짜임새 높은 시로 격상시킨 점이 평가되고 있다고는 해도 이번 신춘문예 작품의 소재 측면에서의 ‘상투성’은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이 ‘구두’라는 소재는 이미 작년(2010년)에도 “검은 구두”(한국일보)나 “허씨의 구둣방”(경남일보)에서 당선작에 뽑힌 적이 있는 소재로, 오래전에도 그러한 소재의 유사성(시 “신발론”)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같은 소재를 가지고 신춘문예 작품에 대한 습작을 하는 사람들의 유사한 이미지의 영향을 받은---이미지의 참신성이 떨어지는---작품일 것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 표현에서도 어김없이 ‘밑창’이 등장하고, 구두 밑창이 비스듬히 달은 기울기---뒷축이 닳는 순간---의 유사한 표현 이미지가 등장하는 것은 이미지 표절이라는 논란을 일으킨다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유사성을 가진 이미지의 시를 얼마나 목도해야 하는 것일까? 신춘문예에 등장하는 소재는 이렇게 한정적이고 빈곤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고사목”(고경숙 <한라신문>)은 현란한 묘사의 참신성이 있다고 평가된 시이다.
이 시에서 고사목이 전하는 ‘풍장에 든 까닭...발설할 수 없어‘ ‘피우는 은유’나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또는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상징성이 전해주는 어떤 구체성이 잡히지 않는 ’현란한 묘사‘는 과연 시의 내용을 풍성하고 상상력이 약동하는 어떤 이미지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답답함이 있었다. 이러한 묘사에 목을 매는 시가 주는 역동성이나 예술성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새장”(강정애 <서울신문>)은 단풍나무를 하나의 새장으로 형상화시킨 상상력이 단단하게 맞물려 있는 시로 읽힌다. 그 상상력의 배분도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 만의 어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와도 상통할 것 같다.
심사평에서 요즘의 응모 된 시가 대부분 ‘기성 시단의 어떤 흐름에 깊이 감염되어 있는 느낌’이라든가 ‘감동을 생산하려는 의지보다 시를 잘 만들려는 욕망이 비대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에 동의한다.
앞의 ‘기성 시단의 어떤 흐름’이란 어쩌면 상습적으로 신춘문예 작품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틀에 박힌 흐름을 말한 것은 아닐까? 바로 그런 지적은 기성 시단에게 보다는 신춘문예에 돌려세워 져야 할 지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 같다.
“손톱 안 남자”( 송해영 <전남일보>)에서는 심사위원이 ‘시들의 경향은 전반적으로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퇴조가 뚜렷하며’ ‘시대의 흐름이라고 치부하기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의 약화가 염려스러울 정도’라고 지적한 부분은 아마도 응모된 작품의 전반적인 현상에 대한 지적으로 이해된다.
사실 이 시대에 많은 사회적 갈등과 문제들이 서로 편 가르기를 하고 있는 이때, 보다 문명비판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시가 등장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자기검열에 순화된 것인지, 아니면 비껴앉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던 것인지 전반적으로 신변잡기나 지엽적인 것에 눈길을 주어 시가 왜소화되어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내면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갈등’을 내재시켜 역설과 그 역설에 대한 역설을 천착해 낸 철학적 인식은 새롭게 느껴진다.
“마드리드 호텔 602호”(이재성 <경남신문>)은 바다의 상징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접목시켜 바다를 ‘험난한 세상’의 하나로, ‘인생의 사랑이 공간’의 하나로, ‘희망’을 찾아가는 통로의 하나로 이미지를 중첩시킨 이 시는 속도감 있게 읽힌다. ‘신춘문예 풍의 시’라고 평한 것을 보면 시의 형식이나 흐름이 그러한 인상을 주지 않았나 싶다. 자유시의 형식을 빌렸으면서도 산문적이다. 이러한 시의 흐름이 신춘문예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흐름의 하나라고 보여진다.
“팔거천 연가”( 윤순희 <경상일보>)는 이 시대의 대단한 사회적 문제가 아닌 소박한 ‘팔거천’ 주변의 풍경에 땅값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팔거천이 잘 정비되어 이곳에 어울려 사는 새들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이 교묘하게 직조 되어 이웃하는 삶의 동질성을 끌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평이한 소재를 평이하지 않은 시로 바꾸어 내는 언어의 힘이 느껴진다.
“모래내시장” ( 하미경 <전북도민일보>)에서는 시 속에 투영된 시장의 정경이 사는 일다워서 정감이 간다. 좌판의 물건을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 사이에 놓인 간격을 좁혀가는 일상의 모습, “거저 가져가라느니 농약을 치지 않은 다급한 말들이 / 등을 타고 내려 고무줄 늘어난 추리닝처럼 / 낭창낭창 소쿠리 속으로 들어간다”는 정겨운 풍경으로 드러나는 피곤을 뉘이며 새날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희망도 접지 않아서 정겹다.
“오늘의 운세”( 권민경 <동아일보>)에서는 전반적인 심상 구조가 탄탄하고 상징적 어구들이 참신하다는 점은 높이 평가될 만 하지만,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는 문장을 문법적 형식으로 본다면 ‘나무‘가 주어임으로 ’ 가지를 뻗고, 나무가 꽃을 피우고, 나무가 수많은 손바닥을 흔든다’는 의미로 정리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문법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에 속한다. 간혹 문법 뛰어넘기라는 시적 기교가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와 같은 것은 문법 뛰어넘기의 한 방법으로 보기는 어렵겠다.
위에서 각 신문에서 발표한 신춘문예 당선 시 작품을 살펴보았다.
문학작품에서의 객관성이란 사실 의미가 없다. 심사위원의 개인적 성향이나 작품에 대한 안목에 따라 어쩌면 비슷한 수준의 작품은 당선이 뒤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에 대한 절대적 평가란 결코 가능하지도 가능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작품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크게 편차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드러난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일반적 고찰은 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며 이러한 경향이 향후 우리 문학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4. 신춘문예와 현대시의 발전적 모습 탐색
이번 신춘문예 작품 당선작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신춘문예 작품의 소재적 빈곤은 우리 시문학의 발전을 위해 문제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의 매년 보아온 현상의 하나이지만, “신춘문예의 상투성”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되풀이되는 유사한 소재 작품의 등장이다.
신춘문예를 지향하는 신인들의 창작 지도로서 제시된 것으로 보이는 소재들이 그 공간에서 위세를 떨친다면 새로운 시의 등장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10여 년간 발표된 시 중에는 그 제한된 소재의 반복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고 추측된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신발”이나 “구두”같은 소재다. 이 소재는 그 이미지도 유사하고 쓰여진 상상력도 그 범주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2000년 중반부터 거의 매년 이 소재가 신춘문예의 단골메뉴로 등장하였을 만큼 낯익은 소재이며 그 내용도 비슷비슷해 보인다. “골목”이라든가, ‘구름’이라든가 ‘책상, 의자’ 같은 소재, 또는 ‘나무‘와 관련된 소재들이 신춘문예작품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제 신춘문예 작품 지도를 맡은 지도자들도 해묵은 소재에 매달리지 말고 신인들을 그 소재에서 자유롭게 풀어주면 어떨까? 우리의 시가 그러한 소재 속에서 앞으로도 몇 년을 더 갇혀 지내야 할 것인가? 보다 넓은 상상력을 가진 시를 창작할 수 있도록 소재들을 다양화시킬 생각은 없는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 시가 몇 년간의 난해성, 애매성, 엽기성과도 같은 환상의 세계에 매달려 있는 듯이 보이다가 겨우 서정성을 회복하여 돌아오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서정성을 매개로 개인적 심상에 갇히고 소재에 갇혀 시적 왜소성에 매몰될 가능성이 보인다는 점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둘째로는 시의 내용 형식이 개별적 감춤의 형식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며
셋째는 시의 행이 길어지는 것과 관련하여 그 여백을 채우려는 시적 표현기교가 성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적 묘사가 그 상징성이나 심상을 드러내는 새로움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묘사의 탁월함은 필요한 것이지만 표현기교에 매몰되어 시적 성취도를 현혹시키는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넷째로 종전과 같은 연 나누기 형식이 줄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과거에는 시적 운율이 매우 중요한 하나의 요소였으나 근래에는 그러한 경향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도가 도처에서 감지된다. 그것은 행의 길이를 길게 하고, 그 호흡을 엇갈리게 하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개성적인 작품을 창조하려는 움직임과도 유관하다고 볼 수 있다.
아직 그러한 형식적 특징이 전반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가 가지는 운율의 파괴나 의도적 벗어남을 지향하는 현대시의 현상은 시가 운율적인 글이라는 상식을 깨고 결국 우리 언어가 가지는 고유의 구조적 운율만 남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염려도 끼어든다.
금년의 신춘문예 당선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이러한 복합적 경향이 신춘문예를 위한 시를 지도하고 있는 지도시인들의 경향이 그렇든 아니든 간에 심사위원들의 심사도 이러한 새로운 시선에 감염되어 미세한 감정의 흐름을 포착하는 능력처럼 보이는 탁월한 묘사나 표현적 기교에 충실한 시에 더욱 눈길이 머물지 않았을까? 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어떻든 시도 생물체처럼 진화한다. 그것은 시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토양과 현실의 여건에 부합하려는 시인 지망생들의 적응 태도가 자생적 뿌리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그러한 시의 생명력이 어떤 형태로든 진화를 거듭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게 될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좋은 시의 귀감이 되는 시적 환경, 그것의 하나의 환경을 만들어가는 매개가 되는 신춘문예 작품의 무게는 그래서 가벼울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흐름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들이 좋은 것인지는 시인 각자가 판단하고 그를 내면에 육화시켜 나가면서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여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도 시인들의 몫이다.
다소 안심이 되는 것은---아직도 일부는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있기는 하지만---각 신문사에서 위촉하는 심사위원들의 면모가 다소 바뀌어가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를 감지하게 되는 일이다. 아직도 그러한 경향이 남아있지만 2~30년 동안 심사위원 독식의 장기집권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중견 시인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심사위원들의 새롭고 발전적인 시선이 우리 한국시의 발전에 새로운 기풍을 만들어가는 데에 기여하게 되기를 바란다.
물론 한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 그 전부를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다.
아마도 그런 현상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그 방향이 수정되고 극복되면서 보다 새롭고 긍정적인 세계로 우리 시가 발전하리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현재 불어닥치는 이러한 흐름에 대하여 염려의 눈길과 폄하의식을 가진 선배 시인들의 고집스럽고도 조용한 시선도 변화의 흐름을 인정하고 긍정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시들이 더 많이 창작되어 새로운 시의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이야기舍廊 > 詩와 글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詩의 용어> 에즈라 파운드 (0) | 2011.06.13 |
---|---|
정신의 깊이로 예술을 단련하기 (0) | 2011.02.27 |
[스크랩] 시 창작의 단계( 시의 씨앗) (0) | 2010.10.25 |
[스크랩] 시 창작에 대한 오세영 시인 강좌 (0) | 2010.09.20 |
[스크랩] 정호승 (0) | 2010.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