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변화 양상과 현대시인들의 시
유창섭 시인.
감동의 시론, 그 형식과 내용의 진화를 중심으로
시는 무엇보다도 감동에서 출발해야 하며 또 그 종착역도 감동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시는 감동을 바탕으로 쓰여져야 하고 그 감동을 바탕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해 주며 교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 시를 쓰게 되는 경우, 자신이 감동하지 않은 어떤 정황에서도
시를 써서는 안 되는 것이며 자신조차 감동받지 못한 정황을 가지고 시를 쓴다면 그 시를 읽는 독자들을 어떻게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활달한 문체만으로? 아니면 어려운 수사만으로? 그도 아니라면 억지 정서의 비틀기 형식으로? 모두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감동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감동이란 “마음에 느끼어 일어나는 급격한 정신적 흥분”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이나 행동, 철학, 또는
사상을 접하였을 때, 인간이 느끼게 되는 정신적 흥분, 또는 마음의 크고 작은 움직임이 감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이 최초로 시를 쓰기 전에 마주하는 일이란 시인 자신이 어떤 이미지(=심상)으로부터 크든 작든 충격을 느꼈을 것이며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 충격을
통해서 시를 창작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독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감동이나 깨달음을 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사상을 보거나 듣고 그 순간 그것으로부터 감동을 받거나 깨달음을 느끼게 된다거나, 또는 개별적인 놀람을 가지어 그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었다거나, 철학적 명제, 그 내용과 형태가 어느 것이든 그것들을 통해서 새롭게 형성된 마음의 움직임---즉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것이 시에
있어서 중심정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시를 쓰는 시인은 자신이 감동받지 않은 이미지를 앞에 놓고 시를 쓰는 일을 삼가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거니와 자신조차 감동하지 못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어떻게 독자를 감동하도록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그 감동을 창조적으로 감당해 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황을 주변에 세워놓고 그 감동의 중심에 이를 수 있도록 구성plot을 하게 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소설이 보다 구체적 정황을 창안하여 기획하고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감동을 의도적인 수준으로 끌고 가려는 섬세한 구성을 하게 된다면, 시는 보다 우발적이고
순간적인 발상에 치중하게 된다는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모든 창작물에는 감동이 전제되지 않은 작품이란 그 의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시는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가?
최근에는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시적 정서를 창안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여하는 경향이 높다. 종전과 같이, 예를 들면 우리의 노래가 창唱의 가락에서
현대적 의미를 담은 트로트 풍의 가락으로 우리의 정서를 표현해 내다가 다시 서구 문명의 영향과 조율을 거친 랩과 재즈 등의 혼합된 형식으로 변모해
왔던 것처럼, 우리 시詩도 정형적 운율이나 형식에서 벗어나 “감추면서 드러내는 형식”으로, 다시 “드러내면서 감추는 형식”으로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새로움에 대한 인식은 언어의 새로움과 더불어 의미 천착의 기교도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하면 종래의 전통적
수사학적 어휘의 인식에서 사물의 실체적 형상이나 동작보다는 그 사물이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와 그 뒷면의 인식체계에 더욱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예가 실험적 정신이 투영된 새로운 시적 실험에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심상을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투영하여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새로움의 탐색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모더니즘 계열의 시, 또는 전후에 나타났던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가 있었고,그 이후에는 상징시라든가, 해체시, 무의미시, 날이미지 시,
비대상 시, 미래파들의 시나, 난해시, 형이상 시와 같은 형식적, 내용적 실험이 시의 세계를 넓혀가는 길을 선도하였다.
그 결과 현대의 우리 한국시는 시인 각자가 어떠한 시의 계열에 속한다는 형식의 분류가 아닌 몸으로 체득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복합된 형태로의 진화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과거의 커다란 내용적 형식적 흐름의 하나였던 “압축”의 흐름에서 그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드러냄”의 형식적 흐름으로의 진화가 가장
뚜렷한 변화의 물결을 이루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압축”이라는 기교가 시의 기본적 태도로 인식되었던 흐름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압축이 기교의 중심이 되었던 시대의 시
서구의 문화적 영향과 사회적 발전에 의해 인간의 심상적 구체성이 그려지던 근대시의 초기에는 우리 시가 전통적 운율과 은밀한 내면의식의 발로를
추구하는 감춤의 시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시적 완성기에 등장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같은 시에서는
운율적 흐름과 감성적 감춤이 시의 심미적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러한 시가 문학의 흐름에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등장에 따라 시는 도시의 정경에 문화적 정황과 다소 낯섦음과 새로움이라는 내용을 담아내려는 의도적 흐름으로 문을 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산발적이고 다양한, 그리고 어느 의미에서는 매우 유사한 시적 변화를 수용하면서 현대시의 형상화 방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소위 “낯 설게하기”라는 새로운 경향이었다.
(이것은 시클로프스키(Shklovsky, V.)가 주장한 것으로 일상화되어 친숙하거나 반복되어 참신하지 않은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고 낯설게 하여 새로운
느낌을 갖도록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
물론 이러한 낯설게하기“라는 경향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그러한 낯설게 하기 수법은 1920년대에 시작되었고, 그것은 문학적, 또는 시적
화두로서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고 본다.
이 시대에도 그 “낯설게하기”---어떤 의미에서는 ‘새롭게 사물을 바라보기’와도 일맥 상통한다---라는 시적 정서적 발현 방법은 하나의 정통성있는
기교적 정의定義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한 시대적 경향을 바탕으로 현대시는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또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변화하고 있는 시대의 시적 정서를 받아들이며 우리가 시를 읽고 감동을 받게 될 때, 그 시의 중심에 들어있는 시적 정서의 진정성과
그 시의 뒷면에 마련되어 있는 상상력의 공간이 넓게 구성된 시에 대하여 그 감동이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시는 독자에게 많은 상상력의 공간과 진정성이 바탕이 된 작품이 감동을 크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현대시가 그 내용이 “감추면서 드러내는 시의 형식”---종래의 압축과 은밀함이 더 큰 미덕이었던 시대---에 그러한 “이미지의 압축”이 살아 있는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박지견 시인의 정신적 세계를 바로 세우는 존재의 형이상학적 확인을 철학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탑塔(III)>의 간결하고 섬광처럼 번뜩이는 안목을 만난다.
조건條件을 붙였더라면
벌써 쓰러졌다.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으면
서지도 못했다.
(박지견 시인 / “탑塔 (Ⅲ)” 전문)
탑이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상징하고 그 의미를 길이 남겨두기 위한 상징적 건축물이 아닌가?
그러므로 여기에서 “탑”의 존재는 강한 압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탑”이란 정신세계의 이상理想이나 신념과도 같은 것을 상징한다.
또는 올곧은 선비 정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눈을 뜨고 / 두리번거렸으면 / 서지도 못했다”는 말은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말할 수 있는 것, 또는 윗사람의 눈치나 보고,
주변의 눈길이 어떤지를 살피면서 살아가는 기회주의자의 모습과는 달리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탑이 존재하는 존재의 강한 의미망 속에 압축된 의미를 이렇게 간결하고 인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교가 바로 “압축”이라는 기교라고 할 만하다.
이처럼 짧은 시의 공간에 많은 상상력이 펼쳐질 수 있는 의미를 압축적---시의 행간에 배열된 싯귀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긴 해설이 가능하도록
그려진 시 형식---으로 그려내는 시적 기교가 가장 멋진 시로 여겨지던 때에는 이런 “압축”이 시를 관통하는 형식의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 역시 이와 비슷한 유형의 압축이 중심이 되고 있는 시를 한 편 더 살펴보도록 한다.
풀잎의 무성한 자유 속에서
자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시간을 잰 뒤
지구를 측량하고 있다.
나비 한 마리가 둘레 없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자벌레가 기어가고 난 뒤
나비는 또 하늘로 날아올라
풀잎과 더불어
지구에 빛깔을 입히고 있다
(강남주 시인 / “자벌레가 시간을 재고 간 뒤” 전문 )
시를 읽어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정치가의 힘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이 많은 자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작은 미물들의 힘도 합쳐져야 가능하다는 이 놀라운 우주적인 깨달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나비 한 마리가 그 무한의 공간과 맞닿아 있는 곳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며 때가 되었으니 색칠을 해야 하겠구나! 하며 지구에 빛깔을 입히는,
얼핏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적인 존재라는 범신론적인 스피노자 철학의 오래된 인식을 그 아래에 접어둔 것처럼 느껴져서 이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사랑이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것 같다.
어떻든 이 시에서도 종전의 정형적인 운율은 보이지 않고 시인 자신만이 쓰는 독특한 운율과 “의미의 압축”이 이 시를 읽는 독자를 사유의 숲으로
이끌고 가는 힘을 가지도록 장치되어 있다.
산수유 열매
오돌오돌 떠는
저 내를
살얼음
자박자박 밟으며
건너가는 소리
차마
귓등 시려
못 돌아 보았습니다
(김준환 시인 / “후회“ 전문)
이 시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하고 떠나보내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후회”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아마도 초겨울쯤이었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왔다가 떠나는 시간, 시인은 그 사람을 가지 말라고 붙잡지 못하고 등 떠밀어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그 사람을 붙잡지 못한 마음이 “후회”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산수유 열매는 이 시기에 빨간 열매로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그 ‘빨간‘ 열매는 ’사랑‘의 상징성이 높은 색채(=빨갛다)를 감추고
열병에 걸린 듯 오돌오돌 떨고 있음을 상징한다. ’살얼음‘도 그 아슬아슬한 서로간의 위태로운 사랑은 아니었을까? 그 사랑이 발(=현실)에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가슴에 얹혀 있는 정경이 눈에 그려진다. 그리고는 “차마” 붙잡지 못한 마음이 “귓등 시려 / 못 돌아 보았습니다”라고 후회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농익은 사랑의 마음이 철저하게 감추어지고 압축되어 있는 정경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제시한 시가 그
전형적 수법의 대표적 경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형태로 그 압축의 심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시들도 많이 있고 그 내용을
전부 옮겨 설명하는 것은 주제가 아니므로 서두에서 언급한 “압축”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보는 선에서 예시하고 나머지의 세부적인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현대시가 그 내용이 “감추면서 드러내는 시의 형식”---종래의 압축과 은밀함이 더 큰 미덕이었던 시대---에서 “드러내면서 감추는 시의 형식”---
현대의 다양한 시선과 정서적 감동에 관여하는 시적 요소들을 드러내면서 그 뒷면에 은밀함, 또는 시적 정서의 중심을 감추는 시대---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은 시대적 흐름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드러냄이 시적 기교의 중심이 되는 시대로의 진화
시를 쓰는 데에는 그 정서와 정황에 맞는 언어의 선택이 필요하게 된다. 물론 시를 쓸 때마다 그러한 의미를 담은 언어를 쓰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시를 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를 쓰는 기초가 있는 경우에는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매우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감동이나 정서에 바탕을 두고 말하듯이 쓰여지게 되는 것이겠지만, 마지막 퇴고를 하게 될 때에는 아주 위대한 시인들조차도
그 어휘나 표현의 선택에 고뇌한 흔적들을 많이 발견 할 수 있다. 따라서 적절한 시적 언어의 선택과 활용이란 시를 시詩답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1 예각적銳角的 시선視線을 통한 관점 전환과 이미지 전개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최근의 글쓰기에서는 시 창작에서의 “낯설게 하기”, 또는 “새롭게 하기”라는 형태의 표현과 새로운 이미지 발현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래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지만 그 경향이 시의 본령인 것처럼
인식될 만큼 비중을 두는 글쓰기의 경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러한 경향을 부추겨 온 “신춘문예”제도의 영향이 컸으리라고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나 시적 경향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적 욕구가 그러한 감각적이고 표피적인 표현기교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유포되고 그러한 경향이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표현 형식을 뛰어 넘는 “새로운 표현 형식으로의 이동”이라는 자연스러운 모습의 하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대가 매우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그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가치있는 정보로서 살아남는 새로운 감각의 “시적 정서”라는 새로운 “포장”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詩가 언제까지나 김소월의 시적 성취나 정지용의, 서정주의 시적 성취, 또는 김춘수의 시적 성취의 형태에 매몰되어 그 아류의 형식으로 시를 쓰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자각에서 추구하기 시작한 자연스러운 시적표현의 변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즐겨 쓰는 시적 정서라는 것이 어쩌면 수
천년 동안 써 온 시적 이미지의 복사본처럼 유사한 이미지로 가득 채워지고 있고, 그 시적정서가 시의 제재題材가 되고 있는 마당에 앞서 간 시인들의 시쓰기를
뛰어넘는 새로운 감성의 시를 쓰기 위하여는, 다시 말하면 그 유사한 이미지의 재생산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하여는 새로운 표현 형식의 글쓰기가
필요하였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 기교나 정서의 감각적 성향을 퇴영적인 경향으로 폄하하기 보다는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과거의 뛰어난 시적 성취의 한 방법이었던 압축이나 함축미를 이 새로운 표현형식에 접목시켜 새로운 변화에로의 발전을 도모하는 일은 우리 詩의 영역을
넓히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여 보는 것이다.
2.2 사물의 뒷면, 그 뒤집어 보기와 드러냄의 시각視覺
그렇다면, 새로운 시쓰기의 새로운 형식이란 어떤 것일까?
“새롭다”는 말은 같은 이미지를 “다른 형식에 담아내거나, 다른 표현방법으로 표현해 내거나, 다른 형태로 글을 쓰는 것”이 그 변화의 모습이 될 수 있겠다.
그러한 방법에는 하나의 예로 우리의 시적 정서를 표현해 내는 방법으로서 같은 사물을 보는 시선을 달리하여 그 변화된 모습을 담아내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받아온 교육이나 윤리적, 도덕적 가치,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가치의 영향으로 고정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詩라는 형식에 담아내는 정서도 그러한 가치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에 대한 익숙한
표현은 詩라는 형식 속에서는 매우 상투적이거나 신파적 요소로 해석되어 그 진실한 정서가 함몰되어 버릴 위험이 많다.
가끔 새로이 발표된 詩를 읽는 경우에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어디선지 읽은 듯한 글을 만나게 되는 일은 시의 형식 면에서나 정서적 내용 면에서 그 시가
진정성을 상실하고 있거나 상투성에 오염되어 있는 듯한 경우가 대부분일 때가 많다. 바로 그러한 정서적 유사성이나 상투성을 탈피하고 신선하고 새로운
시적 정서가 발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시쓰기. 흔히 형식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의 “낯설게 하기”나 “새롭게 하기”와 같은 표현기법".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필요가 시를 새롭게 느껴지게 하기 위한 표현기법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질 만큼 우리시대의 오늘날 현대시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 쓰기”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 것일까?
“새로운 시 쓰기”는 새로운 시적 정서를 발현시키기 위한 “정서적 발상 전환”을 필요로 하고 있다.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시적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은 “낯설게 하기” 또는 “새롭게 하기”가 필요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인의 눈길(=시선視線)이
일반적 둔각적鈍角的 사고, 즉 남들이 모두 그렇게 느끼게 되는 당연한 눈길에서 벗어나 예각적銳角的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사물의 모습을 늘 보던 각도에서 볼 것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는 좁은 각도에서 “뒤집어 보기”를 통해 그 의미를 재생산하고 재창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시선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그 시선에 다양한 정서를 부가附加함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압축의 형식” 보다는
다양한 시선이 드러나게 하는 “드러냄의 형식“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변화는, 즉 이러한 시적 진화進化는 과거의 “감추면서 드러내는 형식”으로부터 일탈하여 주체가 바뀌면서 “드러내면서 감추는
형식”으로 바뀌어 감을 의미한다. 어떤 즉물적 이미지를 모든 사람이 함께 느끼는 당연한 눈길로 그 정서를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제 아주 낡은 표현방법이
될 수 있으며, 보다 예각의 시선으로 이미지(심상)를 끌어내어 표현해야만 새롭게 다가오는 정서적 발현을 기대할 수 있게 되리란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 그늘진 반대편의 모습에 심취하여 사물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상대적 모습을 통해서
그 본질적인 모습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감동을 배가 시킬 수 있는 언어로 재 해석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요즘의 대부분의 젊은 시인들이 신선하고 멋진 표현에 심취하여 지나치게 감각적인 표현에 몰입하여 그것이 시의 본령인 듯 착각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그 진정성이나 절실함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발현이 가능하게 되는 적절한 형식과 표현기교를 통한 새로운 틀로 자리 잡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시에서도 잔재주나 표피적인 찰나적 표현들은 그 수명이 길지 않을 것이며 전체를 장악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그래서도 아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시 쓰기에 있어서는 과거의 틀을 완벽하게 혁파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장점들을 수용하면서 “뒤집어 보기”를 통해 새로운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새로운 인식의 드러냄”으로 시를 쓰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예각의 시선”이란 어떤 것일까?
앞에서 말한 “예각의 시선”이란 통상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그 자체의 기능이나 존재형식으로, 때로는 매우 교육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형식으로 그 실체적 감성을 인식해내는 방법을 의미하며 그것을 다면적으로 관찰한 결과를 시적 정서에 투영하여 “드러냄”을 우선하고 “감춤”을
종속적으로 취하게 만드는 형식에 치중하게 한다.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있는 의자란 의자는
모두 네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가지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를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네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니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한번 붙잡은 먹이는 좀처럼 놓아주려 하지 않는
근성을 먹이들은 잘 모른다
이빨 자국이 아무리 선명해도 살이 짓이겨져도 알 수 없다
이 짐승은 혼자 있다고 해서 절대로 외로워 하는 법도 없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들지 않는다 오직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는 편안히 마비된다 서서히 안락사 한다
제발 앉아 달라고 제발 혼자 있게 해 달라고 호소하지도 않는
의자는
누구보다 안락한 죽음만을 사랑하는 네발 달린 짐승이다
(시 “의자”전문 / 김성용 /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2000)
김성용의 “의자”에서는 의자 자체를 짐승으로 의제擬制하여 표현하고 있다. 당연히 앉음과 편리성이 전제로 되어 있는 의자가 아니라 그 편리함과 안락함을
무기로 인간의 몸을 “먹이”로 인식하는 뒤집어 보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심각한 어려움은 없다. 쉽게 읽히면서 편리함을 추구하려는 인간 본성과 그 의자를 소유함으로써 잠깐의 졸음이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여유와 그러한 의자를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나타내는--작은 철학적 메시지를 슬쩍 감추어 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가 대단히 뛰어난
명작名作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 사색의 결이 매우 멋지고 충실한 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여기에서 보듯 각각의 관찰된 사물의 정서에
감성적 소구점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압축”보다는 “드러냄”이 강하고 그 의미 행간에 각각의 세분된 정서가 매달려
전체의 정서적 내용과의 합일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2.3 사물의 뒷면, 감춤과 드러냄의 조화調和
현대시에서는 시인의 의도와 독자의 상상력이 결합되는 공간을 준비하기 위하여 많은 사물을 등장시키거나 그 이미지를 활용하여 그 의미를 감추어 놓는다.
그 경우 어느 정도까지 감추고 어느 정도까지 드러낼 것인가는 전적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의 몫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시인들이 시 속에
등장시킨 이미지나 사물들이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여 그 의미 공간을 넓혀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물의 뒷면에 감추어진 의미가 어떻게 전달되도록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시인들의 표현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민달팽이 간다
과속이다
푸나무 자라는 소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돌아보면,
늘 그대로인 듯
세상은 훌쩍 자라고
나는 껍질도 없는
빈 허리 꿈틀거리며 벅찬 속도를 낸다
生을 쫓는 사냥꾼
시간은 왜 이 막다른 골목으로
나를 몰아넣는지
이 길의 끝은 무엇인지
내 어깨에 팔을 둘러봐
창공에 표류하는 이야기를 들어봐 봐
살아가는 사막에 어린왕자는 없어
그냥 조금, 아주 조금
외로움이 있을 뿐
그래서
삶은 사보텐처럼 변이를 일으키며
메마른 공중에 그래도 힘주어
일어서지 않는가
(시 “민달팽이” - 향연饗宴 1 -전문 / 손동욱 시인;제1회 시인촌 문학상 수상작)
손동욱 시인의 “민달팽이”에 무게를 둔 것은 젊었던 시절의 이상理想과는 동떨어진 현재의 삶을 반추하는 과정이 묵직한 감동을 이끌고 미래를 내다보는
시선에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1등만 기억되는 시대, 인간성은 매몰되고 실용과 돈이 가치 척도가 되는 시대에, 이 시는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성찰할 기회를 부여한다.
현재의 삶도 그에겐 힘겨운 삶이어서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는 ‘민달팽이’로 자신을 환치시키고, 그는 “민달팽이 간다 / 과속이다”라고 화두를 던진다.
지금의 삶도 그에겐 과속인 것이다. 언제나 멀리 달아나는 현실을 잡으려고 쉴 새 없이 뛰어야 하는 자신은 영원한 “술래”임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돌아보면, / 늘 그대로인 듯 / 세상은 훌쩍 자라고”로 토로하여 젊은 시절의 이상理想과는 달리 자신보다 더 빨리 달려나가는 세상에 뒤쳐지고 있다는
인식 뒤에 그런 세상살이도 자신에겐 ‘과속’이라는 언술을 뒷받침한다. 그러면서도 “삶은 사보텐처럼 변이를 일으키며 / 메마른 공중에 그래도 힘주어 /
일어서지 않는가”라고 말하면서 적응하며 사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의 시대적 흐름으로 보면 비교적 짧은 행을 가진 시이지만, 그 속에 품은 의미는 어느 소설 한권의 분량에 못지않은 두툼한 이야기를 감추어 놓고 있다.
-----“ (”시인촌 문학상“ 심사평 일부 인용)
이러한 현대시의 새로운 시도에는 현란한 언어의 기교만 넘치고 그 언어들이 창조하는 새로움이나 의미가 박제된 무대로 전락하기 쉬운 약점도 동시에
존재한다. 그것은 언어 기교에 치우친 낯설게 된 언어에 현혹되어 사색적 감성이 난해성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처럼 착각되는 경우에 자주 발생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3. 시적 감동의 진화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제는 이 시대의 시적 흐름이 과거의 “압축“---감추면서 드러내는 형식---이라는 거대한 흐름에서 ”드러냄”---
드러내면서 감추는 형식---을 통하여 정서적 집중력을 높이고 세밀한 심상을 묘사하여 상상력과 결합시킴으로써 감동을 이끌어 가는 형식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3.1 비움에서 채움으로 변모하는 시 쓰기 과정의 실제
(“압축”으로 부터 “드러냄”의 형식으로의 변화)
세 편의 시를 중심으로 본 최근의 글쓰기
시를 쓰는 데에 있어서 최근의 경향은 인터넷의 영향, 그리고 영미 시의 경향, 즉 외국의 문법적 이해 부족으로 번역상의 직역이나 우리말로 옮기는
데에 필요한 우리 말의 감각적 표현의 한계 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번역물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시인들의 인식부족으로 우리말의 숨김---
생략 또는 암시적 어법?-을 담아내지 못하는 외래어적 어투를 우리 것으로 환치시키는 형식의 새로운 추구가 문학계 전반에 주어온 영향으로 많은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제 그러한 경향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것이 때로는 난해시적 경향으로, 또는 산문화적 경향으로, 나열적 상징성을 잡다하게 열거하여 “감춤의 미학”을 구세대적인(old-fashioned) 것으로
주저 없이 격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 않았나 하는 자성을 하게 한다.
이것은 과거의 경향이 “비움의 미학”에 중심이 주어졌다면, 현재에는 “채움의 미학”으로, 또는”감춤의 미학”에서 “드러냄의 미학”으로 변모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경향을 “압축의 시”라고 한다면, 현재에는 “풀어냄의 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경향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의 모습 속에서 시를 쓰는 각자의 태도를 어떻게 스스로 조율하며 새로움을 건져내는
형식으로 발전시킬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 위하여 다음에 하나의 예를 들어 시적 성취의 변화를 살펴보려고 한다.
<종점終點>
사락 사락 흩뿌리던 눈발,
해 종일
맴돌던 숱한 발자국이 제 발자국 접어넣고
언덕으로 끌고 올라간 길
텅, 비었다
막차가 떠났다
우선 “종점”에서는 그 시쓰기의 형식이 ‘감춤의 미학’에 충실한, 상당한 “압축이 존재”하는 보편적 형식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실체가 가려진 채, 그 기다림의 절실함이 압축되어 시를 읽는 독자가 그 기다리는 사람의 연령이나 정황을 상상력으로
보완하여 다양한 형태로 읽힐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맴돌던 숱한 발자국이 제 발자국 접어넣고 / 언덕으로 끌고 올라간 길”로 상징되는 그 길은 하루 종일 좀점에 나와 서성거리는 기다림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뒤에 이어 “텅, 비었다”는 언사가 종점이 텅, 비었다는 의미와 공허함으로 가슴이 텅, 비었다는 의미를 복합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으며,
“막차가 떠났다”는 언술은 기다림이 실망으로 종결되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시는 그 뒤에 감추어둔 내용을 독자가
여러가지 각도에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구체적 사실의 표현을 절제하며 감추어 놓고 있는---“감추면서 드러내는 형식에 충실한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뒷편의 상상력 공간이 최대한 넓혀져 있는 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림>
시간 내어 오겠다는 아들 소식에
침 마르던 한 주週가 지나고
온 종일 소복 소복 싸락눈 쌓이던 버스 종점終點,
한자리 맴돌던 발자국들,
눈처럼 수북이 쌓인 담배 꽁초들,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다음에 갈께요.
-그래, 바쁜데 이 먼 곳에 뭘…다들 잘 있다니 됐다.
퉁, 놓이는 전화기 뒷편에
공명처럼 회오리 바람이 일어났다
“기다림”이라는 시에서는 두 부부가 서로 번갈아 가며 아들을 기다리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여기에서는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 슬쩍 나타나도록 구성되어
그 실체적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한 자리를 맴돌던 발자국들’은 노모의 발자국이고, 쌓이는 ‘담배 꽁초’는 아버지의 발자국이라는 추리가 가능하게 되어 있고, 그 간절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긴 시간적 공간적 분위기가 지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서술을 배제하고도 그러한 추리가 가능하도록 “감춤”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잡다한 변명이나
이유가 생략된 짧은 전화 대화를 던져 놓음으로서 하루종일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과 바빠서 오지 못하게 되었노라는 아들의 철없는 가벼운 마음을 대비시키면서,
‘회오리 바람’으로 상징되는 커다란 실망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기다림”이라는 시는 상상력의 공간을 적당히 좁혀 구체적 상상이 가능하도록 그 이미지를 좁혀 놓은, 어쩌면 세 번째의 공간적 채움의 글에 비하여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글의 중간 정도의 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소멸消滅>
눈 내리는 날,
버스 소리가 날 때마다 밖을 내다보다 몇 번이고 종점으로 나가
기다리다 지쳐 까맣게 타들어간 가슴,
구멍가게 앞 찐빵 솥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가게 뒷편 감나무엔 텃새들 몇 번인가 앉았다 떠나고,
게으른 누렁이가 눈발을 맞으며 지나갔다
대낮부터 막걸리에 취한 사내의 비틀거리던 발자국도 지워지고,
부산하던 노인정 댓돌에 모였던 신발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안방의 까르르 웃음소리도 어둠 내리는 뒷길을 휘돌아 나가고,
종일 휘젓고 다니던 바람도 돌아와 설핏 잠든,
종점 마당이 휑~하니 비었다
하루 다섯 번 들어오는 버스 종점,
몇 번인가 전봇대를 돌아나간 외로운 발자국만 발을 끌며
언덕 밑 슬레이트 집으로 기어 들어갔다
“소멸”에서는 버스 소리가 날 때마다 밖을 내다보다 종점에 나와 하릴없이 기다리는 노인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그려내고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적 배열을 던져 놓은, “드러냄”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타는 가슴과 찐빵 솥에서 나는 김이 그러한 속타는
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의 연에서는 텃새, 누렁이, 술 취한 사내, 모여있던 신발들, 뒷길로 돌아나가는 웃음소리, 잠든 바람 등의 사실적 내용이
그 공간을 지나가는 모습을 묘사하여 지루하게 지나가는 시간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으며, 결국 오겠다던 사람이 오지 않아 집으로 되돌아가면서 소멸되는
희망을 그려내어 처연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세 번째의 “소멸”이라는 제목의 시는 이 세 편의 글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정보와
공간적 구체성이 그려져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세 번째의 글이 현재 유행하고 있는 우리시의 나열적이고 산문적인 요소를 가진 가장
전형적인 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비교적 그 범주에 가깝게 그려진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세 편의 글은 그러한 모습을 담아내기에 충분한 자료가 될지 모르겠으나 그 시를 쓴 정황과 배경은 동일한 설정으로 보아도 무방한 시를 세 가지 형태로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형식이나 내용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리고 어느 것이 좋은 선택을 한 형식의 시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선택은 시를 쓰는 각 시인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종점”은 지난 시대에 즐겨 쓰던 압축과 은밀한 감춤이 그 상상력을 자극하여 시를 읽는 이의 다양한 정서적 확산을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선배 시인들의 시에서는 자주 발견되는 압축 중심의 표현이 드러나는 시라고 볼 수 있으며, 아주 낡은 시의 형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두 번째의 “기다림”이라는 시에서는 종전의 압축보다는 현상적 배경이 그 뒤를 암시하여 내용의 심상을 유추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감춤이 장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형식이 최근의 나열적 드러냄의 형식으로 가는 중간단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어느 것이 가장 적절한 시 형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 번째의 시 형식, “소멸”에서는 시적 정서를 자극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하여 정서적 밀도를 앞당겨 노출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터넷이 하나의 가벼움과 신속한 감성적 반응의 미학을 선호하는 시대에서는 아마도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가 이해력을 돕고 쉽게 읽힐 수 있도록 하는
필요를 충족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정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시인 자신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정서적 깊이와 그 내용을
전달하려는 의지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몫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시들에서 느끼는 각각의 감동이나 상상이 우리의 정서적 충동을 어떻게 흔들게 될 것인가, 그리고 이 시대의 글쓰기 유행이나 형식을 어느 정도
육화肉化시켜 그 내면에서 우러나는 감흥을 유지시키는 형태로 가야 할 것인가를 이제 우리 시인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그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시적 감성적 단련을 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3.2 연 나누기 형식의 변화와 의미공간
과거에는 짧은 시적 공간에서도 의미의 분화를 조화시키는 연나누기의 형식이 자주 사용되었지만 이 시대에는 연을 나누는 형식조차도 과감히 생략한다.
그 호흡이 빠르고 긴장감이 적게 구성되는 형식으로 속도와 다양성을 결합시킨다. 이것은 과거의 형식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의 흐름으로
작용하면서 현대시의 거대한 흐름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징후의 하나이다. 이러한 흐름의 원류에는 현시대의 “신속한” 정보 전달방식이나
인터넷 세계의 확산 방식에 힘입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 시대의 독자는 그 시대의 중심세대의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 또는 문화적 코드의 영향을 받는다.
그들이 선호하고 그들이 환호하는 형식이 그 시대의 코드가 된다는 의미이다.
어린물떼새 발자국 안테나처럼 찍힌
해변가 모퉁이 외딴 집 한 채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
「자는 방 잇섬」 걸어놓고 주인은
종일 갯바위 너머 일 갔는지
마당엔 젖은 파도소리만 무성하다
집이 그리운 집게처럼 나는
풍랑주의보 내린 어로漁撈를 정박시키고
소금기 반짝이는 그 집 빈방에 들어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다
바람소리 켜켜이 비닐장판처럼 깔린
방바닥에 지긋이 손을 넣으면
오래 흘러온 것들이 제 상처를 들여다보는 시간
공중을 내려놓은 갈매기들이
깃 속에 낮의 시린 부리를 묻는다
등 굽은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세상에 없는 주소 꾹꾹 눌러 적으면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방파제 끝에서 인부 몇 돌아오고 나는
옆으로 누워 밤을 견디는 긴발가락집게처럼
온 몸이 녹아드는 아랫목에 누워
홑이불 같은 수평선 한 자락 당겨 덮는다
(시 “소라여인숙”전문 /김영식?포항/2007강원일보 신춘문예) )
이 시에서는 시의 호흡이 매우 빠르게 전개된다. 긴 호흡을 가진 긴장감은 배제되고 새로운 이미지들이 시의 전편을 넘쳐난다.
“.........새로운 표현에 대한 열정이 있고 사물들과 자신의 심리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돋보인다.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와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같은 묘사도 빼어나지만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같은 표현은 탁월하면서도 참신한 맛과 멋이 있다. .......소라 여인숙'은 표현에 공을 들이고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언어의 선택과 배치에 무척 신경을 쓴 작품이다.....“
/ 심사평 ; 김영기. 최승호 시인 <강원일보에서 일부 인용>
그러므로 독자들과 함께 존재해야 하는 시의 세계에서도 그 시대성이 접목된 새로운 양식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이러한 변화에 대한
해답과 현명한 방식을 창조해 낼 수가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무조건 인기에 영합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을 꿰뚫어 보고 시인들 자신에 맞는 어법과 창조적 시선이 조화를 이룬 시의 세계를 창조해 내는 일이야 말로
이 시대의 시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일 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진화의 흐름이 좋으냐 나쁘냐, 또는 옳으냐 그르냐 하는 평가는 아직 조급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흐름을 보면서 과거의 압축에 길들여진 기성 시인들의 반응은 착잡해 보인다. 그렇다고 이러한 흐름을 마냥 방관하면서 자신의 과거의 창작 태도를
고수하며 머물러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러한 흐름의 긍정적 측면과 과거의 시 형식에서의 장점을 조화시키고 접목시키면서 당대當代의 진화하는 시
형식에로의 접근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3.3 詩 속에 나타나는 문장 부호의 기능
모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는 감동의 소산이다. 그 감동을 교류하고 확산시켜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이루어내는 일은 이 시적 정서를 어떤 형식으로
접목시켜 그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는가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시를 쓰는 시인들이 너무 소홀하게 취급하는 의미 공간이 있다. 그것이 바로 문장 부호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시읽기나, 시 쓰기에 있어서 시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문장의 부호, 예를 들면 쉼표[,] 마침표[.] 등의 기능적 역할에 대해 크게 주의를 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의 영향으로 일반적인 글이나 문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장의
부호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져 있다. “쉼표”는 글이 길어지거나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마침표”는 글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단순한 부호로서 인식하고 있고, 또 “말없음표”는 소설이나 다른 문장에서 침묵의 표현 또는 생략의 의미로 쓰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어떤 법률적인 문제에 부딪히기 전에는 그러한 문장의 부호에 대한 의미 파악에 등한히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시읽기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시쓰기에 있어서도 시인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사실 시쓰기에 있어서 문장부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글을 쓰지 않는다면 시읽기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어의 연금술사이며, 기호학적 의미의 언어를 파괴하여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詩人들”이 그러한 문제를 소홀히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시가 감추면서 드러내는 형식의 글”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앞에서 말한 문장부호에
대하여 시인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의미의 전환이나, 가타의 다른 목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마침표”와 “쉼표”에 대해서만 알아보기로 한다.
다른 문장 부호는 특별히 일반적인 문장에서 사용하여 그 문장부호의 기능이 주는 의미와 다를 바 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가장 쉽게 습관적으로 만나는 “마침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시의 행이 끝날 때마다 마침표를 찍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습관적으로 마침표를 찍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언어의 조탁미를 생각하고 글을 쓴 많은 시인들 중에도 행의 끝에 마침표를 찍은 시와 찍지 않은
시가 있다. 신석정, 이육사, 노천명, 김기림, 정지용, 서정주 시인 등의 경우에도 마침표가 있는 시와 없는 시가 구분되어 있다.
그것은 웬일일까? 실수일까? 아니다. 그렇게 쓴 충분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정지용 시인은 주로 산문시에서 시의 중간에 끝나는 행에서도 마침표를 생략하고 있다.
그 시의 맨 마지막 행이 끝나는 곳에서만 마침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도적인 시적 장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고 그 아름다운 말을 시로 써왔다고 평가받는 정지용 시인은 그러한 마침표를 쓰는 데에도 철저히 의도적이었다는 느낌을 준다.
시의 행마다 철저하게 마침표를 찍는 김기림 시인도 詩集<기상도>에는 마침표가 없는 시로 채워져 있다. 詩集<바다와 나비>에 실려있는 시 중에 마침표가
없는 김기림 시인의 시를 한 편 읽어 보도록 한다.
四月은 겨으른 표범처럼
인제사 잠이 깼다
눈이 부시다
가려웁다
소름친다
등을 살린다
주축거린다
성큼 겨울을 뛰어 넘는다
(시 “봄” 전문 / 김기림 시인)
겨울 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봄을 게으른 표범으로 내세워 그 아름다운 봄이 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시이다. 움츠렸던 봄이 잠을 깨어 온 천지에
봄이 가득 밀려오는 모습을 표범의 몸동작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데, 그 동작이 하나하나 따로 일어난다기보다는 연속적으로 또는 한두 가지가 겹쳐져서 일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마침표를 생략하여 그 동작들을 오버.랩(over-lap)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동작 하나마다 마침표를 찍었다면 그 동작은 하나씩 분절되어 하나씩 하나씩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표가 있었다면
그 동작만으로 의미는 축소되어 호흡이 빠르게 시의 행이 읽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표를 없앰으로 해서 시의 행간의 호흡은 길어지고, 그 의미가 앞과 뒤로
연결되는 형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시의 행간에 걸려있는 봄날의 정서를 느끼게 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의 정서적 의도를 표현하는 데에는
문장의 부호 하나도 허술하게 다루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쉼표의 기능적 의미 확장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쉼표의 경우에도 현대시의 초기 시인들은 쉼표를 상당히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쉼표가 그 행의 중간에 의미의 중단을 의미함과
동시에, 글을 읽는 데에 호흡을 고르는 역할을 중시하던 국어의 맞춤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자에는 단어의 어미변화가 쉼표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으므로 우리말에서는 쉼표의 사용을 하지 않아도 의미전달 체계에 문제가 없다는 국어학자들의 주장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詩에 있어서 쉼표의 역할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의 행가름이 있기 때문에 쉼표가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쉼표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시적정서의 전달은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이번에는 정지용 시인의 쉼표가 주는 의미가 현저히 다른 시 한 편을 읽어 본다.
고요히 그싯는 손씨로
방안 하나 차는 불빛!
별안간 꽃다발에 안긴듯이
올뺌이처럼 일어나 큰눈을 뜨다.
그대의 붉은 손이
바위틈에 물을 따오다,
신양山羊의 젓을 옮기다,
간소簡素한 채소菜蔬를 기르다,
오묘한 가지에
장미薔薇가 피듯이
그대 손에 초밤불이 낳도다.
(시 “촉불과 손” 전문 / 정지용 시인)
위의 시는 연인이 성냥불을 켜서 촛불을 켜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하나의 눈뜸처럼 그려내고 있는 정감이 따뜻하기 그지없는 시이다. 물론 여기에서 등장하는
그대가 연인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시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 준 다른 제삼자로서 힘을 가진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좀 더 다른 문제이므로 그것을
빼고 단순한 연인으로 해석하여 볼 경우로 한정하고 시읽기를 하여 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제3연을 살펴보면 “그대의 붉은 손이” 물을 따오다, 젓을 옮기다, 채소를 기르다, 로 연결되어 세 가지의 일에 손이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연속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손에 촛불이 장미처럼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때 각각의 쉼표는 의미를 한정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호흡을 빠르게 진전시켜 불이 켜지는 순간의 모습이 영사기에 필름이 돌아가며 움직이는
모습을 만들어 내듯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쉼표가 없다면 어떻게 읽히게 될까?
앞의 마침표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미가 두 가지 또는 세 가지가 함께 어울려서 의미를 다르게 만들어 갈 것이다.
그리고 시적 긴장감을 불러 일으켜 그 시의 의미를 음미하며 읽도록 시간을 길게 잡아 주게 될 것이다. 위의 세 가지 동작뿐만 아니라 아래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미가 꽃피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으로 엮어 효과를 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어느 쪽이 더 나은 표현이 될까? 그것은 시인의 몫이다. 아마도 그 세 가지의 일을 영화처럼 보이도록 장치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위의
본문처럼 쓰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좀 더 다른 깨달음의 시나, 관조의 시에서는 그러한 경우 쉼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의미의 확장이 가능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마침표”와 “쉼표”에 대하여 살펴보았지만, 이 외에도 행가름에서도 의미 변화가 시적 변화를 주고 있으므로 뒤이어서 이를 보완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언어를 새로운 이미지로 변용하여 시를 쓰게 된다. 적어도 시인은 그 시에 사용되는 문장 부호 하나에도 애정을 가지고 시쓰기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시인의 “시의 세계”가 넓어지고 보다 많은 정서를 그 속에 담아내게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3.4 시적 정서의 드러냄과 개별적 정서의 감춤을 위한 표현기교
시인들이 쓰는 시가 “시를 읽는 모든 독자층”을 겨냥해서 시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독자와의 교감을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고,
정보의 흐름이 “즉시적(=신속한)”인 인터넷 시대에는 그에 따른 적합한 형식의 대두가 필요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추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이나 필요에 의해서 현대의 시는 더욱 진화되고 그 방향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다음에는 그러한 성향을 잘 담아낸 시 한 편을 읽어 보도록 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껏 나는 칠순 노모의 김치를 먹고 있다
음식비법을 전수하기 싫은 이름 난 식당주인처럼
도대체 내가 개입할 틈을 주지 않고 해치워버린다
김장해놨으니 가져가거라
돌멩이 맞을 소리지만
왜 그랬냐고 날 부르지 그랬냐고 하면서도
한 시간 후에는 소요산쯤을 지나고 있다
차로 한 시간 반 거리
철대문을 요란스럽게 열고 들어가
고구마, 마늘, 김치, 만두, 가래떡을 한 아름 들고 나온다
도둑질을 당당하게 하고 나온다
아마 나는 엄마의 인생에서
알토란같은 시간을 도둑질했을 것이다
단번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서너 번의 분절로
허리 펴 선 자리, 발끝마저 점점 흐릿해지는
엄마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껏 바윗덩이를 지고 무심한 산을 올랐듯
오르는 것 밖에는 알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갈퀴 같은 손 펴볼 틈 없이
여전히 있음을 만들고 있다
발아된 생명 키우고 있다
(시 “어떤 도둑질“전문/ 윤정옥 시인)
시인은 지금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김치를 가지러 친정엘 가는 중이다. 그러면서 그 사이에 일어나는 시인 자신의 내면의 변화---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생활에 대한 적당한 합리화를 해 가면서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능청스럽게 늘어놓고 있다. 어머니가 딸을 위해 김장을 담그는 고생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잘 알면서도 “음식비법을 전수하기 싫은 이름난 식당주인처럼”이라는 말로 그 정황을 그려 낸다. 사실은 전화를 했다 해도 여러 가지 이유로 갈 수 없는
형편이 되었을 것이지만 말로는 “왜 그랬냐고 날 부르지 그랬냐고 하면서도” 반가운 마음에 벌써 시인은 김치를 가지러 친정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철대문을 요란스럽게 열고 들어가 / 고구마, 마늘, 김치, 만두, 가래떡을 한 아름 들고 나온다 / 도둑질을 당당하게 하고 나온다 / 아마 나는 엄마의 인생에서 /
알토란같은 시간을 도둑질했을 것이다 ”라는 언술은 참으로 진솔하지 아니한가. 어머니의 ‘알토란같은 시간을 도둑질’해가지고 나오는 자신의 모습과 그 뒷면에
숨겨진 고마움, 미안함, 자신의 경박한 욕심 등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시는 그 이야기를 드러내면서 감정의 일부를 감추는 형태로, 다시 말하면
“드러내면서 감추는 형식”으로 진화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느 것이 가장 좋은 시 형식이며, 가장 바람직한 시적 내용인가를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이 그러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그에 합당한 형식이나 내용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또는 과거 자신이 선택했던 시
형식이나 내용을 어떻게 접목시켜 새롭게 창조해 내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시인들은 고뇌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거부터 자주 언급되어
온 “낯설게 하기”, 또는 “새롭게 하기”는 독자를 “시의 감동” 속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최근의 시의 비평에서도 “새롭고 신선한 언어 감각”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는, 그러한 요인에 의해서 시적 감동이 더욱 확산된다는 견해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고도로 의도적인 언술에 의한 실험적 시나, 철학적 낯설음을 창조하는 시에서는 그러한 표현의 경향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 표현의 새로움이 주는 “시적 신선함“이 독자에게 후광효과(hallo effect)로 작용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표현의
어법을 발현해 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언어의 결합력을 가져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시 속에 들여오는 사물이나 상징이 시인이 쓰고자 하는, 또는 그려내고자 하는 심상이나 감각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시인이 쓰고자 하는 시의
중심 정서와 언제나 일체감을 가지도록 배려하면서 말이다.
둘째는 시적 상징이나 사물이 가지는 기본적 속성에 매달려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법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형태의 표현이라는
적합성보다는 가끔 “문법 뛰어 넘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시를 쓰는 시인 자신의 심상구조와 전혀 동떨어진 표현이 되지 않도록 언어를 다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표현법이나 활용의 방법을
규정하거나 기교를 가르치는 일이 좋은 “시詩 작법作法”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기교가 시적 정서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이미지의
발현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기교를 살펴 불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시작하는 언어를 “햇살” 또는 “햇빛”이라고 전제하여 그 표현의 내용을 담아 보도록 한다. 여기에서도 시의 시작, 즉 화두가 바로 그러한 표현의 행이
먼저 나타나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햇살이(은), 또는 햇빛이(은).......우리의 감성에 항상 “비친다”는 형태로 각인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잘 살펴 보면,
(1) 한낮, 부서져 내렸다. (2) 첩첩 쌓였다. (3) 또르륵 굴러내렸다. (4) 뒤척였다. (5) 솟구쳤다. (6) 슬몃 흔들렸다. (7) 굴러 떨어졌다. (8) 흩어졌다.
(9) 그늘 사이로 스며들었다. (10) 움푹 파인 발자국을 채우며.....와 같은 열 가지의 햇빛에 대한 표현과 그 뒤를 따르는 심상image이나 정서적 감각을 결합하여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햇살에 대한 표현의 다양한 변화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표현의 새로움이나 신선한 언어감각이 시에 어떻게 영향을 주게 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표현의 창조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거의 모든 사물의 앞에서는 형용사로서, 뒤에서는 동작동사와 형용사, 또는 부사로서 그 의미를
새롭게 창조하여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형상화는 사물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심상을 나타내는 심상구조에서도 구성 동작이나 구성형상을 활용하여
수없이 많은 형상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는 시인들은 자칫 자기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언어의 습관에 의지하여 시를 다듬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그러한 경우에 흔히 드러나는 것이 “상투성, 또는 끌리세 cliche"라고 할 수 있다.
심상 또는 정서적 감흥을 형상화하면서 그 이미지의 뒤편 살펴보기---즉 예각적 시선---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형상화 단계에서부터 시적 표현에
새로움을 담아내려는 노력에는 이러한 구체적인 습작태도가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더 나은 시적 정서의 감동을 새롭게 해석하고 교류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시인들이 한번쯤 이러한 흐름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시에 대한 긍정적 방향을
논의해 보고 그 철학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자료>
현대문학(1966.5) 서정주 시 “동천”/매일신문 (2000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강원일보(2007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창조문학신문 (2007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4. 시적 실험에 대한 시인의 태도와 열정
우선 기성 시인들은 시적 실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많은 고민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저 과거에 써온 시적 형식이나 내용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큰 고뇌 없이 종전의 창작방법을 고수하려는 시인들이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보다 좋은 시를 창작하려는 욕심과 성취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시적
실험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점과 노력을 병행하는 것이 좋은 시를 창작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인은 자신의 평생에 시집을 16권이나 출간하였는데도 그 시적 형식이나 내용이 첫 번째 시집이나 16번째 시집이나 큰 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대동소이한
시집을 출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언어의 낭비요, 정력의 낭비요, 시의 위의를 모독하는 처사라고 비난한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시인들이 대부분일 터이지만, 그러나 그 변모하는 모습이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는 시인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자신의 시에 대한 철학의
부재를 뜻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시인들의 새로움에 대한 도전은 남의 일이 아니다. 시를 쓰는 동안, 시인이기 위해서는 부단히 그런 명제에 대하여 고뇌하고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더 멋진 시의 세계를 열어가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4.1 시적 정서를 확장시키는 창작의 사례
시적 실험이란 대부분 난해한 것이고, 그런 실험 중에서도 난해하지만 그 논리적 구성이나 정서적 확장이나 사실성으로부터 출발 하여 비껴나 있지 않은
시론으로 평가할 수 있는 오규원 시인의 “날 이미지 시”는 시적 변용으로 시의 영역을 넓히는 실험으로 응용될 수 있는데, 그 ‘난해하지만 난해하게 이해’
될 수 있는 “날 이미지”의 이론에 부합하는 예를 하나 들어 설명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당도한 곳은 잿빛 저녁 강가였다
강물은 고요히 저물고 있었다
저무는 일은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어둠 속으로 산과 산이 경계를 지우며
서로 포개지고 있었다
경계를 짓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었을 텐데
마음을 지우는 것은 어둠이었다
우리는 그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히 저무는 오늘이 얼마나 격렬한지
얼마나 뜨거운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어둠만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고요히 겹쳐지는 어둠을 바라보며
겹쳐지지 않던 우리의 산과
겹쳐지지 않던 우리의 강물과
겹쳐지지 않던 우리의 잿빛 저녁을,
저물고 있는 우리의 오늘을 보고 있었다
겹쳐진 산을 지우고 겹쳐진 강물을 지우고
겹쳐진 잿빛 저녁을 다 지우고 있는 어둠,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하나로 겹쳐져 본적이 없었으므로
아무런 경계 없이 하나로 겹쳐지는
어둠을 다시 한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말은
언제나 이런 어둠을 건너고 난 뒤였다
(시 “저녁 강가에서” 전문 /강미정 시인)
아마도 두 사람이 마지막 이별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저녁 강가’로 나갔던 것 같은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곳에서 시인은 “어둠”이라는 마음속에 투영되는
실체를 발견한다.
“경계를 짓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었을 텐데 / 마음을 지우는 것은 어둠이었다 ”고 말하면서 또한 그 어둠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우리는 아직 하나로 겹쳐져 본 적이 없었으므로 / 아무런 경계 없이 하나로 겹쳐지는 / 어둠을 다시 한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는 언술로 미루어 어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시작을 떠올리는 것으로 결구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당도한 곳은 잿빛 저녁 강가였다
강물은 고요히 저물고 있었다
저무는 일은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어둠 속으로 산과 산이 경계를 지우며
서로 포개지고 있었다
경계를 짓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었을 텐데
마음을 지우는 것은 어둠이었다
“우리가 당도한 곳은 ‘잿빛’ 저녁 강가였다 / 강물은 ‘고요히 저물고‘ 있었다“에서 ‘우리가 당도한 곳은 저녁 강가였다. 강물은 있었다’와 같은 언술은
”사실적 날 이미지“이고, 그것을 수식하는 ‘잿빛’이나 ‘고요히 저물고’와 같은 언술은 ”발견적 날이미지“에 속한다. 그리고 ”경계를 짓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었을 텐데 / 마음을 지우는 것은 어둠이었다“에서도 ‘경계를 짓는 것은 어둠이었다’는 것이 ”사실적 날이미지“이고 ‘마음을 지우는 것’과 같은
깨달음이 끼어든 것은 ”직관적 날이미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강미정의 “어둠“과 오규원의 날이미지는 연관성이 있는가? 복합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창조하는 데에 기여한 시론의 하나로 오규원의 날이미지
시를 뺄 수가 없다. 오규원의 날이미지는 ‘사실적 날이미지’, ‘발견적 날이미지‘, ’직관적 날이미지’라는 체계로 구분되어 있지만 이 시에서는 각각의 이미지들이
오규원이 분석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체계가 혼재되어 있는 양상처럼 보인다. 물론 그 이론이 시를 쓰는 시인들의 마음속에 중심으로 자리 잡아 그것으로부터
이미지의 재생산이나 재창조의 길을 터득했던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이미지들도 “강미정 시인”이 그러한 이론적 배경을
미리 배워 알고 이미지를 구축하여 쓴 시라고 단정할 근거를 댈 수는 없다.
그 시론을 충분히 이해하였다면 시인들이 더 좋은, 또는 더 멋진 시를 창작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였을 것이고, 그 시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인이
오규원의 날이미지와 비슷한 이미지들을 생성시키는 기회를 터득하여 시를 썼다면 그것은 우연히 마주쳐 일어난 정서적 촉발을 통해서 그 시인의 일회성
시적 실험의 일부로 나타났을 개연성이 있었을 것이다.
4.2 상상력의 공간 확장이 긴요해진 시대
이것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서 가장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덕목 중의 하나다. 현대시가 “드러냄”---‘나열적 정서‘---를 주축으로 변모하고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현대시에서는 다시 그 ’감춤‘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하여 상상력의 공간 확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상력의 공간 확장‘은 독자의 상
상력을 자극하고 그 속에 장치된 의미를 통해 감동에 이르는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가끔 지나치게 사실성에 주목하여 서경시敍景詩로 흐르게 되는 것은 사물과 이미지의 결합을 등한시하여 일어나는 현상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상력의 공간을 확장하는 것은 언어의 통일성, 감성적 통일성, 상상력의 연결성 등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성공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머리에 문득 떠오른 감동의 이미지에 옷을 입히고, 그 이미지를 상징성과 결합시켜 상상력의 공간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현대시의 보편적 공통점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작품 속에서 시적 상관물들이 서로 결속력을 가지고 의미를 드러낼 수 있도록 언어를 구사하여야 그 성취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언어의 통일성, 감성적 통일성, 상상력의 연결성 등이 잘 조화를 이루어낸 작품을 읽어보면서 그 내용이 어떻게 분화하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단순히 시의 해설이라는 측면에서 볼 것이 아니라 이 시가 독자의 정서에 감응하는 질서를 생각하면서 시를 감상한다면 이렇게 단순한 것 같은 시에도 숨겨진
의미의 배열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깊은 산골짜기에
빨갛게 성냥알 조롱조롱 달렸는데
칙~ 불을 붙여
빨간 알에 꼬~옥 붙였더니
화르르 불이 붙어
후~욱 불어 끄려해도
점점 꽃불만 지천으로 피어오르는데
큰일났다!
불장난하면, 그 날 밤
오줌싼다 그랬는데
봄산은 점점 불이 붙는데
머릿속은 점점 캄캄해지는데
내 몸, 꺼지지 않는 불덩이가 되고 있다
(“시 성냥꽃 불 켜다가” 전문 / 이재란 시인)
위의 예시로 제시된 시를 살펴보면, 어느 봄날 산골짜기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던 시인은 눈에 들어오는 ‘성냥꽃‘을 발견하고 그 성냥꽃의 모양이 성냥의
모양과 똑 같은 데에서 ’불‘을 연상한다. 그 ’불’은 예사로운 ‘불’이 아니다. ‘마음의 불‘이기도 하고 ’ 봄의 꽃불‘이기도 한 이 성냥꽃에 불을 붙이는 시인의
의도를 은밀하게 그려낸다.
“빨갛게 성냥알 조롱조롱 달렸는데 / 칙~ 불을 붙여”라는 언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는 그 ‘불꽃’이 잘 꺼지지 않는 불길이라는 ‘봄꽃’을 연상작용으로
상기시킨다. 이러한 언어행위가 시적 상상력의 공간을 확장하여 그 의미를 깊게, 또는 더 넓게 만들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욱 불어 끄려해도 / 점점 꽃불만 지천으로 피어오르는데”라는 표현으로 봄에 꽃이 피어 산 아래쪽에서 위로 위로 번져, 봄이 깊어갈수록 산꼭대기로
내닫는 꽃이 피는 현상과 조화를 이루면서, 꽃이 피어 올라가는 상상력을 ‘불길의 사실적 이미지와 결합’시키는 것이다. 또한 “큰일났다! / 불장난하면,
그 날 밤 / 오줌싼다 그랬는데”라는 말에서 어릴 적 성냥을 가지고 놀면 어른들이 야단을 치면서 하던 말과 결합시켜 “금지된 장난”을 연상시키면서,
마음의 불길이 봄처럼 타오르고 있음을 은근히 환기시킨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속의 은밀한 움직임을 ‘큰일났다!’로 표현---여기에서 띄어쓰기를 배제한 시인의 ‘다급한 의도’를 추리하여 보는 것도
재미 중의 하나이다---하여 긴장감과 재미를 한 곳에 집중시키는 동화적 화법이 아주 순수하게 그 움직임을 정화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봄 산은 점점 불이 붙는데 / 머릿속은 점점 캄캄해지는데” 라는 언술에서 ‘봄 산‘과 ’시인의 자아’을 동일시同一視하여 하나로 묶어 내면서 시인의 마음에도
“머릿속은 점점 캄캄해지”는 “봄”(=막연한 가려움증 같은 혼란한 정서)이 들어와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얻은 마지막 언술이 압권壓卷이다. “내 몸, 꺼지지 않는 불덩이가 되고 있다”라는 이 마지막 언술에 담겨 있는 상상력이 여러 독자에게 다양한
상상력의 공간을 제공하여 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동차가 사라졌다, 흔적없이
마당에 세워둔 빨간 우체통 위에
꺾인 솔가지 하나 걸쳐놓고
엠보싱 화장지처럼, 먼 산도 하늘로
자리를 옮겼는지, 가까운 산 능선만 겨우 남겨놓고
모두 지워졌다 온통 마을이
사라졌는데 어느 틈새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 오른다
끼니조차 지울 수는 없어서
망자亡者에게 제사상을 차려 향불연기 올리듯
기억의 심지에 불을 붙인다
사라진 것들은 고요하다
이 겨울나기 속에서 먹이를 찾던
새들도 모두 사라졌다
길이 끊겨 하루 너 댓 번, 버스도 오지 못하는
종점 마당이 환하다
가슴에 살던 사람들 모두 붕붕 떠서
들판으로 하늘로 날아다니는,
들도 산도 하늘도 모두 경계를 허물고
몸을 섞어버린 하얀 아침,
제 집을, 길을, 찾지 못하는
새 한 마리, 바람에 가슴 털 폴폴 날리며
하얀 우체통 위에 앉아 있다
(시 “사라진 세상” 전문 / 필자 졸시)
다시 다른 내용의 시 한편을 살펴보자. 눈이 내린 날의 풍경을 그려내어 “고요”속의 정서를 드러낸 시다. 눈이 내렸다는 사실은 “하얀 아침”, 또는 “지워졌다”는
은밀한 어휘가 그 풍경을 대신하고 있을 뿐, 눈이 내렸다든가, 눈이 오고 있다는 언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감상자들은 눈이 내린 아침으로
상상력을 확장한다. 우선 마당에 세워둔 ‘자동차가 사라졌다’는 충격(=놀람)을 전하는 것으로 시의 화두를 연다. 겨우 우체통 위에 얹혀 있는 솔가지 하나가 보일
뿐이다.
평면적으로 눈길을 돌리면 어디가 산인지, 어디가 들판이고, 어디가 마을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하얀 세상이 되어 버렸고, 그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엠보싱 화장지처럼’ 오돌토돌한 높낮이나 그 흔적만이 보일 뿐인 세상이 되어 있는 풍경이다.
지워져 버린 마을의 어느 집에서 연탄불이나 피워놓았는지 아침밥이나 짓는 것인지 모락모락 연기가 새어나오는 것으로 마을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시의 행간에 보이는 “기억의 심지에 불을 붙인다”는 구절---기억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시인의 마음에 들어있는 정서의 축軸임을 내밀하게 그려 낸다
그래서 “사라진 것들은 고요하다”고 정의定義한다. 여기에 시적 정서적 감춤이 존재한다. ‘고요’가 가져다주는 의미에 감상자의 상상력은 다양하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의도가 드러나는 언술은 “가슴에 살던 사람들 모두 붕붕 떠서 / 들판으로 하늘로 날아다니는,”이라는 ‘그리움’의 정서가 그 뒷면에
깔려 있다.
눈이 내린 날은 그냥 무작정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보일 수도 있지 아니한가? “제 집을, 길을, 찾지 못하는 / 새 한 마리, 바람에 가슴 털 폴폴 날리며 /
하얀 우체통 위에 앉아 있다”는 언술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그 막연한 ‘그리움’, 또는 ‘실체를 찾지 못하는 막연함이 ’새‘로 환치되어 길을 찾지 못하는
형태로 감상자에게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현대시 창작에 관한 변화와 경향에 대하여 그 중요한 이미지 발현에 대한 변주變奏의 다양성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물론 이 내용이 현대시를 특징짓는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어쩌면 각 항목을 하나의 테마로 보고, 보다 상세한 전개와 내용을 점검해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 내에서
시를 쓰는 시인들이 그래도 최소한 갖추어야 할 내용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 한국시의 현대적 모습이 앞으로도 더욱 멋진 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를 쓰는 시인들의 노력과 탐구정신이 새로움을 직접 찾아내고 실천하는 단계로
다가가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논의의 내용이 하나의 시발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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