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 오는 날 /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 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 속에 촛불 하나씩 켜 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 시집『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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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접어들어서는 반도 어디건 첫눈이 내려줘야 마땅하다. 일주일 전이던가 대구의 일부 외곽과 팔공산 자락에선 첫눈이 다녀가셨다지만 내 눈에 의한 관측기준으로는 아직 이곳엔 첫눈다운 첫눈이 오지 않았다. 서울을 비롯한 곳곳에서 전신만신 눈이 왔다고 환호하며 설경들을 페북에다 올리고 있다. 잠시 눈요기만으로 첫눈의 서정을 함께 한다. 눈은 얼마간의 낭만을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본격적인 한파를 예고하는 시그널이기도 하다. 이럴 때 과거엔 대통령부터 관계 장관, 선출직 공무원들은 노량진 수산시장이나 가락시장, 대구로 치면 서문시장이나 칠성시장 등을 방문하여 비록 연출일망정 서민의 삶에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이제 서로간의 속셈이 다 간파되었다고 생각해서인지 최근엔 그런 광경을 별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이명박 정부 때 가락시장의 한 아낙이 대통령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울고 있는 사진이 신문에 큼지막하게 실리던 날 대구에도 첫 눈이 내렸다는 사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에 그 장면은 자꾸 생각난다. 지금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마치고 나면 지지율이 조금씩 올랐다는 여론조사를 맹신해서인지 걸핏하면 바깥으로 돌고있다. 꼭 나가야할 일이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말릴 이유야 없겠으나 왠지 입맛이 쓰고 마음이 무겁다. 심십 몇 년전 작은아이 세살 때 사물을 감식하는 눈이 막 뜨일 무렵, 밤새 눈이 내려 세상이 하얗게 도포된 광경을 아침에 일어나 보고선 "아빠 외계인이 왔나봐!" 생애 처음으로 눈을 본 아이의 눈엔 달라진 세상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보였던 것이다. 눈이란 강하물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잠시 세상을 달리 보이게끔 하는데 정말 세상이 확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나도 시를 알기 훨씬 전, 이 눈이 세상의 간을 맞추는 조미료가 아닐까라는 유치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싱거운 것은 싱겁지 않게, 짠 것에는 짠 맛이 덜하게 간을 맞추어 세상의 맛을 내는 하느님의 조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우리 자랄 때 장독대 위에 함지박 만하게 내려앉은 눈이며, 기와 지붕위 멋진 곡선을 또렷이 드러나게 한 설경의 아름다움은 요즘 보기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눈으로 채색된 풍경은 외계인의 침공이든 하느님의 조율이든 누구의 가슴에게나 얼마간 포근히 감싸 안고서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게 한다. 그리고 눈이 오면 저절로 노래하는 마음도 생기나 보다. 시인이 바라보는 첫 눈 오는 날은 새들의 겨울꿈 조차 신비하지도 더 이상 부럽지도 않다며 몇 섬이고 하늘의 별도 따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눈이 오고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로 날렸으면 좋겠다. 그래, 시장바닥에서 시래기 파는 아낙의 눈물도 향기 되어 훨훨 날아가도록 그렇게 눈 한 번 펄펄 오지게 왔으면 좋겠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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