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와 글 공부

[스크랩] 나의 시 쓰기에 대한 변명 - 복효근 시인

취몽인 2015. 12. 24. 16:45

 

 

 

 

나의 시 쓰기에 대한 변명 - 복효근 시인

 

◈ 우리詩 여름자연학교 특집 - 감동 깊은 詩, 어떻게 쓸 것인가?

 

 

  감동을 주는 많은 시를 접해왔으며 많은 시인을 접해왔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쓰기 위하여’ 라는 주제를 주면서

말하라 하니 난감합니다. 시골에서 시 몇 줄 고르면서 묻혀 사는 이에게

벅찬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감동을 주는 시를 써본 경험이 우선 없습니다.

겸손이 아니라는 것은 저보다 저의 시를 읽어 보신 분이 잘 알 것입니다.

 

  시골에 묻혀 산다는 말이 저 사는 공간이 시골이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시골 소도시에 살기 때문에 경험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적이긴 하겠지만 문인들과의 만남도 적고

자극을 받을 만한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공연이나 전시회를 한번 가는 데도 특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접하는 사물도 늘 거기서 거기인 ‘자연’이 대부분입니다.

때문에 소재면에서 제한되어 있고 다양한 주제를 천착하기에

매우 제한적인 현실에서 살며 또 그런 시를 쓰고 있습니다.

 

  도회생활을 안 했던 것은 아닌데 살다보니 체질적으로 번거로움이 싫고

농촌생활과 그에 맞는 정서를 찾다보니 실험정신도 부족하고 아늑하고

따뜻한, 그러나 어찌 보면 안이하고 정적이며 비역동적이고 나태한

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 자리에서 말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제 스스로가 감동을

주는 시를 써왔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가 그렇듯이 감동을 주는 시를

쓰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는가, 제 나름의 시작방법을 주문한 것이리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해보기로 합니다.

 

  시를 연구하고 공부한 분 같으면 적확한 비평용어로 몇 줄로 요약할

있을 텐데 저는 시를 연구하거나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골에 처박혀 시를 좀 읽고 시를 좀 썼을 뿐입니다.

주로 제가 쓴 시를 예로 들면서 두서없는 얘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그림과 시

 

  저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습니다.

중학교 때에는 이제 화가가 되어야지 하는 꿈을 갖게 되었고 학교 미술부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연히 학교 공부는 소홀히 하게 되었지요.

그럴수록 화가의 꿈은 공고해져갔지요.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큰 도시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서 그림을 계속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쉽지

않았습니다. 화구를 사는 것도 비쌉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대도시로

박차고 나간 것도 무리인데 게다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

이었습니다. 그림을 접었습니다.

이때부터 시를 외고 쓰고 합니다. 그전 초등, 중학교 때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를 많이 읽고 외고 하였는데 그게 재미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만의 노트에 그림을 그리고 시를 옮겨 적곤 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 다시 화실에 다니면서 주로 데생을 했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화가가 되어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해

뵈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림을 좋아하여 여기저기 그림 전시회가 있으면

자주 가서 관람을 하곤 하였습니다.

 

  제가 대학 때 은사님의 연구실에서 한 2년 남짓 교수님의 일을 도와

드리면서 제 공부도 하고 용돈도 벌었고 한 적이 있는데 그 무엇보다

교수님의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소설 전공인데 시를 쓰기도 하고 미술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많은 책 가운데 화집이 많았습니다. 유파별로 화가별로

정리된 총천연색 화집을 보면서 유파별 특징도 알게 되고 화가별 개성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지식적인 것보다도 그림을 보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늘 느꼈습니다. 왜냐면 상상하게 되고 그 시대 그 인물

그리고 그림 속 상황에 함께 놓인다는 것은 일종의 행복감이지요.

 

  그리고 좋은 미술작품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좋은 작품으로 평가

됩니다. 괜히 좋은 작품인 게 아니지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 구도가 특별한 의도 속에서 잡힌 것이며 색채에도 작가의 전략이

숨어 있고 소재나 공간의 분할 등 여러 가지 의도가 실현되어 명작을

만들어내겠지요.

 

  나중에 제가 시를 쓰면서, 미술에서 작가가 시도하는 이러한 모든

노력들이 그 매체를 달리하긴 하지만 시를 쓰는 데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은 시, 감동적인 시는 한 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림에서 선 하나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 아시지요?

선 하나가 분할한 공간은 어떤 것은 기형적이고 불안한 구도로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우리의 시선을 오래 붙잡지 못합니다.

반면 어떤 선 하나는 단지 그 선 하나로 공간을 황금비율로 분할합니다.

전체를 아름답게 하지요.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女人(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追悔(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설야」전문

 

 

  위에 인용했습니다만, 김광균의 「설야」의 유명한 한 구절을

기억하시지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이는 눈 내리는

소리를 비유한 것인데 바로 이러한 한 구절이 시 전체에

황금분할 선으로 이바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선이 시 전체를 살린다는 데 주목합니다.

이 시는 눈 내리는 밤의 고독한 내면 풍경을 노래한 것인데 여인이

옷 벗는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성적인 감각을 일깨우려는

의도로 쓰였습니다. 고독이라는 추상어가 구체적인 감각으로

우리에게 와 안기도록 한 것입니다. 가 닿을 수 없는 여인, 고독을

한 층 더 절망과 슬픔 쪽으로 몰아넣고 있는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그런가하면 색채는 어떻습니까? 다시 김광균을 인용합니다.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머언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불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김광균, 「데생」전문

 

 

  여기서 보면 시와 그림이 다르지 않습니다. 구도가 있고 선과 색채가 있고

적정한 위치에 사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의미가 주는 감동과는 달리

그저 선과 구도와 색채가 주는 아름다움이 먼저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시를 쓸 때는 독자에게 한 폭의 그림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그림은 완결된 사실풍의 세밀화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송나라 휘종황제가 “어지러운 산, 옛 절을 감추었네.”라는 화제 畵題를

내놓았을 때 많은 화가들이 무수한 어지러운 봉우리와 계곡, 그리고

그 구석에 자리 잡은 고색창연한 퇴락한 절의 모습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일등으로 뽑힌 그림에는 화면 어디에도 절의 모습은

없었다고 합니다. 대신 숲 속에 조그만 길이 나있고, 그 길로 중이

물을 길어 올라가는 장면을 그렸다고 합니다.

분명 숲 어딘가에 절이 있다는 얘기겠지요.

 

  세밀화 보다는 이처럼 생략하고 감추고 암시해주는 이와 같은 그림이

시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림 퍼즐을 맞추다보면

몇 개의 그림 조각이 빠져버리면 그림이 되지 않습니다.

그처럼 시가 압축된 언어형식이라고는 하지만 과도하게 압축되고

생략된 나머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통 모르겠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숙한 그림은 생략하되 암시합니다.

상상력으로 메울 수 있는 만큼 생략합니다. 시에서도 그래야 하지요.

낯선 낱말을 어지럽게 조합해 놓은 것 같은 난해시는 저는 개인적으로

호감을 갖지 않습니다. 나름의 어떤 전략과 의도가 없지 않겠으나

예술적 훈련이 안 된 사람이 부리는 호기 같아서입니다.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 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 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졸시,「쟁반탑」전문 

 

  좋은 시라고 해서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저에게 이야기하라 하였으니 제 시를 몇 편 인용합니다.

이 시가 갖고 있는 메시지가 분명하지요. 그리고 어렵지 않은

일상어로 되어있다는 점도 장점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독자의 머릿속에 몇 장면의 정지화면 내지는

그림이 떠오른다는 점이 이 시가 갖고 있는 미덕이라면 미덕일 수

있겠습니다.

정지용의 「향수」도 몇 장면의 그림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물론 시각적이고 회화적인 심상이 그 어떤 짜임새를 갖추어야 되는

것은 물론이지요. 뒤에 또 그 점은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는 그림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제 시에 조금이라도 감동적인 요소가 있다면 아마 그림을 그렸던,

그림을 많이 보아왔던 데가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접 예술에 대한 특히 미술, 건축, 음악 등에 대한 관심은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야기와 시

 

  다음은 비슷한 맥락에서 제가 소설을 한 때 써보려 했고, 썼던 경험이

시 창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는 얘기를 좀 해보고 싶습니다.

흔히들 소설은 산문이고 시는 운문이다. 소설은 비판정신에 닿아있고

시는 인간의 서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들 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똑 같이 언어로 되어 있다는 점 말고도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아 있습니다. 제 이론이 짧아 일일이 분석적으로 다 말씀 못 드리는 게

안타깝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소설에서 시점을 선택합니다.

가령 황순원이 「소나기」를 쓸 때 전지적 작가시점을 채택한다든지,

주요섭이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쓸 때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쓴다든지

했을 때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시를 쓸 때도 퍼소나를 따로 설정하여 내세우는 수가 있지요.

김소월의 짧은 시 「엄마야 누나야」가 그렇습니다.

누구의 목소리로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이냐를 두고 이렇게 화자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시와 소설이 닮아 있습니다.

이 말고도 여러 가지 얘기할 수 있겠습니만, 시도 소설처럼 어느 정도는

허구를 차용한다는 점입니다. 허구라 해서 꼭 지어낸 이야기라고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이야기라 해도 좋습니다.

소설처럼 인과 관계가 필연성을 바탕으로 꽉 짜여진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시도 읽으면 한 편의 짤막한 이야기(사건)가 머릿속에서

이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나 혼자 심심할 것 같다고

병실 바닥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한 봉다리 마늘을 가지고 와선

TV. 보며 마늘을 까는 여자,

배울 만큼 배웠다는 여자가

선생까지 한다는 여자가

미간을 찌뿌리고 나가는 간호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뭐, 어때 하면서 마늘을 깐다

산중에 곰이 제 배설물 냄새로 제 영역을 표시하듯이

그 역한 마늘 냄새는

내 환부에 새겨 넣는 영역 표시 같아서

저 곰 같은 여자의 냄새는

그 어떤 약보다

그 무슨 항생제보다

독하고 또 용할 것도 같아서

제 곁에 내 곁에 백 년 동안은

아무도, 암껏도  얼씬도 못할 것만 같았다

                                           

-졸시,「아줌마, 아내」전문 

 

  이는 짤막한 경험담을 이야기로 즉 산문으로 풀어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산문과는 다르지요. 달라야 합니다.

언어의 배열이나 비유 언어유희 등의 언어사용이 산문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인용하다보니 여기서 ‘이야기’ 는 모티프 정도로

말해질 수 있겠네요.

이와는 달리 백석의 시를 한 편 예로 들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시는 한 편의 이야기라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소설 한 편의 이야기가 여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다만 세세히 설명하고 묘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독자가 상상하고 그 여백을 메워야 하겠지요.

잘 된 시, 감동을 주자면 글을 읽었을 때 짜임새 있는 이야기 한 편이

머릿속에 이어지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여승」전문

 

  시와 소설(이야기)은 별개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탄탄한

서사적 구조에 익숙한 사람은 시에서도 이러한 구조를 펼쳐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창작을 하기에 앞서 소설을 반드시 써야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산만하고 짜임새 없는 전개는

시의 주제마저 모호하게 하고 읽는 맛을 떨어뜨립니다.

아시다시피 좋은 시, 감동적인 시 가운데는 그 짧은 시 작품 속에

서사적인 구조를 깔아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소설에서 배울 수 있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독서와 시 쓰기

 

  시를 쓰는 데 있어서 독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독서는 창작에 젖줄을 대어줍니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지요. 구양수가 三多를 얘기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독서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는 없겠지요.

또한 시를 쓰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수많은 모티프를 독서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으며 사고의 깊이를 얻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직접적으로 제 2의 창작으로 이어지게도 하지요.

잘 아시는 고재종 시인은 그런 면에서 독보적이지요.

고재종의 많은 시편들이 풍부한 독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많은 작품이 유명 작가의 명작들을 시로써 다시 리메이크했습니다.

시로써 재창조한 거지요. 저도 많지 않으나 감동적인 독서 체험을

시로 노래해본 것이 있습니다. 독서체험이 문학적 재생산으로 이어진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제 졸작「춘향의 노래」나 「만복사저포기」가

그것입니다. 고전은 그것이 고전일 수밖에 없는 감동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감동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싶었습니다.

 

 

지리산은

지리산으로 천년을 지리산이듯

도련님은 그렇게 하늘 높은 지리산입니다

 

섬진강은

또 천년을 가도 섬진강이듯

나는 땅 낮은 섬진강입니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지리산이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나는 도련님 속에 흐르는 강입니다

 

섬진강이 깊어진 제 가슴에

지리산을 담아

거울처럼 비춰주듯

도련님은 내 안에 서있는 산입니다

 

땅이 땅이면서 하늘인 곳

하늘이 하늘이면서 땅인 자리에

엮어가는 꿈

그것이 사랑이라면

 

땅 낮은 섬진강 도련님과

하늘 높은 지리산 내가 엮는 꿈

너나들이 우리

사랑은 단 하루도 천 년입니다

                                   

-졸시,「춘향의 노래」전문

 

 

  춘향전에서 한 여자의 정절을 보고자 하는 노력들을 해왔습니다만,

저는 춘향전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을 보고자 했습니다.

바로 너나들이의 평등한 사랑이지요.

섬진강 없는 지리산 생각할 수 없고 지리산 없는 섬진강을 얘기할

없듯이 상생의 불가분의 관계로 엮인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입니다.

너무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우리는 원전 춘향전을, 심청전을

읽지 않습니다.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줄거리를 안다고 아는 게

아니지요. 말맛을 놓치면 다 놓친 거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판소리로 한번 이것들을 접해보면 우리 조상의 언어감각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고전을 새로이 해석하고 재창조하며

그 언어를 민족의 언어로 이어가는 노력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다음은, 졸작「만복사저포기」를 인용해보겠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어찌

이승의 것만이 사랑이겠느냐

 

그것이 인연이라면

단 한 번의 저포놀이라 할지라도

숙세(宿世) 내세(來世)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겠느냐

 

옷깃 스친 꽃잎 하나로도

영원이 아니겠느냐

그 단내 나는 숨결

한 바탕 꽃꿈이라 하지만

 

그것이 운명이라면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 까지도

사랑하는 나의 길은

이승 저승 영원의 길

 

혹여 네가 다시 그 길에 피어

옷깃에 스칠 수만 있다면

내가 오늘 지리산에 들어

시방세계 꽃잎을 다 헤겠다

                                

-졸시,「만복사저포기」전문 

 

  앞서 예로 들었던 춘향전은 열녀 춘향이 이몽룡에게 목숨을 걸고

정절을 지킨다는 아름다운 얘기지요.

목숨을 걸다니 춘향전은 사뭇 비장합니다. 얘기를 조금 단순화 시키면

이 같은 주제는 당시 유교적 질서 속에서는 크게 개성적이지 못합니다.

물론 춘향전을 폄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폄훼한대서 평가절하 되지도 않을 명작이지요.

 

  그러나 한편「만복사저포기」는 남자가 여자에 대하여 정절을 지키는

얘기입니다. 유교가 지배이념인 당시의 사상풍조 속에서는 가히

혁명과 같은 발상이지요. 발칙하고 도발적인 상상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처와 내기를 한다는 점, 그 결과 부처를 이긴다는 점, 절이라는

성소에서 처녀와 만나 사랑을 치룬다는 점 등을 보면 절대화된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적인 의도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신봉해 마지않았던 공맹의 가르침과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세도의 부당한 권위에 맞서고 또 무시하려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이러한 개성은

우리 시인들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체험과 시 쓰기

 

  내 시 속에 담고 있는 내용은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겪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 시를 ‘생활시’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굳이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는 내 시의 일관된 특징을 이루어 왔으며 굳이 내 시에 그나마

내가 채택한 시창작의 전략으로 밝힐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부터 생활과 유리된 시는 감동을 주기 어렵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습니다.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사변으로서 그려낸 이미지나 관념으로 감동을 주는 시를 보면

그래서 존경스럽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내 시가 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시를 쓸 때 내 경험의 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않습니다.

 

  시에 목을 매고 시를 위해 살았다는 사람을 보면 저 밑바닥에서부터

거부감이 일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오직 틀어박혀 시밖에 생각한 게 없노라, 시를 쓴 것밖에는 한 일이

없노라 말하는 사람(있을까 싶지만)이 있다면 시 쓰기에서 비롯된

과장법이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쓴 시가 그 사람의 삶을 구원하고

영혼을 구제했다 하더라도 크게 본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의 시는 기호를 가지고 한 장난이거나 자기 혼자만

(유식한 평론가들도 포함해서) 알아먹을 암호놀이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혼자만이, 혼자만을 위해(아니면 몇몇 시를 안다는

사람만을 위해) 구축한 그런 세계를 시라 한다면 나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양보하겠습니다.

 

  내 시는 내 생활의 연장선 속에서 쓰여집니다.

나는 청소(내 특기다.)하고, 설거지하고, 아이들 가르치고, 마당에

풀 뽑고, 빨래하고, 술친구들과 술 마시고, 게으르게 뒹굴고…

그렇게 삽니다. 그리고 시를 씁니다.

나는 내가 쓴 시가 내 삶(생활을)을 추동하는 동력이기를, 방향타이기를

바랍니다. 내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체험, 즉 행주좌와어묵동정

가운데서 의미를 찾고 싶고 그 의미가 나를 조금은 사람다운 모습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랍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나를 찾아가는 작업이고 되돌아보는 작업이며

앞날의 모습을 그려나가는 작업입니다.

 

  서정시가 나의 주관적 정서를 노래하는 것인데, 물론 평소 나를

내세워 간접적으로 나의 느낌과 생각을 전달한다 하더라도

나의 체험 밖의 일들을 노래하는 것은 자칫 어느 행사의 기념사,

축사와 같이 공허하기 쉽습니다.

그런 시가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실함이 부족하다 다시 말하면 감동이 적다는 말이겠지요.

 

 

언젠가 단감을 깎아먹고

그 씨알 하나를 세로로 쪼개어본 적이 있다

 

씨알 속에는 길이 1센티도 안 되는

뽀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느낌표 같은 나무의 줄기에 두 개의 앙증스런 잎사귀가

화살표의 형상으로 이미 하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화살표 이쪽으론

한 하늘 가득 창창히 뻗어오를 감나무의 전 생애와

한 그루 감나무가 걸어갈 수억 년이,

화살표의 저 쪽으론 또

감나무가 걸어온 수억 년이

그 작은 씨알 속에 압축되어 있었다

그 속에

수억 년 전의 감나무 아래서 감을 따는 나와

또 수억 년 뒤의 감나무 아래서 감을 따는 내가

태반 속의 아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무시무종(無始無終)

우주가 잠시 비밀을 들켜주는 순간

                                       

-졸시,「씨알 속 우주 한 그루」전문 

 

  단감을 깎아먹은 얘기입니다. 뭐 대단할 게 있습니까?

감동을 주는 체험을 담기 위해서 엽기적이고 남다른 체험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체험입니다.

그것을 객관화하여 들여다 볼 수 있는 조망능력이 필요합니다.

나의 많은 시는 그렇게 사소한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 많습니다.

그 체험이 주는 의미를 곰곰이 되새깁니다.

사소하다고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밥 먹은 것 하나 똥 싸는 것

하나의 체험도 역사적이지 않은 것 없으며 그 나름의 의미를

다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것들을 포착하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소한 체험의 편린을 핍진한 진실로 밀고 나아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자면 세밀하게 관찰하고 경청해야 합니다.

  보고 들은 내용만 그대로 받아 적어도 시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너무 길지 않은 시

 

  집이 너무 커서는 안 됩니다. 집이 사람을 압도하고 사람을 부리기

시작하면 사람은 집에 눌리어 집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꼴이 되고

말지요. 쓰지 않고 돌보지 않은 공간이 많으면 먼지가 주인이기

쉽습니다.

 

  존재의 집이라고 하는 언어 또한 그렇지 않을까요?

언어예술의 정수라 할 시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길어야 할 시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한참 읽다보면 앞에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 시, 쓸 데 없는 군살이 많은 시, 너무 친절하게 이것저것 다 설명

해주는 시를 보면 허술하게 지어진 집에 들어서는 것 같이 꺼림칙합니다.

유행처럼 과도하게 시가 산문화되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허우대는 껑충하지만 색깔도 향기도 갖추지 못하고 웃자란 화초 같은

작금의 시에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모두 설명해줘 버려서 독자의 몫이

남아 있지 않은 시는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앞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받아 적어도 시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는데 다음 시가 그렇습니다. 듣는 분의 재미를 위하여 감동을

주기보다는 웃음을 주는 시를 골랐습니다.

 

 

개 팔어요, 개 삽니다.

큰 개, 작은 개 삽니다.

개 팔어요, 개~애 하면서 개장수 차가 지나간다

개장수는 차 속도를 줄이더니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위아래로 한참이나 훑어보고 간다

                                                           

 -졸시,「개장수가 다녀가다」전문

 

 

  그래서 압축과 긴장이 절실합니다.

이는 절제된 언어형식 속에서 가능합니다. 물론 짧다고 능사가 아닌 것도

분명합니다. 짧되 그 안에 구조가 있고 논리가 있으며 사유의 체계가

있고 이야기가 있으며 가락이 있고 그림이 있어야겠지요.

위 시를 읽고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하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개장수가 나를 개로 파악했다는 얘기잖습니까?

어디 그랬기야 하겠습니까만 그렇잖아요? 개장수가 천천히 위 아래로

나를 훑어볼 때는 ‘이 사람이 몇 근이나 나갈까, 육질은 괜찮을까,

질기겠어. 성질깨나 있게 생겼군. 농장 지키는 개로나 팔면 좋겠어.’

뭐 이렇게 봤다는 얘기 아닐까요?

이러한 생각이 이 시에 담기기엔 너무 짧은가요?

저는 더 쓰려다가 이렇게 몇 줄로 압축을 했습니다.

 

  우리의 시조가 그랬고 일본의 하이쿠가 그렇습니다.

촌철살인의 언어 구사가 필요합니다. 크고 화려한 외양보다는

절제되고 정제된 언어 형식으로 독자의 마음속에 쏙 안길 수 있는,

그래서 언제든지 혀에 굴려보고 맛보고 음미할 수 있도록 시는

그렇게 길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을 합니다.

 

 

  시도 재미있어야 한다

 

  시가 너무 엄숙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시가 너무 근엄하고 무겁고 엄숙해서 시를 점점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이는 시각매체를 비롯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가져가는 다른 문명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는 언제나 소수자들의 몫이었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만

이는 시 자체에도 문제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시가 재미없습니다. 나는 시가 좀 쉬워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시가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탁번 시인의 시를 보면 재미있는 시가 많습니다.

속담이나 여기저기 떠도는 우스운 이야기를 시에 도입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하는 시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따뜻함이 있고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이 번뜩이는 경우도

봅니다. 물론 경계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웃음에만 초점이 맞춰지면 시가 너무 가벼워질 수도 있으니까요.

 

 

급한 김에

화단 한 구석에 바지춤을 내린다.

 

힘없이 떨어지는 오줌발 앞에

꽃 한 송이 아름답게 웃고 있다.

 

꽃은 필시 나무의 성기일시 분명한데

꽃도 내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까

 

나는 나무의 그것을 꽃이라 부르고

꽃은 나를 좆이라 부른다.

                               

-졸시,「꽃 앞에서 바지춤을 내리고 묻다」전문

 

 

  이 시 역시 실경험을 바탕으로 관찰 내용을 그대로 옮겨 쓴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물론 시가 코미디여서는 아니 되겠지요.

 ‘꽃과 좆’, 같은 기능을 가진 것들이 이렇게 천양지차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는 것 아닐까요?

원색적인 언어가 쓰여서 재미있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혹자는 이러한 저의 시를 두고 야하다고 하는데 쓰인 언어가 원색적이라는

지적을 하는 거겠지요. 하나의 단어에 얽매이지 말고 이 시가 어디를

가리키는가를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런 시가 아니지 않습니까?

 

  웃음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것이 적어도 시이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자기 성찰에 닿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아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시

 

  얘기하다보니 어느덧 “자아성찰”이라는 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시가 가지는 여러 가지 기능에 나는 거울을 기능을 말하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말이지요.

시를 통하여 자신을 들여다보고 뉘우치며 지금의 모습을 비춰보고

앞길을 가늠해보는 자아성찰적인 기능이야 말로 시를 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문학을 위해 살지도 않고 시를 위해

죽을 생각도 없습니다.

 

  시 쓰기의 방법 가운데 투사와 동일시의 방법이 있습니다.

둘 다 시적대상과 자아와 관계 맺는 방법을 가리키는데 어떤 경우든

자기 자신을 비춰보는 방법입니다. 시를 쓰는 일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그 일이 즐겁지만은 않지요.

때로는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일종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시를 통해 그러한 자아를 변증법적으로 승화시키는 일도 합니다.

그래서 시 쓰는 일은 영혼을 고양시키는 작업이기도 하지요.

자기를 비춰보는 일이 치열할수록 울림이 깊은 시가 아닐까요?

윤동주의 많은 시편들이 그렇습니다.

저의 많은 시편 또한 나를 들여다보는 데 바쳐져 있습니다.

5권까지의 시집에서 작품을 골라 시선집을 냈는데 제목이 「어느 대나무의

고백」입니다. 시선집의 성격을 짚어보자니 내 자신에 대한 성찰과

고백이었습니다. 다음 시 한 편을 읽어드리고 제 말씀을 접겠습니다.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하건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 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개치고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다.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을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졸시,「어느 대나무의 고백」 전문

 

 

 

 

출처 :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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