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게 들어보는 '시란 무엇인가'
시 하나에 매달려 평생동안 시를 써온 시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시란 무엇인가?
몇몇 시인들은 시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렇다. 인생이 만져지는 실체가 아니듯, 시는 손에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확연히 잡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로시인 김규동은 “가슴에 뭔가 이리도 넘쳐서 어쩔 도리
없을 때 시라는 물건을 그적거려 본다”고 했고, 김종길 시인은
“즉각적인 깨달음”이라 했고, 허만하 시인은 “자존의 절벽”
이라고 한 마디로 말했다.
시인 네루다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시를 정의하는
일이라 했다.
그럼에도 시를 정의하여 천양희 시인은 “시는 내 삶의
단독정부”라고 했으며, 문정희 시인은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건강과 같다”고 했고, 신달자 시인은 “내 뼈 안에서
울리는 내재율”이라 했다.
또 오탁번 시인은 “저녁 연기 같은 것”이라 했으며,
문인수 시인은 “삶의 궁기를 베껴적은 것”이라 했다.
시란 무엇인가?
시와 함께 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나라 주요 시인
44인의 시의 ‘깨침’과 ‘깨달음’을 본지는 이번 호의
특집으로 게재하였다.
최고의 연가戀歌 / 강은교
시는 ‘빈 방에 꽂히는 햇빛’이다. 이 영원회귀의 사막 기슭에서
우연긍정들이 현재들을 필연긍정화하려는 몸부림이다.
우연긍정이 집어든 <언어 하나>가 필연긍정의 허리 속으로
<언어 둘>을 끌고 갈 때 시의 여행은 시작된다.
그리하여 우연의 대大긍정이 필연의 대긍정이 되어
리얼-모더니즘*을 실천한다.
그러한 시는 끊임없이 포획한다.
사유의 포획과 그 변주, 상황의 포획과 그 변주, 대상對象의
허물이 벗겨져 흩날리는 추墜이미지.** 추이미지들의 포획
뒤에 오는 통합과 연결의 눈부신 ‘빈 방’, 거기 고독과 허무의
자궁 속에서 다시 한 번 재생의 사제를 꿈꾼다.
최고의 연가戀歌를 꿈꾸는 것이다.
*강은교, 「순례시첩」 참조
**강은교, 「무명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1」 참조.
죽순론 / 고두현
비 그친 다음날 대나무 숲에서 보았다.
여기저기 싹을 밀어 올리는 죽순.
귀 기울이면 키 크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마디마다 생장점이 있어 하루 만에 소나무의 30년분을
자란다니 그럴 만도 하다.
한 달이면 어른 대나무 키가 되고, 생장이 끝난 뒤엔
더 굵어지지 않고 속을 단단하게 다진다.
그런데, 대나무는 땅 속에서 5~6년을 자란 뒤에야
순을 내민다.
땅 속 줄기가 굵을수록 죽순도 튼실하다.
마디마다 달린 눈 가운데 죽순으로 솟는 것은 고작 10%.
그만큼 오랜 기간을 거치고 생멸의 경계를 지난 뒤
지상에 오른다. 꽃은 일생에 한 번만 피운다.
마지막 순간에 온몸으로 개화하고 생을 마감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가 탄생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래 견딘 뿌리, 삶의 극점에서
단 한 번 피우는 꽃. 매사에 더디고 과작인 내가
특별히 신봉하는 ‘죽순의 시학’이다.
시가 탄생하는 찰나 / 김광규
삶과 현실을 직선이라 하고 꿈과 환상을 원이라 한다면,
이 원과 직선이 만나는 접점에서 시가 태어난다.
제비가 비 오는 날 땅 위를 스쳐 지나가며 벌레를 채어가듯
이 땅의 체험이나 소재가 하늘의 환상이나 언어와 마주치는
순간을 시인은 포착한다.
삶과 꿈, 운동과 정지의 어느 한 쪽에 치우쳐 머물지 않고,
꿈과 삶이 맞닿은 지점, 또는 정지가 운동으로 바뀌는
찰나에 시는 탄생하는 것이다.
활자와 정보매체의 홍수, 정치적 구호와 상품 광고의 소음에
쫓기고 현혹되고 조작당하며, 모든 것이 컴퓨터로 통제되는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시는 기계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희귀한 작품이다.
시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돈을 목적으로 부르지 않는
마지막 노래라 할 수 있다.
가슴에 뭔가 이리도 넘쳐서 / 김규동
그림이 될까요, 건축이 될까요 아니면 독백이 될까요 희극이
될까요 비극이 될까요 아니라면 낙서가 되고 말는지요.
하여튼 무엇을 만들어 보고 싶은데 그게 그리 쉽사리 되어지는
게 아니고 보면 평생을 두고 이 노릇을 되풀이한 보람
아무 데에도 없나 봅니다.
여보세요 내 말 좀 들어보슈. 못 견뎌서 해보는 거외다.
가슴에 뭔가 이리도 넘쳐서 어찌할 도리 없을 때―― 실컷
울고 싶을 때 그러한 처지에 놓였을 때 그것, 시라는
물건을 몇 줄 적어본답니다요. 병신같이 쭈그리고 앉아
그적거려 보는 겁니다요. 하하.
지내놓고 보면 쓴다는 것, 만들어 본다는 것, 그것은 끝없는
운산이요 연습이었음을 깨닫는 이 허무감을 어찌할까요.
분단은 오랫동안 과학과 지성이 시 현실에 개입되는 걸
막아왔습니다.
시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나 / 김기택
내 시 쓰기를 돌아보면, 시의 즐거움은 체험에서 온다.
시의 겉모습은 언어이다.
일상의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해 대상을 의미, 관념, 생각
따위로 만든다. 그것은 ‘온몸’을 사용하지 않고 머리만
사용해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시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온몸에서 작용하는 체험을
하고자 한다. 즉 시는 언어라는 겉모양과는 달리 노래라는
속모양을 갖고 있다.
노래는 음과 리듬을 통해 감정과 정서를 활성화시킨다.
그처럼 시도 오감과 정서, 무의식 등 온몸을 깨워
활동하게 한다.
시에는 신나는 즐거움은 물론 슬픈 즐거움, 무서운 즐거움,
불쾌한 즐거움, 심지어는 지루하고 짜증나는 즐거움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각, 무의식, 본성 등을 포함한 온몸의
활동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때 시인은 상상력으로 변형된 현실 또는 잠재된 내면에서
솟구쳐 나온 삶을 살게 된다.
시의 즐거움은 순간적이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힘을 갖는
이유는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면서 불가해한 삶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해갈시킬 수 있고 욕망의 좌절이나 현실에서
오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숟가락으로 단지 가리기 / 김언희
시는, 숟가락으로 단지 가리기.
하필이면 숟가락으로? 국자도 아닌? 손바닥도 있는데
굳이 숟가락으로? 가린다고 가려지나, 그게?
그래도 시는, 숟가락으로 단지 가리기. 필사적으로
단지 가리키기. 여기 있어, 그것이! 있어, 여기!
스텐이거나 플라스틱이거나 숟가락이 가리는/가리키는
것은 오직 하나. 단지. 단지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것.
쓰다 보니, 단지는 특정한 성의 성기를 다정히 부르는
속어이기도 하다.
에고고, 내 꿀단지! 결국 시는, 숟가락으로 이런 저런
단지 가리기/가리키기. 그런데 왜, 단지를 가리지/
가리키지? 누가? 무엇이? 나는 모른다.
시는, 알까?
높이 뜨는 깨달음―깨침 / 김종길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큼 황당한 물음도 드물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 동서고금에 무수히 시도되었건만
아직도 미진未盡한 데다가 시에도 여러 가지가 있고
시를 보는 관점 또한 무수히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쓰고 읽는 시를 통틀어 서정시라고 하지만
그것이 모두 ‘서정’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E. A. 포우처럼 시를 ‘높이 뜨는 느낌’으로 규정하는
것은 꽤 포괄적이고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그 고양감의 실체를 ‘깨달음’
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비행기나 글라이더처럼 한 편의 시도
길지 않은 활주끝에 뜨는 것이지만 그 부력은 ‘깨달음’의
부력이다.
이 경우의 활주에도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주로 느낌,
즉 감각이나 감정이 그 주된 내용이며 그것의 종말 내지
목적은 어떤 즉각적인 깨달음 내지 ‘깨침’이다.
시가 무어냐고? / 김종철
장자도 말했고 공자도 말했고, 40여 년 전 저 아득한
미아리 낡은 강의실에서 목월도 말했고 미당도 말했고
김구용도 학생들에게 담배를 빌려 피우며 말했고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동리도 불쑥 한 마디 했던 그것!
오늘은 나도 한 마디 할란다, 똥이야!
살아 있는 암호 / 김종해
내가 너에게 아무도 모르게 ‘사랑한다’는 암호를 편지에
써서 보냈는데, 너는 남들이 모르는 그 암호를 곧 독해讀解
하고 답신을 보내왔다.
‘사랑한다’는 나의 말은 너에게 전달되고, 너는 답신 속에
또한 암호를 보내왔다. 나는 그 암호를 받고 기뻤으며
전율하였다.
두 사람이 내통할 수 있는 암호는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시의 한
전형典型이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암호의 압축, 축약된 문맥과
색깔, 상상력과 율동, 그 어법 속에 살아 있는 시의 혼을
담아내는 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시인의 몫이다.
시, 줄타기의 언어 / 김중식
한때 내게 시는 ‘끝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것만 ‘진짜’였고 나머지는 다 ‘가짜’였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겠다.
시는 적당적당的當適當히 가는 것이다.
끝까지 갔다가, 또는 끝까지 가려다 무서워서 되돌아나오는
비겁의 자리가 시의 마음자리다.
양극단을 다녀온 가운뎃점이라 할 만하다.
경經과 선전포고가 시보다 더 훌륭하다.
하지만 시는 성聖의 비듬과 각질이며, 시는 속俗의 하품과
재채기이다. 해탈의 포즈는 위선이어서 가증스럽다.
자폐의 방백도 위악이므로 못마땅하다.
어느 쪽이든 비루한 삶의 자리로 생환해야 시다.
시는 어쩔 줄 모르는 삶의 흔들리는 언어다.
시는 흔들리는 삶의 어쩔 줄 모르는 언어다.
‘나’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나’의 출몰 / 김행숙
내게 시는 인식론적인 대상으로 ‘저만치’ 놓여 있지 않다.
그렇다고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장소에 비견될 수
있는 범주도 아니다. 시는 글쓰기의 ‘사건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태 속에서 움직인다.
‘쓴다’라는 행위 이전에 작품은 어디에도 없다.
작품의 기원은 작가의 ‘머릿속’에(‘가슴속’에도) 있지 않다.
‘사건’은 벌어지는 것이며, 충돌하는 것이며, ‘의외’의 방향
으로 번지는 것이다. 사건 속에서 ‘나’는 주도자가 아니라
반응하는 자일 뿐이다.
나는 반응하고, 사랑하고, 폭발하고, 반사하고, 흡수하고,
뺏기고, 훔치고, 달아나면서, ‘나’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나’는
출몰한다. 그러므로 낯선 것(새로운 것)을 시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면서 우리는 낯설어지고 새로워진다.
영원히 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으리라.
상처가 시를 낳는다 / 김후란
시는 그리움의 소산이다. 날마다 그립고 날마다 새롭다.
시인의 정신세계는 무한대여서 어느 선현의 말씀처럼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세상을
보면서’ 산다.
상처가 조개 속에 진주를 키우듯이 삶의 손톱자국이나
어느 순간의 감동이 시의 씨앗이 되고 한편의 시를 낳는다.
시를 쓰는 일은 축복된 일이며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감성을 연마하는 일은 나의 삶을 정련하는
행복한 길이기도 하다.
문득 가슴에 울림이 있을 때 가장 적은 말로써 보다 크고
넓고 깊은 세계를 열어보이는 문학세계, 한 편의 시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깊은 뜻까지도 마음에 새기면서 무언가
인간세계에 따뜻이 손 잡아주는 한 역할을 우리 문학인들은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시인은 시를 써서
하늘의 별자리에 올려놓는다.
가시면류관 / 나태주
장님이 문고리 잡듯 잡은 신비였다.
평생을 놓지 못했다.
지난해, 죽음의 골짜기에서 보름만에 탈출하고서도
제일 먼저 찾은 것이 종이와 펜이었고 역시 맨처음
시도한 일이 시쓰기였다.
시는 시인 스스로 선택한 형벌. 하므로 시는 시인에게
고통과 함께 쾌락을 준다. 때로는 쓰러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일어나는 방법은 오직 시쓰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참으로 모순이요 이율배반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하기사 우리네 인생 자체가 그렇지 않겠는가.
어려운 말이나 까다로운 구문으로 시를 현혹시킬 일이
아니다. 평이한 문장과 단어 속에 보다 깊은 삶의
뜻을 새기고자 한다.
인생의 발견을 담고자 한다. 하면서도 솔직해지고자 한다.
시인이여. 부디 시건방을 떨지 말자.
아는 척, 잘난 척도 하지 말자.
깨달은 척은 더더욱 금물!
오늘도 내일도 시는 그저 시일 따름.
시는 시인이 선택한 가시면류관이 아니던가!
나에게 주고 싶은 말이다.
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 노향림
시는 나에게 꿈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는 삶 자체다.
시는 언제나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그 불가사의한 매력과 매혹 때문에 그리하여 시는
언어 그 자체라고 믿고 싶다.
시는 끝내 그 실체를 보여주지 않고 언어만 덩그마니
내 앞에 놓아두고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실체를 보여주지 않아 밤새워 시를 탐색해 보면 하얀 손톱만 한
먼 우담바라 꽃이 아롱져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진짜
우담바라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것은 볼 수도 잡을 수도 없다. 단지 풀잠자리의 알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왜 언어에게서 늘 상처를 받으며 언어의 경계를 또 넘어
서려고 하는 걸까. 언어 그 체를 믿고 또 믿는 것일까.
예술은 절대적으로 새로워야 한다는 명제가 엄연히 존재하는 한
그 새롭고 새로울 뿐이라는 엄정함에 놀라울 뿐이다.
그래서 더욱 분명한 실체를 보여주고 싶어 나의 시는
이미지와 묘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시에다 쉴새없이 긴장과 이완을 되풀이하며 비어 있는 것에는
사물의 존재를 채워주고 채워져 있는 것에는 끝없이 그 의미를
제거하는 이중적 구도를 선호하는 내 성격 탓일까.
시는 꿈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는 내 삶 그 자체다.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어야 / 문인수
“길은 식물의 물관부와 같은 것일까.
한참 빨려 들어가다 보면 사람이, 사람의 영혼이 문득
새로 눈뜨거나 피어나는 데가 있다. (중략)
정선에서 우포늪에서 섬진강 가에서 나는 잠시 서 있었고,
그때 내 삶의 궁기가 보였다. 그걸 베껴 적었다.”
내겐 이것이 시가 되었다.
“재미라는 말 안에 인생 전부, 전반을 우겨넣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해 본다면 나는 시 쓰려는 궁리, 쓰는
노력보다 더 그럴 듯한 일이 없는 것 같다.”
이것이 나의 시쓰기이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야말로 절경이다. 그래, 절경만이 우선
시가 된다. 시, 혹은 시를 쓴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사람 구경일 것이다.”
이것이 시, 시쓰기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건강과 같다 / 문정희
시가 무엇인가 묻지 말라.
시란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속성을 지닌 예술이다.
시에 대한 정의는 언제나 완벽한 정의가 아니기 쉽다.
그러므로 오늘은 시인에게 있어 시는 건강과 같다고 말해 둔다.
건강진단서가 지금 당신은 아무 병이 없다고 해도 만약
시인이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불건강이요, 아프고
병든 생명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찍어 잡지에 한 번 발표해보기 / 박남철
시는 괄호하고 대학교수이다.
아니, 시는 먼 산을 바라보면서 사진 찍어서 잡지에다
한 번 발표해보기이다. 아니, 시는 손을 턱에다 괴고서
사진 찍어서 잡지에 발표해보기이다.
(4년 전에 옛날 카메라를 잃어버려서, 4년 전 사진들밖에
없어서 ‘디카’를 새로 샀다. 사진들이 잘 나와주어야 할 텐데……)
아니다, 시는 마이클 잭슨처럼, 혹은 나처럼, 사타구니 쪽에다
손을 갖다대고서, (“으!”), 사진 찍어서 잡지에다 한 번 발표해
보기이다. (“Dangerous!”) [아무튼, 사진만은 잘 나와주어야
할 텐데…… 그래야 ‘중앙대 여자 교수’하고라도 어떻게
결혼이라도 한 번 해볼 수가 있을 텐데……]
아니다, 시는 어떤 노회한, 그래봤자 노후할 뿐인 어떤 늙은
노벨상 후보선수처럼, (“으!”),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털었다 놓았다를 그토록 열심히 반복해대면서, (“흐!”),
‘후장-엉덩방아-춤’이라도 한 번 추어대면서, 북-유럽-적인
관객들 앞에서 시낭송이라도 한 번 해보는 것이 아닐 것인가?
오, 진정, 여한이 다 없을 일일지로다! (“으이!”)
생을 사랑하는 엄혹한 시선 / 박주택
시에 있어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경험은 내용과 형식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경험이 시를 지배할 때 시는 일상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일상이 시간과 공간을 거느리며 의식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실재, 진실, 감동 등과 어울려 오래된 시적 미학을
구성하는 데 바쳐질 것.
따라서 경험과 일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중요한 시의
덕목. 그렇다면 일기를 쓰듯, 체험을 고백하듯, 기억을
복기하듯 시를 쓸 것인가?
의식은 무의식의 실재이자 주변. 경험은 추체험의 토대이자
주변. 따라서 경험, 일상, 실재, 진실, 감동 등에 지나치게
매이지 않는 자재自在가 필요하며 무의식, 추체험, 입체성,
생의 깊이 등을 사랑해야 할 것. 그리고 전체성의 측면에서
자신의 시와 우리시를 성찰하는 엄혹한 시선이 있을 때
시는 한층 시다워질 것이다
시는 허기진 사람에게만 약동한다 / 박형준
우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심지어 그것을
제맘대로 갖고 싶어하지 사물이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거나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사물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게 되면 나와 사물 사이에
침묵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침묵은 일견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우리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는 물결을 지니고 있다.
침묵은 아무 말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하는
방식이다. 그러한 침묵은 우리에게 허기를 일깨운다.
허기는 ‘안’에서 느끼는 것이지 ‘밖’에서 느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허기에는 얼마나 격렬한 숨죽임이 있는가.
허기는 또한 비움이며, 그 비움이 아름다움을 불러온다.
나는 비워서 충만해지는 상태가 아름다움이라 생각한다.
삶 혹은 시는 허기진 사람에게만 약동한다.
가인歌人 / 손택수
그리고 일현금一絃琴들의 단 한 줄
- 아폴리네르
아폴리네르(프랑스, 1880-1918)에 따르면 시는 단 한 줄로
된 현악기다. 그 한 줄은 제목과 본문 사이에, 가인과 악기
사이에, 사물과 꿈 사이에 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그 한 줄은 잘 벼린 수평선처럼 서늘하고 투명하게 가슴을
벤다.
그리고 복화술사처럼 한 일一자로 두 입술을 포갠 채
무수한 파도를 일으키며 다채색의 진동음을 낸다.
그러나 수평선은 본디 없는 것이 아닌가.
멀찌감치 물러나서야 눈에 들어올 뿐,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없는 그 한 줄, 그러나 분명히 시인의 가슴을 버히고 간
상처 자국, 부재하는 아름다움이 우리를 노래하게 한다.
비계살 많은 내 시의 살갗이 축축 늘어지고 굳은살이
배길 때면 시퍼런 작둣날 위에 올라선 무당처럼 가끔씩
중얼거려보는 이 한 줄, 시라기보다 그것은 이제
무슨 주문처럼 느껴진다. 섬뜩하다.
우주와의 화해 / 신달자
내 몸과 내 정신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는 것, 내 몸과
정신의 난타 공연, 내 몸과 정신에서 도저히 그대로
머물 수 없는 비명과 명상이 세상 밖으로 비집고 나오는
것, 내 삶의 경험을 통해 내가 존재하는 자연을 통해
내 시선을 통해 내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
몸 혹은 정신에서 괴어 오르는 함성을 내 언어로 오래
묵혀 발효시킨 한 잔 술이다.
내 뼈 안에서 울리는 내재율이다. 혹은 모든 사물과의
부딪침 충동, 그리고 우주와의 화해.
황야의 눈 / 신대철
처음 내게 다가온 시는 하나의 뭉쳐진 말이었다.
새들이 풀잎을 말아 아름답게 틀어 놓은 둥지 같은 말이
아니라 온몸을 찌르는 결석 같은 통풍 같은 말이었다.
시를 쓰지 않을 때에도 그 통증은 기억 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밤마다 괴롭혔다.
극지를 떠돌면서 나는 그 말이 으르렁거리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비통한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끝없이 갈구하고 분노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생명의 소리는 강렬한
생의 의지 없이는 마침내 그 원초적인 생명성을 잃었다.
그동안 내가 언어로 포획한 시는 대부분 시가 아니었다.
언어가 죽고 소리만 남지 않는 한, 체험된 말 하나하나
가 생생하게 현장을 불러내고 살아 있다고 외쳐대지
않는 한. 최근에는 황야의 눈을 가진 늑대 같은 시를
쓰고 싶다.
토끼와 구름, 하늘 높이 띄우기 / 신현정
졸시 '토끼에게로의 추억'으로 시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토끼에게서는 달의 향기가 난다//분홍눈은 단추 같다//
앞이빨이 착하게 났다//토끼의 두 귀를 꼬옥 쥐어봤으면
했다//몽실했다//두 귀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도
해 보았다//토끼와 시이소를 타고 싶었다//그러면 토끼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오겠지//토끼는 구름이 되겠지//
아하함 이참에 토끼와 줄행랑이나 놓을까.”
토끼를 기화 혹은 발화, 부유의 동력인 구름으로 띄워보았다.
어쨌거나 지상에서 너무 높다랗게 띄웠음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또 다소 몽상적이기도 해서 누가 이 시대에 달이나
바라보는 퇴행의 뒷모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니요
한다해도 할 말이 없다.
염치불구하고 한 번쯤 극단의 절반만이라도 멋진 고공비행을
해보자는 계산을 깔고 선택한 것이 토끼와 구름이었다.
당분간은 이런 결벽증에 가까운 개결미의 순진한 놀이를
즐기기로 한다. 어디까지나 존재 자체를 헐겁게 느슨하게
페이소스하고 싶었던 것인만큼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저녁연기 같은 것 / 오탁번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 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높이까지만 피어오르다가,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저녁연기,
이게 바로 시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두레반 앞에 앉으면, 솔가지 타는 내가
배어 있는 어머니의 흰 소매에서는 아련한 저녁연기가
이냥 피어오른다.
시詩, 받침 하나가 모자라는 / 유안진
龍이 못 된 이무기처럼 무한 자유로운 용이상 이무기처럼
神이 되려다가 받침 하나가 부족한 詩는
한글로 시는
신고 다니는 <시 ㄴ>, 신(발)이라도 되려는 詩는
‘龍이 부러워하는 이무기’
‘神이 부러워할 신(발)’
몸의 衣裳이 부러워하는 ‘발의 옷’
혼신을 다 담고 인생을 제멋대로 길 잡는 발의 옷
“언어로 만들어진 발의 옷”이다
따라서 詩語가 아닌 非詩語의 反詩가 詩 以上의
詩다.
진실의 과녁 뚫는 탄환 / 이가림
나는 언젠가 「헛수고」라는 시에서 “힘껏 방아쇠를 당겨
/ 언어의 탄환을 쏘아보아도 / 한사코 과녁 밖으로 / 빗나갈
뿐이니 // 아아, 헛되고 헛되도다 / 새 한 마리 떨어뜨리지
못하는 / 미친 시인의 사격술이여”라고 한탄한 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 수많은 시인·문예이론가들이
시에 대해 정의해 왔던 것들 중, E.슈타이거가 말한
서정시의 본질, 즉 ‘회감(Erinnerung)’의 시학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나는 시를 언어의 탄환으로 사물의 핵심, 또는
삶의 진실의 과녁을 정확히 꿰뚫는 행위라고 간단히
말하고 싶다.
하지만 100발의 언어의 탄환을 한 발도 빗나감이 없이
진실의 과녁에 다 맞추기란 정말 神技에 가까운 명사수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불완전한 도구인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명확히 인식하여 그 유효 射距離를 알고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란 언어의 탄환으로 명중시킨 진실의 과녁이다.
우주의 비교록秘敎錄을 훔쳐내는 일 / 이건청
국어사전엔 ‘의미’로 단순화된 말들이 그득히 갇혀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원래 말이 지닌 자율적
영역을 극도로 제한해서 쓰고 있다.
국어사전이 ‘말들의 감옥’인 이유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시란 어떻게 하면 국어사전과
다르게 ‘말’들을 운용하느냐의 문제이다.
시란, 때 묻은 ‘의미’를 떨쳐낸 ‘최초의 눈’이 되어 ‘눈 시린
최초의 사물’을 ‘보는 일’이며, 그렇게 ‘본 것’을 ‘언어’의
‘틀’로 옮겨내는 일이다.
아, 최초의 눈이 되어 최초의 사물을 만나는 설레임.
거기서 쪼개지고 부서지면서 일렁이는 감각과 직관의
세계, 혹은 광막한 우주의 무한천공에 펼쳐진 비교록
秘敎錄의 내용을 가능하면 더 많이 훔쳐내는 일이다.
개똥참외론 / 이근배
나는 시를 모른다.
쉰 해 가까이 시인이라는 헛이름을 달고 품팔이를
해오고 있으면서 정작 시를 써보겠다고 붓을 들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나는 시를 만나본 일이 없다.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몸짓을 하고 어떻게 태어나며
어디로 가는지? 만나본 일이 없는 까닭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내가 언젠가 ‘도깨비’라고 한 것도 분명 있기는 있는데
그래서 자주 씨름도 해보기는 하는데 그놈의 생김새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굳이 들이대자면 나는 시는 ‘개똥참외’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든 먼저 본 사람이 따먹는다.
이미 따먹은 개똥참외는 다른 사람은 딸 수가 없다.
개똥참외는 콩밭을 매다가 우연히 눈에 띈다지만
시라는 개똥참외는 어디 가서 찾지?
먼저 따먹은 시인들이 밉다.
생의 자양분과 생의 독毒 / 이선영
“나뭇가지를 타고 다니며 나무의 수액을 핥는/청설모의
하는 양을 보며 문득 생각한다/시란 저 나무와 같은 것
이겠거니,/어미 청설모와 그 새끼들의 입을 적셔 주고
목을 축여 주는/수액을 분비해 내는 일!(중략)/내 시는
네겐 해로운 분비물인 것 같구나”
졸시의 하나인 <청설모>를 통해 나는 ‘은근슬쩍’ 혹은
‘작정한’ 나의 시론을 내비치고자 한 적이 있다.
시는 ‘수액’과 같은 자양분이 되어도 좋으나 ‘해로운 분비물’
처럼 끙끙 생을 앓게하는 독毒이 된다 해도 좋으리라.
시 창작의 근원을 캐려는 시도는 이미 오래 전에도 있었다.
박용철의 「변용 시론」이나 하우스만의 「분비물 시론」
등이 그것이다.
정신과 육체의 분비물의 총합이자 그 양 톱니바퀴의
맞물림을 통해 운용되는 총체적 삶의 소산, 그것이 바로
내가 쓰는 시의 정체일 것이다.
위대한 시인들에게는 탁월한 시론이 있었다.
김수영·김춘수가 그러했고 엘리어트가 그러했다.
그러나 내내 시를 쓴다고 하면서 변변한 시론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한 시인으로서의 내 자괴감은 크다.
이형기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쓰고자’ 해서 쓰는 시가
아니라 ‘쓸 수밖에’ 없어 쓰는 시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일까.
산행山行과 같은 것 / 이성부
‘육체는 슬프다’라고 숙명처럼 노래한 시인이 있었다.
그러나 ‘시가 있기에 육체는 기쁘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시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항상 가슴이
설레고, 조금쯤은 흥분되거나 긴장하기 마련이다.
시는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되, 천변만화의 표정으로
나를 맞아들인다.
시를 만날 때마다 새롭게 풋풋하게, 나의 육체 속에
충만한 생명을 감지하는 것도, 시의 이 같은 변화무쌍한
자연 속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시를 언제나 ‘산행山行’과 같은 것
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육체가 마음 놓고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고통이나
고달픔까지도 모두 기쁨이 된다는 것을 이미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삶에 낙관주의를 심어주는 것, 육체는 기쁨에 떨게 하고,
정신은 한없이 풍부하게 채워주는 것――이것이 시이다.
너무나도 확실한 물증 / 이수익
구체적이지 않은 시론은 시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구체적이란 실재하는 사물이나 환상을 통하여 시에
완연한 모습을 부여할 때 쓰일 수 있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시가 추상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쓰일 경우에는
그것은 아무런 형용할 수 없는 함정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그런 불편한 모호함으로서 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대부분의 시들은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사물 안팎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너무 사물의 미세한 면을 드러내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시는 추상과 관념의
세계를 미리부터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은 이런 짜임새를 갖춘 거부감은 시를 왜소하게
만들기에,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텐데도 말이다.
“빈 산막엔/능구렁이처럼 무겁게 살찐 고요가/
땅바닥에 배를 깔고 숨을 몰아쉬고 있다.”
너무나도 확실한 물증에 안도하면서, 나는 더욱
견고하게 나의 시를 앞으로 밀어내고 있다.
극점의 언어 / 이승하
종이라는 평면에 적히지만 시이기에 입체적인 언어가 된다.
시는 공간을 만들고 우주를 만든다.
시간을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한다.
시는 일상어를 확장시키고 굴절시킨다.
때로는 일상어를 부정하고 배신하기까지 하면서 탈세상을
꿈꾼다. 때로는 언어로써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무모한
시도도 한다. 애매성과 구체성, 은유와 환유, 기법과 정신,
환상과 현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그 틈바구니에서 시인은 아파한다.
그래서 시는 극점의 언어, 극한의 언어이다.
8000미터급 고산의 정상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피치를
올리는 그 집념으로 쓰는 것이다.
최후진술을 한다는 각오로, 유언을 남긴다는 각오로
오늘도 나는 또 한 편의 실패작을 쓰고 있을 뿐이다.
시는 없다 / 이승훈
시가 있는 게 아니라 시론이 있고 시론은 해석이고
해석은 역사의 산물이다.
역사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해석은 없고 해석은 언제나
역사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시의 본질은 없고
절대적 가치도 없고 시라고 명명하는 목소리, 시라고
정의하는 제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무슨 시의 본질이니 가치니 진리니
하며 폼을 잡는 시인들, 평론가들, 이론가들을 보면
한심할 뿐이다.
요컨대 시는 없고 시론이 있지만 시론은 역사가 생산한다.
우리가 쓰는 시는 근대의 산물이고 근대 이전엔 이런
이상한 글쓰기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탈근대 혹은 후기 현대에 살고 이런
시대엔 미적 자율성, 시적 언어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근대 시론이 맥을 못 추고 시와 비시의 경계도
모호하고 도대체 시를 평가할 기준이 없다.
그러나 이런 기준의 부재, 결핍, 무가 자유와 통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통한다.
현대시의 역사는 끝나고 현대 시론도 끝났다.
남은 건 시에 대한 자의식이다.
이제 시론은 철학이고 시쓰기는 시에 대한 방법론적
회의, 자기 성찰, 자기비판이다.
내가 본질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이런 사정을
동기로 한다.
시와 비시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시를 고집하는 것은
폭력이고 우리 시단엔 이런 의미로서의 조폭들이
너무 많다.
내가 자작나무를 범한 이유 / 이재무
체제 검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 검열이다.
문학은 금기와의 싸움이다.
상상력의 영토는 무한대로 보장되어야 한다.
시는 결코 도덕, 종교, 철학, 이념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텍스트 내에 파편적으로 편재할 뿐이다.
또, 문학(시)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진실의 구현이다.
이를 위해 현실 경험을 굴절 왜곡 축소 과장할 줄 알아야 한다.
언어 예술인 시는 언어를 통해 미적 쾌감과 울림을 안겨
주어야 한다.
언어에 대한 민감한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시의 성감대는 사물과 현상 그리고 인간의 삶에 그 예민한
촉수를 들이밀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그들 앞에서 자주 발기하는 자이다.
발기 불능은 시의 영감을 불러올 수 없다.
작년 여름 백두산 기행길에 자작나무를 범한[樹姦]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부재의 씨앗이 자라서 맺은 열매 / 장석주
모든 시들은 부재의 숲에서 싹을 틔우는 어린 나무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부재의 존재였고, 죽은 뒤에
다시 부재의 존재로 돌아간다.
문자들은 이 존재와 부재의 간극 사이를 불어가는 바람이다.
뭔가를 쓰는 자들은 이 부재의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채집망을 휘둘러 바람을 붙잡는다.
어리석은 몸짓, 아무 보상도 없는 몸짓들.
그러나 부재의 씨앗들은 여기저기에 흩뿌려져서 마침내
싹을 틔운다. 누구나 무의식에 그 어린 나무가 자란다.
*
부재의 씨앗이 자라나서 맺은 열매가 바로 시다.
*
쓰는 행위 안에서 쓰기와 지우기는 반복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쓰면서 동시에 뭔가를 지워가는 행위다.
쓴다는 행위는 쓰지 않는 것들, 끝내 억압되어 무의식의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들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씌어지면서 표출되는 것들의 아래로 숨는다.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워지는 것이다.
모든 씌어지지 않은 것들은 삭제된 흔적, 공백으로 남는데,
실은 우리 욕망과 검열기제들에 의해 강제로 지워진 결과다.
백로와 트랙터와 시 / 장인수
웃음 창고에서 나오는 시, 눈물 양념을 버무린 해학의
시를 쓰고 싶다.
실핏줄도 심장도 미토콘드리아도 웃는 시를 쓰고 싶다.
웃음 비타민, 웃음 에너지가 풍부한 시를 쓰고 싶다.
나만의 친환경 웃음 새싹을 틔우고 싶다.
장인수만의 웃음 성분? 뭘까?
넉살 좋고, 비위가 노래기 회 쳐 먹을 정도의 능청?
언어유희?
음, 나는 인생의 2/3를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촌놈이다. 동시에 반인반수다.
순박하지만 음흉하고, 넉살 좋은 말재간을 갖추었지만
본능적으로 맹금류의 성품도 있다.
웃음보가 남달리 크고 깊은 존재이면서 사나운
이빨도 갖추었다. 트랙터를 닮았다고나 할까.
요즘은 농부보다는 트랙터가 훨씬 멋들어지게 농사를
잘 짓는다. 트랙터의 바퀴는 덤프트럭의 바퀴보다
네 배 정도 크다. 힘도 훨씬 더 세다.
그런데 트랙터 뒤에는 수십 마리의 백로들이 학춤을
추며 따라 다닌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무지막지하게 생겨먹은 천하장사 괴물이면서 백로와
함께 논바닥에서 춤을 추는 트랙터를 닮은 시를
쓰겠노라고.
시는 나다 / 정일근
나는 시를 독학한 시인이다.
손을 내밀 학연도 선린善隣도 없었다.
누구도 시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빚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시가 나의 열망이었기에 스스로 시 쓰는 법을 익혔다.
몇 권의 시집이 나의 스승이었으며 내가 내 시의
열렬한 애독자였다. 내가 쓴 시는 나를 만족하지 못하면
시로 행사할 수 없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다.
시는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설득시켰다.
나는 시에 무지하였다.
이론서도 번역서도 읽지 못했다.
그래서 내 시도 무지하였다.
거들먹거리고 어렵고 요란하고 난해한 시는 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나는 논論을 모르기에 논論이 없다.
나의 시안詩眼은 선악善惡과 미추美醜를 바르게 보는 것.
나를 설득했다면 나를 감동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나에게 시는 나다.
나 이상도 나 이하도 아니다.
시는 몸이며 생성이다 / 정진규
시는 생성生成이다.
요즈음 시는 내게 어제 심은 작약 다섯 그루이며, 담장 밖
낮은 언덕에서 녹음이 한창인 석가헌夕佳軒 늙은 느티나무의
모년봉청춘暮年逢靑春이다. 그가 비워둔 그의 허공으로
우리 집 뜨락을 기웃대는 아득한 한낮이다.
그의 음예陰?가 진종일 걸려 쓴 문자다.
지식과 경험의 늙은 역사가 질서라는 이름으로 간섭하는
것을 그는 거북해할 때가 많다.
제왕절개보다는 자연분만을 절대의 생명 행위로 그는
체화體化하고 있다. 시는 몸이다.
가령, 보리타작 끝낸 까끄래기를 태우는 저녁연기와
그 너머 뒷산에서 허드레로 건너오는 뻐꾸기 울음이
(박용래)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처음부터
감응하고 있는 통로가 그에게는 있다.
어떻게 한 몸인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내게 있어 지금 그 순간은
<‘저물다’의 실물고지實物告知요 슬픈 안식>으로 응답하고
있다.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와 저녁연기는 그래서 한 몸이다.
하나는 소리로 다른 하나는 시각으로 서로 감창感愴하고 있다.
시는 몸이며 생성이다. 그것에 대한 절대적인 동의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꿈속에서조차 꿈을 꾸는 마침내
이르고자 하는 몸 밖의 몸이다>
그 생체生體다. 감창의 소산이다. 그러나 정답이라고
단답을 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둘도 아니다.
추사秋史 선생 말씀대로 불이선란不二禪蘭으로 태어나는
하나의 몸이다. 수식瘦式의 소산이다.
심득心得된 말 / 조정권
사유 앞에 언어를 다 드러내는 것은 시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시를 쓰기 전에 나는 마치 벼랑 끝까지 내몰린 심정을
유지하려 애쓴다.
절벽 앞에 던져진 어떤 메시지를 뛰어 내려가 붙잡을 수도
없고 동시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마음의 상태가 며칠씩
지속되거나 혹은 젖은 성냥처럼 잘 지펴지지 않기도 한다.
나는 지속되는 마음의 상태에 성냥을 긋고 한 줄의 불을
일으킨다.
나는 언어를 사유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는 시인의 체질을 드러낸다.
내게 언어란 사유 이전이거나 사유 이후에 발생되는
‘심득心得된 말’이다.
시의 첫 구절 혹은 한 문장은 반드시 이 심득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도록 한다.
나는 땡볕과 같은 언어를 직접 쐬지 않는다.
땡볕이 창호지를 통과해 유순해지듯 그렇게 나는
언어를 ‘심득된 세계’로 조련하려 애쓴다.
돌 틈을 파고드는 나무 쐐기처럼 / 채호기
시란 언어적 구성물이다.
동시에 시란 언제나 언어 그 너머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알다시피 시의 이러한 특성은 언어의 본질적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초점은 언어와 실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언어의 질서’와 ‘언어로
표현될 세계의 질서’는 항상 서로 어긋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서 시의 힘과 아름다움이 발생하지만
모든 시창작의 난제 또한 이곳에서 생겨난다.
시를 쓸 때 시인은 언어의 질서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고는 언어의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질서를 버리고도 시에 도달하는 일,
그 지난한 실현은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몸의 질서, 즉
의식이나 가슴이 아닌 몸의 반사 운동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 언어의 질서를 넘어서는 언어의 완성은
전면적이지 않고, 돌 틈을 파고드는 나무 쐐기처럼 부분적
으로 이루어지며, 언어의 바깥인 실재에서 오지 않고
언어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시는 내 삶의 단독정부 / 천양희
“나더러 시詩를 설명하라고?
그건 안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야.”
시인 네루다가 한 말이다.
나더러 시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리라고?
그건 안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무서운 일이야.
나두 네루다처럼 말해본다.
시란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시라면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라고 바꿔 말해보면 어떨까.
나에게 시는 절망이 부양한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다.
그래선지 내 삶에서 시는 단독정부의 수반처럼 무서운
권력을 쥐고 있다.
그 권력은 살아 있는 자로서 나를 늘 질문자의 위치에
서게 하고 각성자의 위치에 서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시의 큰 힘이다.
한 편의 시는 한 세계와 같다는 말은 얼마나 무궁무진한
시의 힘인가.
그 힘으로 시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때 시는 내 자작自作
나무이며 내 전집全集이다.
아무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 / 최영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었으나 말하고 싶어
쉴새없이 몸이 들썩였던 것.
무슨 대단한 비의를 품은 듯, 천기를 누설하는 착각에
빠지게도 했던 것.
굳이 쓰려고 하지 않았으나 자기 안의 다른 무엇이
써버리고 말았던 것.
써놓은 것이라도 얼른 감추고 폐기처분해야 했으나
그만 깜박 발설해 버린 것.
지면을 어지럽히고 종이를 낭비하고 독자의 시간과
감정을 빼앗은 것.
아무 쓸모없는 짓거리였으나 그러므로 더욱 쓸모 있는
것이라 자위하고 의미를 달아준 것.
나 자신이라도 구제해볼 요량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점
온 세계를 구제하려는 과대망상에 빠졌던 것.
잘해야 허무맹랑한 허무를 덮는 위안거리나 되었을 것.
그 바람에 다른 유용한 것들을 다 놓쳐버린 것.
눈앞에 늘린 수백의 유용을 자진반납하고 단 하나의
무용을 거머쥔 것.
더 잃을 것도 없는 적빈의 열매, 혼자 궁글려보다
허공에 훅 날려버려도 좋을 것.
아무 쓸모없음의 모든 쓸모 있음.
나의 2백자 시론 / 허만하
시는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언어실천이다.
시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다른 짐승과 구별되었다.
시는 자기에 대한 논의를 한발 앞서 있는 언제나
미래이어야 한다.
시는 전달을 바라면서도 대중성을 경멸하는 아름다운
양면성이다.
시는 지속적으로 상투성과 싸움으로써 정신의 싱싱함을
살려내는 미량의 독이다.
시는 그 자신의 코드를 가진다.
시는 평균치의 길을 버리고 택한 편차의 길이다.
시는 마이크를 잡지 않는다.
시는 시 이외의 다른 가치(정치 권력 또는 유사 이데올로기)의
앞잡이가 되기를 자각적으로 거부하는 자존의 절벽이다.
시를 쓰므로, 나는 있다 / 허영자
시는 나에게 있어 자기 존재의 확인이며 자기 정화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이며 내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내가 쓰는 시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쓰는 시를 통하여 나는 내가 있으며,
또한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가를 스스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시를 통하여 나는 자기의 온갖 부끄러움을
지울 수가 있다.
나의 추함, 비겁함, 거짓…… 등등이 저지르는 악행과
악덕을 씻어내는 행위가 시이다.
하기에 시 앞에서 나는 항시 참회의 마음이며 정직한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획 특집 <시란 무엇인가> 총론
생명의 언어, 지예至藝와 지도至道의 시 / 정효구
1. 글을 시작하며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처럼
난처하다.
그러나 이런 물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시쓰기는 물론 인간들의
삶도 한층 팽팽한 탄력 속에서 생기를 뿜어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물음은 정확하고 보편적인 답을 즉각 얻어내는 데
목표가 있다기보다, 그런 물음을 던지는 것 그 자체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의미가 있다.
정답을 기대하지 않고 진지하게 던지는 질문, 그럼으로써
질문 자체뿐만 아니라 그 답도 함께 의미를 갖게 하는 질문,
그런 질문이 바로 이런 유형의 것이다.
20세기를 거쳐 21세기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현대시론은 추상화와 관념화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시론이란 이름의 책을 다 통째로 외워도 시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체감하고 체득하기 어려웠다.
시론은 싱싱한 물고기가 모두 빠져나간 어부의 거칠고 마른
그물처럼 물가 저쪽에서 왕조의 유산같이 내실 없이
경직된 채 유전되었다.
이번 기획은 학자가 아닌 현장의 시인들에게, ‘시란 무엇인가’
라는 정답 없는, 난처한 물음을 의도적으로 던진 것이었다.
그들에게 기대한 것은 사전적이며 교과서적인 시론이 아니라
체험적이며 창조적인 시론이었다.
그들은 눈치 빠른 학생처럼 이런 물음에 대하여 적절한 답을
주었고, 그것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하나의 ‘체體’를
이루어, 수많은 답을 ‘용用’의 형태로 얻어낸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의 답을 다음과 같이 분석, 정리해본다.
2. 실체 없는 환영의 실상實相
몇몇 시인들은 시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렇다. 시는, 인생이 만져지는 실체가 아니듯, 손에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확연히 잡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디 시와 인생뿐일까?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실체없이 환영의 실상을 실체처럼
보이며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가진 시인들에게 시는 부재하는 존재이거나,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거나, ‘용用’의 작용을 위하여
‘체體’의 형태로 존재하는 상상적 중심일 뿐이다.
김행숙이, “시는 글쓰기의 ‘사건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태 속에서 움직인다.
‘쓴다’라는 행위 이전에 작품은 어디에도 없다”, “영원히
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으리라”라고 말했을 때,
이근배가 “나는 시를 모른다. 쉰 해 가까이 시인이라는
헛이름을 달고 품팔이를 해오고 있으면서 정작 시를
써보겠다고 붓을 들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나는 시를 만나본 일이 없다”고 말할 때, 시는
미지의 실체이고, 환영의 실체이며, 부재의 실체이다.
그러나 미지는 힘이 있고, 환영은 강인하고, 부재는
매혹적이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써왔듯이 앞으로도 쓸 것이다.
같은 문맥에서 손택수의 실체 환상론은 더욱 흥미롭다.
그는 “시라는 것이 ‘수평선’처럼, 멀찌감치 물러나서야
눈에 들어올 뿐, 다가갈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없는 그 한 줄의 수평선이 그에겐 시라는 실체로 보이고,
그 없는 한 줄의 수평선에 의지해서 그의 시쓰기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없는 그 한 줄의 수평선에 대한 이끌림으로
시를 쓴 손택수의 시작 행위는 소비인가, 탕진인가,
창조인가, 생산인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의미와 가치를 논하기 이전에 그의 시쓰기가 생명의
본능적인 지향성처럼 존재한다는 것이다.
손택수는, 더 나아가 이런 수평선에의 이끌림이 때로는
그리움을 넘어 무서움과 현기증까지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환영의 부름 앞으로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달려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런 한가운데서 생과 예술의 드높은 미학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이성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실체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시는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되, 천변만화의 표정으로
나를 맞아들인다”고 하면서, “(그) 시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항상 가슴이 설레고, 조금쯤은 흥분되거나 긴장하기 마련이다”
라고 말한다.
그에게 시라는 실체는 존경할 만한, 그러면서 변함없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곳을 향하여 의심 없이 달려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가 시인을 맞이하는 표정이 천변만화의
작용 속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의 시에 대한 실체적 인식이 진공眞空의 그것처럼
집착 없는 공의 세계와 같은 것이라면, 그는 이를 토대로 한
묘유妙有의 시적 작용 앞에서 흥분하고 놀라워하는 것이다.
이승훈의 ‘시제도론’은 또 다른 측면의 실체 부정론으로
그 의미가 크다.
그에게 시란 해석과, 역사와, 제도의 상대적이며 구성적인
산물일 뿐, 시라는 것의 본질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그는 현대시의 역사는 지금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승훈은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시사는 새로운 시론을
기다리고 있거니와, 그것은 본질이나 실체로서의 시론이라기
보다 오직 시에 대한 자의식이 남아 있다는 의미에서의
시론”이라고 한다.
과격한 시론이다. 그러나 본질주의와 환원주의의 절대성과
위험성을 넘어서는 데, 그의 과격한 입장은 유력하다.
그리고 시와의 거리두기 혹은 시의 객관화 작업에 있어서
이런 냉정성은 의미가 있다. 이것은 시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라, 시라고 믿는 것에 대한 맹목적 함몰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목소리이다.
유심론이니 유식론이니 하는 것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실체란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세계이다.
실체는 가변하는 현상이자 중심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환영일지라도 우리는 그 환영적 실체를
따라가거나, 만들어가거나, 의지해가면서 우리들의 불안정한
삶에 안정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가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실체란 말은 유무, 진위 등과 관계없이 그 자체
로서 생의 권태롭지 않은 건강한 전개를 위해 훌륭한 방편
으로 작용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방편을 잘 쓰는 자가 최고의 지혜를 가진 자라면, 실체란
말 역시 그런 지혜로운 자가 삶을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훌륭한 방편물인지 모른다.
3. ‘참나’와 ‘참너’에 대한 갈망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금방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진정한 시의 실체에 대한 갈망만큼 진정한 자아에 대한
갈망은 간절하고 영속적이다.
굳이 말한다면 시라는 실체를 부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라는 실체를 부정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저쪽에 있는 시와 달리, 이쪽에 있는 나는 지금, 여기에,
이렇듯 생생한 생명으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시에 대해 묻기 전에 나에 대해 묻는지
모른다. 아니 시에 대해 물으면서 나에 대한 물음을 동반
시키는지도 모른다. 이런 처사가 때로는 과도한 이기성과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고 힐난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들은 물론 시인까지도 나에 대한 관심은 집착에
가깝게 빈틈없다.
이번의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속에서도
이와 같은 점은 그대로 드러났다.
시인들의 ‘나’에 대한 관심과 갈망은 지속적이고 생생한
것이었다. 그것은 추상이 아니라 ‘물증이 있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나’라는 몸을 받고
태어난 존재로서, 그것이 생물학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우주적인 것이든 간에,
나의 발견과 표현과 보살핌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달자는 시를 “내 몸과 정신의 난타 공연”이자 “내 뼈
안에서 울리는 내재율”이라고 규정하였다.
최영철은 “말하고 싶어 쉴새없이 몸이 들썩였던 것”이라고
하였으며, 천양희는 “절망이 부양한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
이라고 하였고, 이선영은 “정신과 육체의 분비물의 총합”
이라고 하였으며, 신현정은 “존재 자체를 헐겁게 느슨하게”
하는 일이라고 하였고, 정일근은 “시는 나다”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신대철은 “몸 속에서 울부짖는 생명의 소리”
라고 하였으며, 김규동은 “가슴에 뭔가 이리도 넘쳐서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 찾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몸과 내면은 항상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다.
그 균형과 조화의 다른 이름이 평화요, 안정이요, 안심이다.
그러나 그 균형과 조화는 생명의 역동적 균형이자 조화
이기에 사실상 온전한 균형과 조화는 찰나의 일일 뿐이다.
우리는 이렇듯 늘 혼란스럽고 불안정하다.
넘치거나 모자라고, 느슨하거나 긴장돼 있고, 맺히거나
풀어져 있다.
그런 나, 그런 부족한 나를 진단하고, 보살피고, 다스리는
일의 일환이 시쓰기이다.
그렇게 볼 때 건강한 나를, 참다운 나를 창조하고 구축하는
일, 그런 일이 시쓰기의 한 근거이자 거점이다.
여기서 시는 표현론이 되고, 생명적 균형론이 되고,
치유론이 된다.
시와 진아眞我의 만남이란 문제에 있어서 김중식과
박남철의 말은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중식은 그의 시론에서 “한때 내게 시는 ‘끝까지 가는 것’
이었다. 그것만 ‘진짜’였고, 나머지는 다 ‘가짜’였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박남철은 “시는 먼 산을 바라보면서
사진 찍어서 잡지에 한번 발표해보기”라고 우회적 표현을
하며 시인의 자기노출성의 위험함을 경고하고 고발하였다.
김중식이 ‘참나’의 문제를 목전에 두고 사생결투하듯
자폐와 해탈의 극단으로 자신을 몰아붙이고자 한 일이나,
박남철이 시가 시인의 자기노출적인 호객행위로 전락하는
것을 시니컬하게 지탄한 일은 자아의 엄결성嚴潔性을
지키고자한 모습이다.
불순하지 않은 자아, 물들지 않은 자아, 휘둘리지 않는
자아, 그런 자아를 만나고, 지키고, 그런 자아의 속엣말을
경청하는 일의 소중함이 여기서 환기된다.
그러나 이런 엄결성은 일면 위험하다. 하지만 위험하기에
다른 면 숭고하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였던 김중식은 “드디어 극단적인 자폐도,
그렇다고 해탈도 아닌 자리를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그 자리란 무엇일까.
그것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표현을 직접 빌리면 “비루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시인들은 이런 삶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나라는
말 대신 나의 삶이라는 말을 혼용하여 쓰곤 하였다.
김기택의 “체험”론도, 오탁번의 “저녁연기”론도, 허영자의
“존재 확인”론도, 천양희의 “자작自作나무”론과 “내 전집全集”론
도, 노향림의 “삶 자체”론도, 유안진의 “신발론”도 모두
이런 맥락에 놓여 있다.
그런데 ‘참나’는 참다운 너를 필요로 한다.
나는 너로 인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참다운 너로 표상되는 사물, 세계, 대상, 객체, 만상 등과
같은 것들에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진아眞我와 짝을 이루는 진여眞汝의 세계였다.
그 진여의 세계는 호기심의 세계이고, 관음증을 유발시키는
세계이고, 발견의 기쁨을 무한으로 느끼게 하는 세계이다.
어찌 보면 레비나스의 타자성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또
달리 보면 나르시시즘의 다른 측면 같기도 한 참다운
너의 발견은, 시가 자기중심적인 노출이나 발설만이 아닌,
타자중심의 경청과 타자가 지닌 진실의 발견이라는 데로
나아가게 한다.
이건청은 시란 “우주의 무한천공에 펼쳐진 비교록秘敎錄
의 내용을 가능하면 더 많이 훔쳐내는 일”이라고 규정하였다.
쉽게 말하여 “최초의 사물”을 만나고자 한다는 것인데,
이런 그의 시론 속엔 사물에 대한 경외가 깃들어 있다.
사물이란 비교秘敎를 간직하고 있는 경전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가림은 이런 맥락에서 시란 “언어의 탄환으로 사물의
핵심, 또는 삶의 진실의 과녁을 정확히 꿰뚫는 행위”
라고 말하였다.
사물의 핵심이 있기는 한가. 마찬가지로 삶의 진실이
있기는 한가. 그러나 이런 물음은 의미가 없다.
시인이 있다면 그것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가림 역시 사물 편에 서서 진실을 발견하고자
한다.
박형준도 비슷한 입장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의 눈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곳에 함몰되었는가를
자각한다. 그러면서 너의 편에서, 사물이나 타자의 편에 서서
자신을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너와 나 사이에 깃드는 침묵의 생생한 자장에
눈길을 주어 보라고 당부한다. 내가 아닌 너에게로 시선을
양보하는 일, 그런 일로 인해 상호간에 깃드는 신성한
침묵을 보는 일, 그것이 시쓰기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나도, 너도 진실하지 않다.
그래서 굳이 진아니, 진여니 하는 수식이 붙은 말을 번거롭게
사용해야 한다.
시라는 것은 바로 이 진실하지 않은 나와 너를, 진실한 나와
너로 들어 올리고 피워내는 일, 그럼으로써 나의 삶과 너의
삶을 진실의 문맥 위에 놓이게 하고 그 위에서 싹트게 하는
일, 내가 나의 참된 삶을 살듯, 네가 너의 참된 삶을 살도록
기원하는 일, 그런 일이라고 이 장의 시론을 간추려 정리해
보면 어떨까 한다.
4. 일심一心과 일체一體의 순간에 대한 소망
일심과 일체는 소망의 세계이지 현실의 세계이기 어렵다.
그러나 간혹 주객이 하나가 되는 빛나는 일심과 일체의
순간이 찾아오고, 단절된 것들이 한 곳으로 이어지는
원융의 순간이 방문한다.
그 순간에 우리는 무한한 환희심에 빠진다.
여러 시인들은 이런 순간을 시적인 것으로, 시의 세계로
파악하였다.
이런 견해는 고전적인 시론의 일부 같지만, 우리는 그러한
구분 이전에 이야말로 시가 지닌 근본마음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김종길은 “깨달음”, “깨침”과 같은 말로 그 일심과 일체의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깨달음과 깨침은 대상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 그와 하나가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전인격적 통찰이자 지혜이다.
그는 이와 같은 깨달음과 깨침이야말로 시적 고양감에
이르는 부력이라고 한다.
깨달음과 깨침은 만개한 꽃으로 비유할 수도 있다.
사심 없이, 걸림 없이, 존재의 속을 환히 관觀할 수 있게
되면, 시인을 포함한 모두는 역시 황홀경, 전율, 감동, 환희심
등으로 부를 수 있는 최고조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문인수는 이런 사실을 “길은 식물의 물관부와 같은 것일까.
한참 빨려 들어가다보면 사람이, 사람의 영혼이 문득
새로 눈뜨거나 피어나는 데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런 자리에서 그는 잠시 서 있었다고 한다.
그 멈춤은 일심과 일체의 정지된 순간이다.
고두현 역시 이런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시를 가리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래 견딘 뿌리, 삶의
극점에서 단 한 번 피우는 꽃”이라고 표현한 그는
시적 순간의 틈 없는 만개를 보고 있는 것이다.
절정은 정지다. 그 절정에 이르기 위해 긴 예비의 시간이 있다.
그것을 발효의 시간이라고 하기도 하고, 견딤의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슨 말로 부르든 간에, 절정의 아랫도리는
깊고 튼실하다.
이런 순간을 김종해는 암호로 표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암호라 할지라도 그는 암호에 의해 누군가가
고스란히 감전되기를 소망한다.
김종해는 이런 암호의 비밀스런 내통, 은밀한 내통의 확장
과정, 내통과 확장 속에 끼어든 사랑이란 이름의 일심과
일체와 교감을 중시한다.
일심과 일체의 순간이란 제목 앞에서 정진규의 시론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앞의 논의 내용과 다소 다른 문맥에서, 그는 시의 일심성과
일체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시는 몸이다. 그것도 生體이다.
살아 있는 전일체이다. 아무런 유위법有爲法도 가해지지
않은 무위법無爲法으로서의 시, 그런 시의 생성을
그는 말하고 있다.
시가 무위법에 이를 때, 시는 인공을 떠난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생체가 된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생물인 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그의 시관은 시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낳아지는
것이라는 생물의 비유를 지속하게 만든다.
시는 여기서 고도의 미학이 마침내 우주율과 동행한다는
신비적 신명神明의 성질을 보이게 된다.
시는 비동일성의 시학에 머물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반드시 옳거나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의 심층에 내재한 동일성에의 꿈은 강력하고,
그 성감대가 울릴 때 사람들은 감동한다.
그런 점에서 일심과 일체는 영원한 시적, 인간적 화두이다.
그에 도달하여 크게 울고 싶은 것이 모든 존재의 소망이다.
5. 진언眞言에 대한 갈망
진언은 보통 주술적 언어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실한 말, 적실한 말, 울림과 감동이 있는
말, 존재의 핵심을 포획한 말 등과 같은 의미로 이 말을
평범하게 사용하고자 한다.
이번의 응답에서 시인들의 언어에 대한 관심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기존의 시론에서 시가 언어의 양식이라는 점을
크게 역설한 것에 비추어본다면, 이번에 시인들이 언어에
대해 보여준 관심은 다소 낮은 게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언어의식은 살펴볼 만하다.
다같이 언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시인마다 상당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호기는 시를 “언어적 구성물”로 규정한다.
이 규정 속의 ‘언어’라는 말도, ‘구성물’이라는 말도, 관심을
끈다. 하지만, 언어도, 구성도, 인공이기에, 그는 언어의
질서를 버리고, 구성의 질서를 버리고 시라는 실재에 합치하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그때 그는 몸의 질서로 언어와 구성의 질서를 보충한다.
여기서 몸의 질서는 인공의 언어를 진언으로 만드는
육성의 숨결이다.
그렇다면 육성과 문화적 언어가 만나는 자리, 그 자리가
그에겐 시이다.
허만하의 시론도 흥미롭다.
그는 시를 가리켜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언어실천”이라고 한다.
결국 시란 그 방법으로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드러내기 위한 고도의 화법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그 무엇을 말하려고
하기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드러낼
수 없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허만하의 이어지는 글을 보면 그것은 절대자유의, 자존의
절벽 같은 세계이다.
이 세계는 그에게 신성하다.
그것은 진실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화법으로서의 언어는
진언이다.
조정권이 시의 언어를 사유 이전이거나 사유 이후의
“심득心得된 말”로 규정한 것, 김종해가 시어를 밀실의
암호 같은 존재라고 규정한 것, 이승하가 시어를
극점의 언어이자 극한의 언어라고 고백한 것, 이 모든
것은 다 언어의 절대성 혹은 절대적 언어에 대한 갈망을
전달한 것이다.
도저히 다른 것으로 교체될 수 없는 언어, 비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언어, 틈 없는 몸의 언어, 그런 언어를
그들은 시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언희의 언어관과 장석주의 언어관은 독특하다.
김언희는 숟가락과 같은 언어로 단지가 표상하는 대상과
우주의 무한성을 겨우 가리거나 가리키는 것이
시쓰기라 말하고, 장석주는 거대한 부재의 권태를 견디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안간힘이 문자(언어)를 동원하는 까닭
이라고 한다.
이들 시인에게 언어는 한계의 산물이고, 이승의 어쩔 수
없는 행위이다. 그렇더라도 그들 역시 그들의 언어가
진언이 되기를 소망하는 꿈만은 동일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헛된 반복을, 그것이 비록 다른 반복
이라 할지라도, 그토록 오랫동안 계속할 수는 없을
터이니까 말이다.
한편 이수익은 직접 언어라는 말을 시론에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시어가 관념화와 추상화를 넘어 “너무나도
확실한 물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물증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세계이다.
그때 언어는 물질과 한 몸이 된다. 그리고 존재와 언어
사이에 틈이 없어진다.
소위 언어의 물화작용이 철저하게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실상實相의 언어라고 부르면 안 될까?
실상은 진언으로써만 가까스로 다가갈 수 있는 진공眞空의
세계이다.
6. 글을 마치며
이번의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들의 견해를 살펴
봄으로써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먼저 그들에게 시는 텍스트로 대상화되기 이전에 그들의
삶 자체였고, 인생 그 자체였다.
그것은 문화 이전의 생물학적 육성이나 활동과 같은 것
이었으며, 그들의 온전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절실한
행위이자 생생한 행위였다.
둘째로, 그들은 기존 시론의 대부분을 이루어 온 이른바
분석시론의 영향권에서 거의 벗어나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비유니, 이미지니, 리듬이니, 문체니,
기승전결이니 하는 메마른 수사학적 기법을 역설하지
않았다. 그들이 언어를 비롯한 수사학을 언급한다면
그것은 삶과 몸과 생명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로, 그들은 시에 대한 자부심을 여전히 크게 지니고
있었다.
시인됨을, 시쓰기를, 시라는 존재를 드높은 인간문화의
양식으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재무가 시인은 금기와 싸우는 자라고 규정한 것,
김광규가 시를 도구화에 항의하는 마지막 노래라고 규정한
것, 허만하가 인간은 시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짐승과
구별될 수 있었다고 말한 것 등은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넷째로, 그들은 여전히 이상주의자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들은 지예至藝가 지도至道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꿈을 갖고 있었고, 그들의 시적 선택을 비장하게 여기는
고전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나태주가 시는 “시인이 선택한 가시면류관”이라고 하였을 때,
이런 점은 극에 달한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시는 교훈적이거나 계몽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시의 교훈성과 계몽성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대화나 고백의 자세를 취하였다.
역시 그들은 경직된 사회성과 역사성도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가 그만의 자율성을 버리고 외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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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구
서울대학교 국문과 석사, 박사학위
1985년 《한국문학》에 문학평론으로 등단.
저서
'존재의 전환을 위하여'
'시와 젊음'
'몽상의 시학: 90년대 시인들'
'시 읽는 기쁨' 등
현재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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