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좋은 詩 모음

벼랑에 매달려 쓴 시 /정호승

취몽인 2018. 2. 24. 13:48

벼랑에 매달려 쓴 시 / 정호승

 

 

이대로 나를 떨어뜨려다오

죽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으므로

단 한사람을 위해서라도 기어이

살아야 하므로

벼랑이여

나를 떨어뜨리기 전에 잠시 찬란하게

저녁놀이 지게 해다오

저녁놀 사이로 새 한마리 날아가다가

사정없이 내 눈을 쪼아 먹게 해다오

눈물도 없이 너를 사랑한 풍경들

결코 바라보고 싶지 않았으나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던

아름다우나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내 사랑하는 인간의 죄 많은 풍경들

모조리 다 쪼아 먹으면

그대로 나를 툭 떨어뜨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