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입 속의 푸른 잎 / 기형도

취몽인 2021. 9. 2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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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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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 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 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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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유명한 이 시집을 이전에 읽었는 지 기억이 없다. 시집을 샀는 지도 기억이 없다. 어쨌든 집에는 없으니 사서 읽었다.

詩들은 대부분 낯이 익다. 시집에서 읽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해도 세상에는 그의 詩가 많으니 어느 때 어느 곳에서 한편씩 읽었을 수도 있다.

나보다 두 살 위, 친한 선배들의 친구인 시인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유명하다. 요절해서 본인 대신 그 바닥의 대가가 대신 엮어줬다는 이 시집만큼 유명세를 탄 시집도 별로 없을 것이다.

눈곱만큼 詩를 헤아릴 안목이 생긴 이 즈음에 기형도를 찬찬히 다시 읽는 일은 앞서의 이런저런 서사와 뒤엉켜 쉽지 않았다.

정답을 알고 있는 시험지를 받은 느낌.

그렇지만 이 지독한 좌절의 詩들은 깊은 그의 눈매처럼 검다. 희망이나 삶을 철저히 지우는, 그저 사라지기 위해 살아간 젊은 시인의 소멸일기는 세간의 평과 다르지 않다.

위의 詩는 그나마 희망을 이야기 한다. 문득문득 울리는 줄 끊어진 기타의 노래.
희망은 시인을 놀라게 한다. 희망이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먼지 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바뀌지 않는 푸른색은
희망일까 절망일까?

어느 새벽,
기타를 파는 낙원상가 극장에서
바뀌지 않는 색깔만 남기고 시인은 가버렸고

물어볼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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