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15일(금) 한양대학교 특강
체험적 시론詩論과 불교적 사유
최승헌
시에 대해
내 뼈 같은, 그러나 낯선 정신의 공허
앓을 대로 앓아 안에서부터 투명해진 환자의 눈을 본적이 있는지...
그 퀭한 눈빛은 공허할지라도 속됨이 없으며 맑고 투명하기까지 하다. 고요함의 기쁨을 느끼는 자만이
바쁘게 사느라 정신을 소모시킨 공허함을 아는 것처럼 고통의 극치까지 가 본 사람은 더 이상의 절망이나
슬픔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의지가 있다.
무애도인처럼 초연한 마음의 고요 속에 있다는 것은 가슴속 먼지도 찌꺼기도 다 비워낸 무념의 상태를 말한다.
이런 마음의 여여함은 시적 사유를 깊게하며 또 시작詩作의 견고한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있다. 시가 아무리 상상력을 동반한다 해도 시를 쓰는데 있어 예술적 사유이건 분석적 사유이건 사유를 통해 사물과 대상의 근본을 깨닫고 깊은 상념의 우물을 길어 올린다는 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정신의 기름을 짜고 또 짜야 겨우 건지는 한 줄의 글이 얼마나 자신의 뼈를 깎고 정신을 도려내는지 시인들은
알 것이다. 또 그 한 줄을 위해 온 몸의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시는 두려움이고, 긴장의 연속이다.
시인은 사물의 구석구석까지 온몸으로 느끼고 체험함으로서 더 단단한 시를 쓸 수 있는 것이기에 정신의 체험
을 통한 사유의 폭을 넓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느껴보지 않고 빠져보지 않으면 진솔한 시를 쓸 수
가 없다. 그러므로 시는 언어의 함축을 통해 탄생된 최고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아무 열정도 없이 밥벌레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술의 그 어느 것도 느낄 수 가 없다.
시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통한 체험적 언어의 표현이기 때문에 먼저 쓰지 않고는 시를 알기 어렵다.
그런데 어떻게 쓸 것인가? 이것은 시가 시인에게 요구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쓰겠다고 하니까 어떻게 쓸 것인
가 묻고 있는 것이다.
사물의 묘사를 그대로 옮긴 것을 시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시의 소재로서 사물은 어디까지나 소재일 뿐,
그대로는 아직 시라 할 수 없다. 나는 시는 시적대상으로부터의 울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사물에 대한 느낌만으로 시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이것이 수필과 시의 차이다.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동은 울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강의 주제는 체험적 시론과 불교적 사유이다. 불교사상이 내 시에 미치는 영향을 말하자
면 우선 불교의 기본적인 사상과 불교가 시에 미치는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간단하게나마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깨달음)을 믿고 실천하는 종교이다.
부처님은 세상의 진리를 먼저 깨달은 분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불교는 자신의 미혹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교는 본성을 찾아가는 길이다.
진리를 깨닫고 사는 삶은 자유롭고 행복하지 않겠는가.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마음에 있는 불성佛性
을 깨쳐 자신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불교의 기본 사상은 연기법緣起法이다.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게 서로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연이란 것이 없다.
태어나는 것도 우연이 아니고, 자신의 주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것이다.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세상은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하며 서로의 상관관계에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는 것이다.
연기법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불변의 법칙이다. 그러니 인연 없는 만남이 어디 있으며 인연 없는 결과
가 어디 있겠는가. 이 연기사상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중도사상이다. 연기와 중도를 이해하지 않고는 불교를 알
기 어렵다.
양 극단을 떠난 중도사상中道思想
중도는 극단을 떠난 바른 길을 말한다. 두 가지 극단적인 것을 합쳐서 나눈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양면
을 떠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도리를 말하며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道에 바탕 한 사상
을 말한다. 즉, 유有와 무無 어느 혹은 고苦와 낙樂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양쪽을 떠난 올바른 진리
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중도사상인 것이다.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극단을 떠난 조화로운 관계를 말한다고 할 수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도 이
중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서로 내가 제일이고 최고라는 생각으로 어떻게 타인에 대한 자비가 생기겠는가.
불교의 모든 이론과 실천적 수행修行은 모두 중도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이 중도 사상은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어 신 후 녹야원鹿野園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말씀하시
길 "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고행苦行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향락의 길이다 " 고 하셨다.
진리의 길이란 고행이나 향락 어느 곳에도 기울지 않는 중도적 실천이나 수행을 말하며 이 중도의 수행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구분되어 진다.
삼학이란 불교의 목적인 열반의 세계에 도달 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배워서 행하여야 할 세 가지 필요한
일을 말한다. 삼학을 배우면서 차례로 집착이 떨어지고 번뇌로부터 해탈의 시기가 오는 것이다.
그래서 삼학은 지계청정持戒淸淨에서 출발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고 일정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서 참된 지혜가
개발되어 의혹을 깨트리고 열반涅槃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1. 계학戒學
신(身)구(口)의(意) 삼업으로 악을 짓지 말고 잘 수행해서 사람이나 물질을 대함에 있어서 해(害)를 끼치지 말
고 자신이 스스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일상생활에서 악을 짓지 말고 선한 것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정학定學
마음의 동요를 잠재우고 욕(欲)과 악(惡)을 여의어서 하나의 대상에다 마음을 집중시켜 흐트러짐 없는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를 나타낸다.
3. 혜학慧學
번뇌를 없애고 참된 지혜를 연구해서 진실의 세계를 그대로 관찰 할 수 있는 마음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불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인정하는 신념체계이다.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모두 깨달
음을 본래로부터 갖고 태어난 것이다. 자연을 차단하는 삶이란 우리의 생기를 죽이는 것임을 실감한다.
불교에서 일체의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다고 했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철학자 헤라클리토스는
‘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가 없다. 두 번째 들어갈 때 이미 그 물은 흘러가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 우주의 모든 생성하는 것은 변화하고 있는 진행형이다. 그러니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다 멸하고 마는 이치다. 무명에 가려진 마음은 이런 허무한 인생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천년만년 사는 것처럼 생각하여 탐진치 삼독에 빠져 번뇌 망상을 끌고 다니는 것이다. 깨끗한 땅을 정토라하는데 이는 곧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이 소멸된 자
리를 말한다.
우리 인간은 나고 죽는 생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 백년도 못사는 인생살이에서 인간은 천년의 근심을
갖고 산다. 그 만큼 욕망으로 가득 찬 생을 사는 것이다.
불교는 이렇게 허무한 인생이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염세에 빠져 허무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허무한 인생의 도리를 깨달아 바른 행을 하며 또 선업을 행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생사生死란 나고 죽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마음속에서 일어난 번뇌를 생이라 하고
그 번뇌가 소멸된 것을 사死혹은 멸滅이라고 한다.
중생(모든 생명 있는 것의 통칭)은 육도六道(지옥, 아귀, 축생, 천상, 인간, 아수라)를 윤회하며 자기가 지은
업業대로 사는 것이다. 극락세계는 이 육도윤회를 벗어나 있다. 그래서 집착을 버리면 온 세상 모든 사물이
투명하고 맑게 보인다.
108번뇌
우리는 번뇌 망상을 벗어남으로서 정토에 날 수 있는 것이다. 과학문명이 덜 발달된 예전보다 오히려 현대인
들이 고민이 더 많다. 인간은 육신이 편할수록 정신적 공허가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인간이 갖고
있는 번뇌를 불교에서는 왜 108번뇌라 했을까?
우선 주관은 객관을 만나면 어떤 것을 인식하게 되어있다. 설명하자면
주관 : 안,이,비,설,신,의 ( 육근 六 根 )
객관 : 색,성,향,미,촉,법<법: 생각의 모든대상>( 육경 六 境 )
6근이 6경을 대하면 좋다, 나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하는 3가지 감각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좋은 데서는 즐거움을 느끼고 나쁜데서는 괴로움을 느끼며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데서는 즐겁지
도 괴롭지도 않는 감정을 느끼는데 이것을 불고불락不苦不樂이라 한다.
이렇게 6근은 각각 여섯 가지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36종류(6x6=36)가 된다.
6근 x 6경= 36(과거,현재,미래) x 3=108 <108번뇌> 모든 중생의 감정은 108종류에 속한다.
불교와 시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은 불교 공부를 해 보라고 권한다. 신앙적 차원의 접근이 아니더라도 철학적 차원으로라도
접근해서 공부하다보면 시를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는 종교이면서도 형이상학적 사유의 폭
이 넓고 깊다.
그것은 절대신의 가치를 믿고 따르는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통찰하여 본성을 깨닫고 자신의 내면을 관
조하는 사유의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음의 평정을 찾는 선을 통해서 사유의 폭이 깊어진다.
선은 모든 무명으로 인해 일으킨 가짜 자기의 속박을 벗어나 본래 면목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것이 대 자유의 마음을 갖게 한다. 왜냐면 선의 수행법을 통해 우주만유의 모든 사물을 원점에서 관찰하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선은 깨달음을 통한 사물의 직관력 이외에도 가치관의 내적인 혁신을 통해서 자아를 확립하고 주체적 인간이
되며 자타가 둘이 아닌 훈련이 이루어진다. 이것을 통해 소아적 생각에서 벗어나 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시를 쓰는데 있어 무상무념無常無念의 상태는 큰 도움이 된다. 말하자면 선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깊은
사유와 대 자유인의 마음은 사물을 좀 더 깊고, 넓게 보게 한다. 이 체험이야말로 탄탄하고 깊이 있는
시를 건져 올릴 것이다.
나는 시가 극단적인 주관의 산물인데다 난해성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기에 선을 통해 접근하는 사물의 통찰력
은 내적 성찰을 빛나게 한다고 믿는다.시에서 기교도 무시는 못한다지만 요즘 젊은 신인들의 시는 놀랍도록
세련되고 실험적이다. 현대 예술은 모든 장르를 불문하고 실험정신이 강한 것 같다. 물론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예술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정신을 채워주는 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현대시문학사에서 불교의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일찌기 신라의 향가부터 시조문학에 이르기
까지 우리 문학의 전통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한용운, 공초, 서정주, 조지훈, 고은 등의 시에서 불
교의 정신세계가 깃든 작품을 많이 있으며 또 스님들께서 열반하시면서 남긴 오도송도 시로 볼 수 있기 때문
이다.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인간중심인 종교, 즉 인본
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人本主義와 신본주의神本主義는 그 생성과정에서부터 전혀 다른 사상
으로 출발한다.
불교가 깨달음을 통하여 인간이 갖고 있는 고통을 해결하여 해탈을 얻고자 하는 것이나 시가 언어라는 매개
체를 통하여 시적 구조로 인간의 삶을 다루거나 정화하는 것은 시와 불교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한다.
그것은 불교가 고의 실체를 인식하고 고의 해결을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실존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며 시 또한 이 범주에 속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을 떠난 종교나 문학은 별 의미를 못 느낀다.
내세에 혹은 그 다음 생에 체험하기위해 찾는 종교나 문학이라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진실로 시를 쓰고 싶다면 시를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시의 테러리스트가 되는 그날까지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란다.
J.S. Bach 무반주 바이.. - Allemanda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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