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시인 한 분이 말씀하시길 신춘문예 당선작들은 일정의 프레임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문예지 신인상과는 다른,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 수천편의 응모작 중 기본 요건으로 생각하는
틀이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그 시인은 공모전 당선작들을 수 없이 읽어보면서 이런 틀을
발견했고 실제 그 틀을 적용시켜 수 많은 대학 공모전을 휩쓴 전설적 이력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도입과 전개 귀결을 짓는 시적 구조일 수도 있을 것이고 시어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인데
프레임이란 개념을 굳이 말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기본적인 짜임새를 말하는 것 같다.
아래 시 두 편은 그 시인이 예를 든, 프레임을 갖춘 당선작이라고 한다.
시인의 지적에 따르면 시적 완성도는 부족하지만 모범답안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데
사실 난 아직 잘 모르겠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 탐색해보시길...
술빵 냄새의 시간 /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 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끄억 베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오늘의 운세 /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몸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 유병록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 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고자 날개를 퍼득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되다니!
목 아래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다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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