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화원
지겨울 만큼 많이 언급되어온 것이지만, 지금 '시'라는 장르가 처한 상황은 역설적이다. 요약하면 대개 이렇다. 문화의 머나먼 변방인데도,
이 변방의 거류민들은 넘쳐난다. 아무도 읽지 않지만, 누구나 쓴다. 이런 상황은 확실히 좀 '이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극복해야 할 문제'인 것은 아니다.
아마 두 가지 인식이 가능할 것 같다. 하나는 '예언자'로서의 시인이 아니라 '동호인'으로서의 시인을 긍정하는 것이다.
동호회로서의 '시단'은 나쁜 것인가? '시의 위의(威儀)'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시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19세기적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수많은 장미들, 천변만화하는 장미들을 키우는 시의 화원은, 이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여기저기에서, 자기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정신적 잠수함'의 토끼 노릇을 해내는 것이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다른 하나는 자유로움이다. 변방의 세계는 이미지와 서사와 규모와 집단작업이 장악한 저 중원의 세계보다 더 자유롭고,
더 포터블하고, 더 이동가능하며, 그래서 더 첨예해질 수 있다. 시가 쉬워지면 대중이 시를 읽을 것이라는 추측은 착각이다.
문제는 장르의 '매력'이지 '난해함'이나 '쉬움'이 아니다. 덧붙여야 할 각주가 많은 말이지만, 역설적으로 시는 더 '전문화'되어야 한다.
이건 '프로페셔널한 동호인'이라는 이상한 모순어법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풍으로 말하면 '시의 오타쿠' 같은 것도 괜찮지 않은가.
지극히 탈사회적이며 탈권위적인 방식으로, 그저 제가 하는 짓에 한없이 민감한 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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