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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無償의, 無常의, 無想의, 無上의 놀이 / 김언희 시인 대담

취몽인 2014. 8. 22. 13:26

 



無償의, 無常의, 無想의, 無上의 놀이

 김언희 / 김남호 대담




[김남호] 선생님께서는 1989년에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셔서 1995년에 첫시집 『트렁크』를, 2000년에 두 번째 시집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를, 2005년에 세 번째 시집 『뜻밖의 대답』을 정확히 5년 터울로 내셨습니다. 우리 시단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적나라한 이미지와 금기어로 인해 그동안 선생님의 시는 “우리 시단에 하나의 새로운 미적 충격”(이승훈), “도살장의 언어”(최승호), “시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강간”(김정란), “천박한 자본주의”(엄경희)등으로 평가받으며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아 왔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바라보는 세간의 이런 시각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언희] 다양한 반응과 다양한 시각을 촉발하고, 다양하게 해석되는/재창조되는 텍스트야 말로 창조적인 텍스트라고 읽었지만, 제 시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말일는지..... 선택의 여지나 대체의 여지가 없는 것에 대해서라면 비난이건 찬사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김남호] 앞의 질문에 대한 보충 질문이 되겠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접한 독자들은 대개 예외 없이 ‘엽기’나 ‘그로테스크’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어느 사석에서 어떤 시인이 선생님을 두고 “(틀림없이) 김언희 시인은 성장과정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비단 그 시인뿐만 아니라 저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은 선생님의 ‘충격적일 과거’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유년시절이나 사춘기에 특별한 상처의 경험이 있었거나 세계를 ‘정상적’으로 볼 수 없게 한 어떤 종류의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었는지요?


[김언희] 상처 없는 삶이 있겠어요? 다만 그 상처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문제겠지요. 똑같이 뺨 한대를 맞아도 훌훌 떨치고 잊을 수 있는 대범한 사람이 있고, 뺨 한대의 고통보다 그 치욕감 때문에 평생 살을 떠는 사람도 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이 체험과 감정의 직접적인 표백은 아니지요. 작품과 작가 사이에는 비인간적인 거리가 있어야 해요. 정서의 개입과 감정의 관여가 제어된. 작품으로 표현된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에도 이 거리가 있어야 하고요. 좋은 작품이란 이 거리두기, 개인감정의 요소를 제거한 거리 조절에 성공한 작품들이죠.


[김남호] 선생님의 시는 상상력의 극단, 언어의 극단, 표현의 극단을 향해서 어떠한 퇴로나 알리바이도 마련해 두시지 않고 지금까지 밀고 나오셨습니다. 그런 탓에 기존의 인식과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독자나 문단의 몰이해와 편견으로부터 무수한 공격을 받으셨을 텐데, 이토록 고단하고 고적한 싸움을 버티게 해준 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언희] .............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 밖으로 눈을 돌리고, 긴 침묵 끝에) 시 자체의 동력이라고 해 두십시다.


[김남호] 불쾌한, 추잡한, 요망한, 혐오스러운, 메스꺼운, 노골적인, 거침없는, 더러운, 지긋지긋한, 끔찍한, 기괴한....이것들은 선생님의 시를 규정짓는 수식어들입니다. 아마도 우리말에 이보다 더 부정적인 형용사가 있다면 주저 없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시가 다른 시인들의 시와 구분되는 가장 일차적이면도 결정적인 점이 바로 이 상식을 뒤엎는 언어 구사에 있을 것입니다. 시도 대화의 한 방식이고 소통의 특별한 수단이라는 큰 전제에서 본다면, 시에 있어서 언어의 선택은 시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굳이 이런 극단적인 언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언희] 그것이 존재의 진짜 이름이기 때문이지요. 불쾌하고, 추잡하고, 요망하고, 혐오스럽고, 메스껍고, 노골적이고, 거침없고, 더럽고, 지긋지긋하고, 끔찍하고, 기괴한세계를 포착하는 언어가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세계의 절대성과 신성성을 부정하고 그것에 파열과 유출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그 절대성과 신성성에 대적할 만한 언어가 필요하지요. 언어의 선택이 결국 세계관의 선택이기도 하고요.


[김남호] 앞의 질문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선생님의 시에서 구사되는 문체(언술의 방식)를 짚고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 시의 엽기성은 당연히 언어 선택의 기괴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언어를 결합하는 방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선생님으로 하여금 이런 극단의 스타일로 시적 정체성을 삼게 하는 미학적 배후는 무엇인지 여쭈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언희] 제 시형식의 ‘불구성’에 대한 질문이시군요. 그 불구성은 자아의 불구성, 세계의 불구성을 표현하는 시적 전략이지요. 정상적인 통사법으로부터의 고의적인 이탈이고, 진술의 완결성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예요. 저는 시적 형식이 곧 시적 내용이라고 생각해요. 스타카토로 끊어지는 문장의 병치는 시를 파편의 집합으로 만들지요. 그것은 총체성의 실현이 불가능한, 파편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세계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며, 파편화되고 단절된 자아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지요. 굳이 미학적 배후라면 소위 데포르마시옹 문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김남호] 선생님의 시를 말하면서 육체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처음부터 괄호 쳐진 채 난자당한 육체의 파편만 괴기스럽게 드러납니다. 훼손된 육체는 끈적거리고 미끈거리는 분비물과 배설물로 뒤덮여서 공포감과 불쾌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시를 두고 ‘앱젝션의 상상력’, ‘추의 미학’이라고까지 명명할 정도입니다. 이렇듯 사물화 되고 훼손된 육체를 전면에 내세워서 혐오와 불쾌, 공포를 조장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김언희] 무엇보다 세계는 몸뚱어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인간에게 몸만큼 감각의 직접성을 체현하는 장소는 없기 때문이고요. 훼손된 육체는 훼손된 세계에 다름 아니지요. 훼손된 육체는 해체되고 뒤틀리고 찢어진 세계의 물증이에요. 똥오줌이나 체액 같은 불쾌한 존재의 물질성은 즉각적이고 생생한 육체적 실제성으로 해서 독자를 현실의 참혹한 리얼리티와 대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지요. 제 시가 주는 혐오와 불쾌, 공포의 강도는 바로 세계로부터 우리가 받아온 억압의 강도이기도 하지요.


[김남호] 저는 선생님 시의 독특한 개성은 잔혹함 속의 경쾌함에 있다고 봅니다. 비유컨대 먹잇감을 향해 접근해가는 고양잇과 동물들처럼 단단하게 뭉쳐진 살기가 사뿐사뿐 걸어가는 형국이지요. 엄경희는 선생님의 시에서 “그로테스크의 핵심이 되는 유머와 그 유머가 생성시키는 탄력의 묘미가 결여되어 있다.”(엄경희 평론집, 『빙벽의 언어』)고 했습니다만, 제 입장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선생님 시의 그로테스크는 잔혹함을 떠받치고 있는 단아한 형식과 경쾌한 리듬, 웃음이 배어나는 블랙유머에 의해 완성된다고 봅니다. 마치 컬트영화를 보는 느낌이거든요. 이 점에 대해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님 시의 그 독특한 리듬은 어디서 비롯된다고 보시는지요?


[김언희] 제게 시는 언어 이전의 어떤 율동, 리듬이라고 느껴져요.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느껴져요. 논리적 판단 이전의 즉각적인 반응 또는 감응 같은 것이죠. 반복이 가져오는 리듬이나 주술성과는 별개의 것으로요. 그런데 이 리듬이 통제 불능이면서 언어를 내파하려 들지요. 끊임없이 언어를 부정하고 해체하려고 하지요. 제 시는 이 리듬과 언어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낳아요........ 역부족이군요(웃음). 천상 이재복선생의 평론 한 구절을 인용할 수밖에 없겠군요.

“상징계에 의해 추방된 몸이 귀환하면서 그녀의 텍스트는 안정과 연속성을 토대로 하는 상징계적인 질서 체계가 해체되고, 불안정과 불연속적인 율동과 리듬이 지배하는 기호계적인 코라의 세계로 드러난다. 그녀의 언어는 엄밀히 말해서 하나의 단어도 아니고 음절도 아닌, 그렇다고 단순한 박자나 운율로 환원되지도 않는 마치 생명의 숨결 같은 신체감각적 율동과 리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김남호] 어느 잡지인지 기억이 흐릿합니다만, 몇 년 전 어느 짤막한 산문에서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독자는 내 시의 살인적인 음란함에 놀라고, 내 시는 독자의 살인적인 음란함에 놀란다. 독자는 놀라는 척하고 내 시는 정말로 놀란다.” 이 진술에 의하면 선생님 시의 음란함은 시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무의식에서 기인한다는 뜻일 터입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선생님 시의 시작원리 내지는 선생님의 시관(詩觀)을 엿본 느낌이었습니다. 약간 추상적인 질문이긴 합니다만,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시란 무엇입니까?


[김언희] ‘놀이’지요, 無償의, 無常의, 無想의, 無上의 놀이 ..... 시는 내가 쓸 때 쓰여지는 무엇이 아니고, 종이 위에 인쇄되어져 있는 무엇이 아니고, 독자가 읽을 때 바로 그때 발생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교리문답 같은 대답이군요(웃음). 시는 일종의 거울이죠. 궁극적으로 독자가 보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얼굴이에요.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죠. 특히 그 거울이 타협도 회피도 왜곡도 없는, 가차없는 거울일 경우에는 .....


[김남호]선생님 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선생님 시를 관통하는 주된 정신의 하나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합니다. 아마 시인이 여성이고 시가 억압이나 권위, 폭력에 대해 저항성, 해체성, 부정성을 강하게 내비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난 2000년 남진우와 논쟁을 벌였던 김정란의 평가가 그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란은 선생님의 시를 두고“남성을 대신해서 기꺼이 여성의 육체를 난도질해서 구경시켜주고, 그 몫을 문학적으로 챙기는” 문학적 매춘으로 보았지요. 페미니즘과는 정반대의 관점과 논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엄경희는 “인간의 육체가 지닌 아름다움을 철저히 배제한 채 구강, 항문, 성기만으로 인간의 신체를 축소시킴으로써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비천한 영역에 감금시킨”천박한 자본주의로 평가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시가 거느리는 사회적 맥락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김언희] 저는 제 시의 대(對)사회적 면모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시는 시일 뿐 아무것도 아니지요. 저는 제 시가 모든 이즘/이념과 모든 맥락/체계 밖에 있기를 원해요. 오로지 끝없는 탈주의 선상에 있기를 바랄 뿐이지요. 언급하신 해석들에 대한 제 견해라면, 시란 존재론적 의미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과연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 라는 것이 있기나 할는지 ...... 존재에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지 ..... 만약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천하고도 비참한 것일 거예요. 차라리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 나을 만치.

인간은 구강, 항문, 성기로 된 존재예요. 존재론적 의미 같은 것은 인간이 자기기만으로 구축해 놓은 허구에 지나지 않아요. 인간은 94%의 붉은 원숭이에 6%의 허구로 짜깁기된 존재예요. 그러나 이 6%조차도 구강, 항문, 성기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나는 그것들을 존재의 비천한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존재의 물적 토대라고 생각하지요.


[김남호] 그동안 선생님의 시세계는 꽤 다각도로 연구와 분석이 진행되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의 학위논문에서 각종 문예지의 평론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의 작품은 어떤 형식의 전범으로 혹은 반례로 ‘자신들의 논지를 펼치기에 적합한’ 텍스트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시적 관점에서 선생님 시의 형식적 변화를 탐색한 글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첫시집부터 두 번째 시집의 앞부분까지는 대체로 극적(劇的) 상황을 가진 탄탄한 의미구조를 보이다가 두 번째 시집 중․후반부(특히 「가족극장」연작)에서는 기존의 권위를 조롱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시집에서는 이미지의 파편이나 보어가 생략된 채 용언 중심의 병치, 환유를 통해 무의미시(따라서 ‘난해시’)의 전형을 보인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특히 세 번째 시집 3부에 실린 시들은 한결같이 시의 첫 구절 몇 마디로 시의 제목을 삼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서 저는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최근의 시가 어떤 메시지를 형성하거나 어떤 의미로 환원되는 것을 시인이 철저히 거부(혹은 차단)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러한 시적 형식이나 미학적 전략의 미세한 변화는 선생님의 시가 지향하고 있는 방향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김언희] 아마도 그렇거나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으며, 미리 장담할 수 있겠어요. 쓰기 전에는 무엇을 쓰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시 아닐까요? 어떤 미학적 전략이 먼저 있고, 전략에 따라 시가 쓰여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또 미학적 전략이 없는 시가 어떻게 시일 수 있겠는지 ..... 늘 말하고 있는 바 그 자체보다는 그것 을 말하는 방식이 전부라는 생각을 해왔는데, 요즈음에는 그 ‘방식’이라는 것의 배후 도 궁금하고, 스타일상의 장치는 기피의 기술이기도 하다는, 그리고 그것으로부터도 탈 주해야 하지 않을까 ..... 생각 중이에요.


[김남호] 최근 들어 선생님의 시세계(형식에 상응하는 내용적 측면)의 통시적 변화를 정밀하게 탐색한 평론가로는 문혜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기존의 두 시집 『트렁크』, 『말라죽은 앵두나무...』와 올해 나온 시집 『뜻밖의 대답』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전시하는 육체에서 전시된 육체로, 바라보는 구멍에서 내 몸의 구멍으로’시가 옮겨 앉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를 근거로 문혜원은 시인의 위독함을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고지하고 있습니다.

“시가 썩은 세상을 향해 던지는 조롱과 야유가 아니라 스스로를 향해 돌려지는 질문이라면, 시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제 김언희는 문학적 삶의 클라이막스이자 전환점에 이른 듯하다. (...) 썩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돌아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긴박하고 위독해보인다.”(『오늘의 문예비평』2005년 가을호)

선생님께서는 문혜원의 이런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실제로 ‘클라이막스이자 전환점’에 이른 듯한 어떤 위기감을 느끼고 계신지요?


[김언희] 모든 시는 한 편 한 편이 클라이막스이고, 한 편 한 편이 전환점이어야 한다는 게 제 관점이에요. 제 시집 세 권에 실린 시편들은 모두 실패한 클라이막스들이고, 실패한 전환점들이지요. 고작 시집 세 권으로 ‘문학적 삶의 클라이막스’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실패함으로써 늘 지연되는 것이 클라이막스라면 제 실패의 노정은 아직 멀고도 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떤 위기감’이야말로 일용할 양식이 아닌가요. ........ 시인에게는. 더 넘치고, 더 벗어난, 더 극단적이고, 더 무절제하고, 더 무책임한 시를 쓰고 싶어요. 그리고 실패 자체를 즐기고 싶어요.



[김남호] 선생님께서는 첫시집 『트렁크』의 서문에서 “길들일 수 없는 짐승. 밤보다 더 검은 놈. 배반의 명수. 내 고양이는 주인을 선택한다. 이 시편들 역시 독자를 선택할 것이다.”라고 매우 도발적인 어조로 선생님 시의 차별화를 선언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은 독자들의 구미에 자신을 맞추는 대중성 지향을 단호히 거부하고, 아방가르드적 정신으로 시를 밀고 가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을 텐데요. 그 첫시집을 상자한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선언은 여전히 유효합니까? 그리고 그동안 차별화된 독자의 확보에 성공했다고 보시는지요?


[김언희]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동시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요. 첫 시집은 4쇄가, 두 번째 시집은 3쇄가 나온 걸로 알고 있어요. 수잔 손탁의 말을 짤막하게 인용해 보자면, 예술은 유혹이지 강간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유형의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나 예술은 체험 주체의 공모 없이는 유혹에 성공할 수 없다.”라고 했지요.제 시가 독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제 시가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유형의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고,체험 주체의 공모 없이는 시로써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김남호] 선생님께서는 영화광으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에도 관심이 많으시지요. 현대시와 영화/그림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것들(영화/그림)이 선생님의 시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는지요?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감독이나 화가를 꼽으라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김언희] 모든 예술은 표현 양식이 다를 뿐 하나라고 생각해요. 너무 깊은 관계, 너무 많은 영향, 너무 많은 감독들과 화가들 ...... 지금 딱 생각나는 한 사람씩만 꼽으라면. 데이비드 린치, 그리고 데 키리코.


[김남호] 선생님께서는 작년에 30년 가까이 몸담았던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시인’으로 ‘전업’하셨습니다. 2년 남짓 백수(?)로 지내보시니 어떻던가요? 선생님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문우나 독자들을 위해 간략히 근황을 얘기해주시지요.


[김언희] 모든 시인은‘전업’이지요. 직장을 가지거나 갖지 않거나 간에. 무슨 일을 하든 ‘시인’으로서 하니까요, 의식하든 못 하든. 꿈속에서조차 ‘시’를 쓰는 사람들이 시인들 아닌가요..... 근황이랄 것도 없지요. 최욱경의 당호 무무당(無無堂)을 빌려 제 작업실을 스스로 무무총(無無塚)이라 부르며 혼자 잘 놀고 있어요.


[김남호] 긴 시간 동안 두서없는 질문에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김언희 시인과의 대담은 녹록치 않았다. 평소 말수가 적은 데다 자신의 시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해설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나의 질문은 핵심을 번번이 놓친 채 겉돌았고, 시인의 대답은 나의 질문을 추월하여 저만치 가고 있었다. 나의 질문은 전전긍긍으로 버둥거렸고, 시인의 대답은 촌철살인으로 거두절미해버렸다.

잡지사 측에서 청탁한 대담원고의 분량은 이미 관심 밖이었고, 대담이라는 형식의 언어는 시인에게 가닿지 못하고 미끄러지거나 스쳐 가기 일쑤였다. 대담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비로소 내가 붙잡고 싶었으나 형체가 없었던, 묻고 싶었으나 그 답은 이미 들어버린 무수한 질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카치는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고 했던가. 나는 대담이 끝나자 비로소 질문이 시작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담은 답을 찾는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찾는 자리였던 것 같다. 현답으로 나의 우문을 질문이 되게 해준 김언희 시인에게 감사드리며, 시인의 어느 산문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대담을 맺는다.


“시인은 없다. 있다면 시의 찌꺼기가 있을 뿐이다. 시론 역시 없다. 시는 논리 밖이기 때문이다. 시가 이래야 한다거나, 시가 저러해야 한다는 말은 우스운 말이다. 제가 시인지도 모르는 것이 바로 시다.”

 

-[시와 세계](2005. 겨울)

출처 : 작년에 부는 바람
글쓴이 : 뫼비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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