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와 글 공부

정희성 시인 대담 /시인은 평화주의자, 낭만주의자

취몽인 2014. 12. 23. 13:14

     

 

      "시인은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

  

 

 

 

 

 

 

/ 여섯시 강연이지요? 세 시간 정도 남았군요. 먼저 선생님의 시부터 하나 읽겠습니다.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그 별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작년에 내신 선생님의 다섯 번째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에 나오는 「희망」이라는 시입니다.

제가 연초에 우리 지역 일간지에 소개한 시이기도 합니다만, 다시 모든 제도와 가치가 퇴행하고 붕괴되는 당혹스런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는 겁니까? 있다면 어디에 있는 겁니까?


/ 나로서도 평생 지키며 지녀왔던 가치들이 한꺼번에 부정되고 무너지는 현실이 참담하고 당혹스러워요.

민주주의, 자유, 평등 이런 보편적 가치가 10여년 방심하는 사이에 탈취당하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죠. 일시적이라고 봐요. 그러니 여전히 희망은 있다고 말해야겠죠.

하지만, 희망은 별처럼 어디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라 생각해요.

방금 오 시인이 읽은 내 시에서도 쓴 것처럼 희망도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사람에게나 보이는 법이지요. 


/ 희망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라 충격과 절망의 강도가 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도 이 정부 출범 때부터 불안하고 마뜩찮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누구든 마찬가지일 텐데, 이런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 희망의 반대말은 실망이나 절망이 아니라, '포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희망을 포기하는 것, 이것만큼 무서운 게 있을까요. 희망은 스스로 세우는 것인데, 이것을 포기하고 끝내 주저앉아 버린다면

희망은 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럴 수는 없잖아요.


/ 그렇지요. 하늘도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도와줄 방도가 없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힘들지만, 결코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화제를 바꾸도록 하지요. 시인으로서의 높은 명망과 인지도에 비해 선생님의 고향에 대해서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선생님의 고향이 여기 경남 창원인 것으로 알려지고, 얼마 전에 정식으로 경남문학관에 선생님의 출향문인 코너가

설치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환영합니다. 이참에 선생님의 고향에 대한 연원을 자세히 밝혀주시지요.


/ 얘기 들었습니다. 특히 진주의 박노정 시인이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애쓴 걸로 알고 있어요. 고마운 일이지요.

기술직공무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하도 이리저리 옮겨다니다보니, 나한테는 고향의식이 부족한 게 사실이에요.

고향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다보니 시도 고향을 소재나 주제로 한 시는 안 써지게 되더군요.

그러나 내가 태어난 곳은 분명히 창원이 맞아요. 정확히 경남 창원군 상남면 가음정리 126번지이지요.

거기서 태어나 얼마 있다가 선대가 살아온 충남 대덕군 회덕면 대화리로 옮겨갔어요. 거기가 본적지였던 거지요.

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는 흑석리로 피난했다가 얼마 후에는 대전 도청 옆 선화동으로 이사했고요.

여덟 살 되던 52년에 아버지를 따라 이리 신흥동으로 이사해서 이리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했어요.


/ 그럼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졸업하셨겠네요.


/아니에요. 거기서 5학년까지 다니고 6학년 되던 57년에 아버지의 전근으로 여수에 가서 여수 중앙국민학교를 졸업했어요.

중학교 입학을 계기로 서울로 이사를 왔지요. 이때부터 서울에 근거를 두고 살아온 셈인데, 서울에서는 용산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했어요.

 

/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너무 자주 옮겨 다니셔서 혼란스럽긴 하지만, 실은 단순한 점이 있군요.

초등학교는 이리, 여수 두 곳 다 중앙국민학교를 다니셨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같은 이름의 용산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다녔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초중고까지 모교 명칭은 중앙, 용산 두 가지 뿐이라 여느 사람보다 덜 헷갈리시겠어요. (웃음).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하신 거고요?


/그렇습니다.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어요.

국문학과 다닐 때 대학문학상에 「탁목조」가 당선되면서 내게도 시적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일찍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이셨군요. 그럼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활동을 하셨는지요?

 

/ 그런 건 아니에요. 초등학교 때는 순전히 타의에 의해 백일장에도 몇 번 나갔지만 번번이 떨어지기만 했어요.

오히려 서예나 사생대회에 나가서는 큰상을 받곤 했지요. 고등학교에서도 문예반보다도 서예반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미술선생님은 내가 미술대학에 진학하기를 은근히 바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문학에 대한 관심이 더 컸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결국 국문학과를 선택한 것이겠죠.

중고등학교 시절에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영등포 로타리에 있던 서점에 부탁해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은 아무 때나 가서 구해 읽을 수 있도록 해주셨거든요. 그걸 계기로 문학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자연스레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셈이지요. 대학문학상은 대학 4학년 때 당선된 거고,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곧바로 휴학원을 내고

ROTC 장교로 군대에 갔어요. 강원도 원통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는데, 군 복무기간인 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변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지요. 이때부터 김형영, 강은교, 임정남, 윤상규와 함께 <70년대七十年代>동인으로 활동했어요.

그리고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에 복학했고요.


/ 「변신」이 군 복무 때 쓰신 거란 말씀입니까?

 

/ 아니, 「변신」은 <대학문학상>에 당선되고 난 후 졸업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쓴 것이에요. 그러니까 대학 4학년 때 쓴 셈이지요.

시건방지게도 당선소감까지 써놓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는데, 최종심에서 결국 마종하 시인의 시가 당선되고, 제 건 떨어졌어요.

그리곤 곧바로 입대해서 문학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내다가 제대 무렵에 심사평을 참조해서 작품을 수정해 다시 그해 <동아일보>에 냈는데,

그게 당선된 것이지요.


/ 그렇군요. 대학원에서는 무슨 공부를 하셨습니까? 그때 대학원에서 한 공부가 선생님의 시에도 어떻게든 영향을 미쳤을 법한데요. 


/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는 정병욱교수 연구실에 있었는데, 정교수님의 연구 과제를 도우면서「명주보월빙(明珠寶月聘)」,

「윤하정삼문취록(尹河鄭三門娶錄)」, 「엄씨효문청행록(嚴氏孝門淸行綠)」등의 대하소설을 읽었어요.

그때 정교수께서 규장각 도서에 관한 연구 과제를 받아 추진하고 있었는데 내가 하는 일이란 게 고작 이 책들을 읽고 띄어쓰기를 해서

원고지에 옮겨 적는 일이었지요. 일년 동안 그 일을 하다보니 한글 필사본을 판독하는 능력은 꽤 길러진 것 같아요.


/ 그 일이 직접적으로 선생님의 시에 영향을 준 것 같지는 않은데요. 오히려 선생님의 초기시를 보면 향가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합니다.


/ 맞아요. 일년 정도 그 일을 하고보니 대학원 과정의 절반이 지나가버렸어요. 그러다 정교수님이 내가 시에 관심이 있는 걸 알고

향가를 한번 연구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시더군요. 내심 바라던 일이라 반겼지만, 이게 문학적 안목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언어학적인 소양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일이라 쉽게 덤벼들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연구과제도 제대로 정하지 못한 채 대학원 학기를

다 보내고 논문도 쓰지 못한 채 고등학교 선생이 된 것이지요. 그렇지만, 오 시인 말대로 내 전공이 고전문학이었던 만큼 대학원에서

공부한 설화나 향가가 내 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 그게 주로 첫 시집 『답청(踏靑)』의 작품들이겠지요. 그래서 『시경』과 한 대담에서 밝히신 대로, 윤영천 교수는 선생님의

초기시를 고전적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했고, 고은 시인 역시 "국문학적인 교양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시가 탄탄하기도

하지만 또 그것이 한계가 되고 있기도 하다"고 했는데……, 그리고 『답청(踏靑)』의 꽤 많은 시들이 향가의 형식을 빌린 추모의

형식을 띠고 있기도 한데요.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도 관련이 있는 겁니까?


/ 내 시가 고전적인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말들을 하는데, 그도 그럴 만합니다. 내 첫 시집인 『답청(踏靑)』의 시들 가운데

제목이나 내용, 형식면에서 향가나 설화, 그리고 우리 민속에 근거하고 있는 것들이 꽤 있는 탓이겠죠. 10구체 향가를 우리 서정시의

원형으로 볼 수 있겠는데, 이 향가가 추모의 내용으로 된 것이 많아요. 대표적인 예로 <제망매가>나 <찬기파랑가>를 들 수 있겠죠.

우리 현대사에서도 부조리한 현실과 맞서 저항하다가 수난을 당하거나 죽은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그러나 나 자신은 그들처럼 앞장

서서 싸울 용기가 없는 탓에 뒤에서 시로나마 그들의 넋을 기리고 추모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탁목조」, 「백씨의 뼈」,

「넋청」, 「매헌 옛집에 들어」, 「바람에게」등이 바로 그런 시들이라 할 수 있겠죠.

 

/ 그것도 저항의 한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독재자에게는 글로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렵고, 따라서 그만큼 위협적일

테고요. 시집을 낼 때마다 조금씩 변화를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 일관하는 정신이랄까 표현의 톤이랄까, 이것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방금 선생님께서도 고백하셨다시피 '지식인으로서의 저항'이랄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한계도 있을 법한데, 그 얘긴 뒤로

미루고 우선 선생님의 시에 나타나는 사뭇 비판적인 사회의식, 이를테면 '저항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 68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크게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편하게 대학생활을 했으니까요. 그러다 72년에 숭문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발령 받고 시도 본격적으로

쓰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무렵이면 산업화가 막 시작되던 때였잖아요. 농촌사회는 붕괴되고, 사람들은 서울로 모여들었지요.

그때의 형편을 현상적으로 짚어보면, 처음엔 농촌가정의 자식들이 "아버지 동생 학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벌어서 보내겠습니다."하면서 무작정 상경해서는 얼마 못가 . "죄송하지만, 아버지 쌀 좀 보내십시오."하던 때였어요.

한마디로 아버지는 농촌에서 저곡가 정책에 시달리고 아들은 도시에서 저임금 정책에 시달리던 시절이었지요. 여기저기서

그 폐해가 드러나고 저항이 심해지자 군사정권은 점점 더 강압적인 통치로 민중을 억압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기도 하지요.

그 산업화의 그늘이 제대 후, 본격적으로 시를 쓰고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비로소 사회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거죠.


/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거의 모든 편지가 '아버님 전상서'로 시작되었던 기억이 새롭군요. 72년이면 이런 경제상황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유신헌법 공포로 철권통치가 시작되는 등, 여러모로 힘든 시기였는데요.  


/ 그렇지요. 71년 대선 후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가 72년에 유신헌법을 공포하여 장기집권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인데,

공교롭게도 72년에 교사로 발령을 받은 거였어요. 말하자면, 사회에 나와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사회의식이 깨이기 시작한 셈이죠.

주변사람들이 잡혀가고 다치는 것을 지켜보며 '아 이게 남의 문제가 아니구나!' 하고 깨달은 거죠. 그때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언론자유운동을 펼치다가 해직됐던 김종철, 이창화는 나와 같이 공부했던 사람이에요.

그들이 핍박받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너무 편히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과 자책감이 들더군요.

그렇지만 나는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라 앞장은 못서고, 최소한 문인으로서 불의의 시대에 대한 증언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 그러한 시대상과 거기에 따른 각성이 선생님의 시세계를 변모시킨 거로군요.


/ 맞아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초기의 고전적인 취향에서 벗어나 점점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지요.


/ 초기시라면 『답청(踏靑)』을 두고 하는 말씀이겠고,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과 나름대로의 참여의 결실이 바로 시집 『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이겠군요.


/ 그렇지요.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나온 때가 78년인데, 70년대 후반이라고 하는 시대는 70년대 초부터 진행된 산업화로

농촌사회가 붕괴되고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몰려들어 농촌문제와 함께 도시화와 노동문제가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된 때였잖아요.

말하자면, 농촌은 노동력 부족과 저곡가정책으로 신음하는 한편 도시는 노동력 과잉에 따른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이 문제가

되었던 거죠. 이런 현실을 문학에 어떻게 반영할까 고민했고, 그 고민의 결과가 『저문 강에 삽을 씻고』였어요.


/ 제가 앞에서 잠깐 비췄지만, 선생님의 시가 일관되게 민중 지향적이긴 해도 '지식인으로서의 저항'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는데요.


/ 인정해요. 내 딴에는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소외당한 민중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지만, 내 자신이 직접적인

현장노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사실 70년대에만 해도 김지하, 신경림, 황석영, 조세희의 소설이나

시가 민중 지향적이긴 해도 엄밀히 말하면 모두 '지식인문학'의 범위 안에 있었다고 봐야죠. 그러나 당시는 민중의 힘이 조직되거나

선도적인 위치에 서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식인이나마 먼저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이것이 80년대의 농민, 노동자,

교사 등 현장노동자 중심의 민중문학에 영향을 미쳤을 테고요. 이런 한계와 불가피성 속에서 개인적으로 가졌던 고민이 바로 시의

화자의 문제였지요. 노동자가 아니면서 노동자인 척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 아, 그래서 선생님 시의 화자들이 대개 뚜렷이 드러나지 않거나 때로는 대리화자, 또는 이중화자의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군요.

  

/ 서정시는 대개가 시인 자신이 시의 화자가 되는 법인데,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내 시에서는 시의 화자가 모호하게 처리되거나,

시인과 일면 무관한 듯한 화자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같은 시가 바로 그런 경우예요.


/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문단 입문에서부터 첫 시집 『답청(踏靑)』을 지나 『저문 강에 삽을 씻고』까지 흘러왔군요.

이쯤에서 시집을 중심으로 정리를 좀 해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70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오셔서 74년에 첫 시집

『답청(踏靑)』, 78년에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인 91년에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꼭 10년 뒤인 2001년에 『詩를 찾아서』를 내셨고요. 그리고 7년만인 지난해에 『돌아다보면 문득』을 내셨지요? 이렇게 시력

40여 년만에 다섯 권의 시집이라면 과작이라 할 수 있겠는데, 특별히 여기에 대한 소신이나 이유가 있는 겁니까?


/ 시인이 평생 시집 5권을 냈으면 많이 낸 거지요. (웃음).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이전의 유명한 시인들도 대개 한두 권

시집을 남겨서 문학사에 이름을 올린 거잖아요.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이겠죠.


/ 그렇긴 하지만, 신중하고 과묵하신 성격도 작용했을 법한데요. 선생님의 시를 읽다보면 조사 하나 허투루 쓴 것 없이, 뭐랄까.

지나치게 '완벽주의'를 추구한다는, 그런 느낌이 들거든요. 


/ 그렇게들 말합디다. 내가 좀 꼼꼼하고 깐깐한 구석이 있기는 있는가봅니다. 어디에선가 밝힌 대로 파지를 잘라 만든 메모지에

시를 써 가지고 다니면서 모서리가 닳아질 때까지 읽고, 또 읽고 하면서 입에 붙지 않는 말을 걷어내는데, 혼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시간 없다는 사람을 붙든 채 읽어보고 느낌을 솔직하게 얘기해 달라고 조르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목은 다시

다듬고 고치기를 반복했지요. 원고청탁이 와도 이런 내 기준에 맞춰 완성된 원고가 없으면 안 줬어요.   


/ 발표된 작품이라도 막상 시집을 낼 때는 손 볼 데가 많잖아요. 선생님 경우는 그렇게 꼼꼼하게 다듬어서 내보낸 시들이라 더

매만지실 필요가 없었겠네요. 


/ 그래요. 시집을 낼 때 크게 손 볼 필요가 없었지요.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까지는 그랬어요. 그런데 네 번째

『詩를 찾아서』는 시집 낼 때 전부 뜯어고치다시피 손을 봐야했습니다. 메모지에 초고를 써서 이리저리 돌려 읽고 고치는

과정을 생략한 채 컴퓨터에 원고를 입력해놓고 원고를 내보낸 결과가 아닌가 싶어요. 디지털이 그래서 다 좋은 게 아닌 거지요.  


/ 선생님의 시집발간 연대를 유심히 보면, 70년대에 두 권, 90년대에 한 권, 그리고 지난해의 『돌아다보면 문득』을 쳐서

2000년대에 들어와 두 권의 시집이 나왔습니다. 민중문학의 정점, 혹은 최소한 민족문학의 중심부 작가로 평가받는 문단상의 지위로

볼 때 민족민주변혁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80년대에 정작 선생님의 시집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 70년대 말은 산업화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극에 달한 한편으로 유신정권이 이완되고 붕괴되는 무렵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숨 쉴 여유라도 좀 있었지만, 80년대는 신군부의 출현으로 억압이 더 심해진 상황이었어요.

내 시 가운데 「아버님 말씀」이란 시가 있잖아요.


/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무장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 이렇게 시작하는 시 말이지요?


/ 그게 내 두 번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실린 시인데, 그 무렵의 시들이 이처럼 너무 날이 서있고 강퍅했지요.

그때 나는 시인은 시를 통해서 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면서 내 사고와 언어는 경직되고 메말라 간 거지요.


/ 그래서 97년 '시와시학상' 수상소감문으로 쓰셨다는 '시를 찾아 나서며'라는 글에서 그 무렵의 상황과 심경을 이렇게

술회하셨더군요. "시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나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다."라고요.


/ 그랬지요. 그래서 다분히 선동적인 이 「아버님 말씀」 같은 시가 곧잘 대학게시판에 대자보로 나붙곤 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사뭇 공격적인 언어의 화살이 적들의 가슴에 꽂히기 전에 먼저 선량한 내 독자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목격하고는

괴로웠지요. 어떤 이는 내 시에 고무되어 나가 싸우다 쓰러졌고 또 어떤 이는 내 시를 아이들에게 읽어준 죄로 교단에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정작 시를 쓴 나 자신은 멀쩡한데 다른 사람이 상처를 입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내 시가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꼈던 거죠. 그러니 시도 잘 써지지 않더군요.

내가 뱉은 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때부터 세상의 아름다움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대신에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는 버릇이 생겼어요. 이러다 내 심성까지 변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지요.

아무튼 그때가 내 인생에서도 시에서도 암흑기였던 것 같아요.  


/ 그랬군요. 그래서 다음에 나온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는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었겠군요. 직설적인 화법보다는

에둘러 표현할 수밖에 없겠고요. 이때부터 시가 점점 내면화, 즉 자기성찰과 자기탐색으로 기울어가고, 언어의 본질에 대한 모색과

탐구에 천착해갔던 것이, 그래서였군요. 그래도 지나간 것들을 그리워하고, 다시 그들을 불러 세워 희망을 속삭일 수밖에 없는 것이

시인의 숙명이겠지요. 그것이 바로 최근에 나온 『돌아다보면 문득』이겠고요.


/ 맞아요. 후회는 없어요. 책임을 회피할 생각도 없고요. 특히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내게 민중시인의 인상을 덧씌웠겠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내 업인 거지요. 미안하고, 고맙고, 서럽고, 분노하기도 했던 일들이 이제 과거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내가

고스란히 안고가야 할 내 부채이자 자산이겠지요.   


/ 선생님의 시가 민중적 세계관을 가진, 이른바 '민중시'로 평가받으면서도 혹자는 선생님의 첫 시집 『답청(踏靑)』에 대해서

 "'고전이나 한시적 교양이 투영됨으로써 구체성과 삶의 일상성이 부족하다"는 점, 즉 시의 '추상성과 관념성'을 비판하고 있고

 (김용락, 70년대 민중시의 정론성, 문예미학 제9호, 2002), 두 번 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대해서도 "저항적 시정신이

구체적인 행동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관찰자적 지성으로 머문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김종윤,

민중적 서정과 간결성, 육사논문집, 1991) 또, 어떤 이는 세 번째 시집『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가 이전의 시집이 현실에

대해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던 데 비해 '내면적 성찰'로 기울고 있는 점을 들어 "소시민적 자기연민에 그칠 수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오성호, 새 세계의 문 앞에 선 시정신, 한길문학, 1991) 여기에 대해서도 당사자로서 하실 말씀이 있을 듯한데,

 어떻습니까?


/ 대체로 인정합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나름대로 얘기했고요. 오 시인이 설명한 바도 있었지요. 그리고 시가 한 번

시인의 손에서 떠나면 그 수용과 평가는 오직 독자의 몫이지 않겠어요? 그러니 시인이 직접 왈가왈부할 일은 못 되는 거지요.

다만, 어떤 작품이든 당시의 상황과 현실을 고려한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 작품이 당시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한다는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누구든 당대의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 평가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누려고 준비했습니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까지 얘기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짚어진 부분도 있고……, 해서 특별한 의미나 소용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기왕에 최근 시집인 『돌아다보면 문득』까지 언급되었으니

드리는 말씀인데, 표제시의 제목이 암시하듯 시집 전편을 통해 사라지고 잊혀져간 것들을 회고하며 호명하고, 때론 쓸쓸함과 외로움에

젖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도 아직 남은 것들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문이겠지만, 이 시집의 정조는 회한이나

쓸쓸함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희망에 가깝습니까?   


/ 글쎄요. 두 가지 다일 것 같은데……, 그러나 쓸쓸함과 외로움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회한의 정조일 것이고,

애써 그들을 기억하고 호명하는 것은 희망을 세우기 위함이겠지요. 그럼에도 굳이 어느 것에 더 가깝냐를 따지자면 희망에다 방점을 찍고 싶어요.  


/ 그래서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의 첫 시가 제가 처음에 읽은 「희망」이란 시이고, 마지막 시가 「새로운 세기의 노래」로서 매우

의도적으로 배치하신 거로군요. 선생님의 시와 세상에 대한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방금 예를 든

「새로운 세기의 노래」에서 세상도, 노래도 이제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하셨지요? 후배시인들에게 시인으로서 자세와 시작태도

등과 관련하여 특별히 부탁하거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십시오.


/ 어느 자리에서도 얘기한 바 있지만, 시인은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고 있을 때조차도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자이고 낭만주의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그리고 문학이란 동시대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의 한 방법이라는 평범한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겠고요.

 최소한의 소통도 안 되는 시가 무슨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겠어요? 마지막으로 젊은 시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내면에

가두어 두지 말고, 동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특히 소외된 사람들을 애정과 이해의 눈으로 보듬으며, 그들이 읽고

감동할 만한 좋은 시를 많이 써줬으면 합니다.


/ 시작하면서 근황부터 여쭙는다는 게 얘기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레 본론까지 곧장 들어가는 바람에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만……,

재작년 2월에 숭문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셨지요? 그리고 지난해 초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를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개정하시고

이사장직도 퇴임하셨는데, 이제 완전한 자유인이 되신 겁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 2007년 2월에 평생 몸담았던 숭문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곧바로 베트남, 캄보디아, 이집트,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했어요.

작곡가 백창우의 도움으로 시낭송 음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노래나무)도 냈고요. 그리고 신경림, 구중서 선생과 함께 개성공단

나무심기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고 김용택 시인과 에다가와 조선학교 돕기 공동대표로 동경에 다녀오기도 했어요. 그리고 작년

11월에는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관하는 요르단대학교 '한국어말하기대회'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요르단을 방문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런 저런 강의와 강연 등으로 소일하고 있지요.


/ 현직에 계실 때보다 더 바쁘게 사시는군요. 여전히 건강하시니 가능한 일이겠지요. 참 다행한 일입니다.


/ 허허, 그런가요?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서였지요. 거기「만세 후」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한국적이라는 관형사가 그렇듯이/자유라는 말이 언젠가는/우리를 구속하겠지//무서운 예감이여/얼마나 외롭고 긴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저는 다시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예감이란 이성적 자각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직감, 즉 본능적인 것일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 마디로 이를 '예지력'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데,

누구보다 탁월한 예지력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받는 선생님께서 대담 들머리에서 예언하신 바대로 이 답답한 불의의 정국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를 희망합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