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좋은 詩 모음

애인들은 쪽,쪽, 소리를 낸다 / 이하석

취몽인 2015. 3. 3. 16:38

 

 

 

 

애인들은 쪽,쪽, 소리를 낸다 / 이하석

 

 

 

 

바다다슬기들은 민물에 삶아진 몸들을

바닷가 플라스틱 함지박에 누인다. 노란

타월을 쓴 아낙네는 밤새 바다다슬기들의 꽁무니를

뻰치로 절단했다. 사랑하는 남녀가

바다다슬기 한 봉지를  3백 원에 사선

다정하게 마주보며 먹기 시작한다.

다슬기 앞쪽을 쪽, 쪽, 소리내어 빨면

다슬기의 속이 살덩이째로 입 안에 톡, 떨어진다.

여자는 처음엔 부끄러워했지만 이내 요령이 생겨

때로는 쪽, 한 번으로도 다슬기의 몸을

집어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사내는 쪽, 쪽, 소리를 내는 여자를

사랑한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남자는 저쪽, 싸구려 해안 여인숙의 창에 서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도 쪽, 쪽,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본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여자는

승용차를 내려 20대의 타이피스트를 껴안다시피

바다다슬기를 안기는 40대 남자의 쌀찐 가랑이를

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에 굴리고.

 

그리고 바다는 끊임없이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2월의 부산 부두는 다슬기의 껍질만

쌓인다. 3백 원 또는 6백 원 어치의 껍질들만 남겨두고

애인들은 가버리고, 모래 속으로 바다를 느끼면서

껍질들은 구멍 뚫린 몸들을 모래로 채운다. 노란

타월을 쓴 아낙네는 껍질들 위에 앉아

옛 애인의 쪽, 쪽, 하던 소리를 물거품 위로

듣는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아낙네는 주름진

입술 사이로 하염없이 쪽, 쪽, 소리를 내며,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바다다슬기를 먹는 자는 누구나 쪽, 쪽,

소리를 내며, 모래 위를 구르는 흰 물거품을

이해한다. 누구든 흰 물거품 속에선 흰 물거품으로 밀리며

2월, 애엔들은 어디서든 쪽, 쪽,

소리를 낸다.

 

 

고추잠자리 / 문학과지성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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