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배층 상당수가 모델로 삼고 있는 곳은 대자본의 편의에 모든 게 다 맞추어져 있는 싱가포르 같은 국가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적는 순간, 국내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메르스 사태는 -지난번의 세월호 참극과 마찬가지로- 한국이라는 국가의 부실성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시위 진압 기술이 지난 수십년 잘 축적돼 최근엔 최루탄을 수출까지 해서 외국에서의 민중 탄압을 돈벌이 기회로 삼고 있다.
대민 억압 이외에 이 국가가 더 잘하는 게 있을까?
돈이 되지 않는 대형 유행병 대응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격리병실을 충분히 갖춘 공립병원들인데, 한국 공공의료의 수준은
산업화된 세계에서는 꼴찌다. 전체 병원들 중에서 공립병원은 병원수 기준으로는 6%에 불과하고 병상수 기준으로는 10%
정도뿐이다. 참고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은 73%다. 현재 구비돼 있는 시설을 통한 메르스 대응은 미흡하지
않을 수 없으며, 거기에다가 정부의 은폐·무능은 대중의 불안을 더더욱 부추긴다. 부실 국가의 일상이란 바로 불안과 불신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을 유행병으로부터 보호하지도 못하는 국가의 지배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균의 한국인이 질병뿐만 아니라 실업, 비정규직 양산, 영세업자 줄도산, 걷잡을 수 없는 사교육비와 불안한 노후 앞에서 느끼는
만성적 불안을, 지배자들은 어느 정도 인식하는가? 대응이라도 할 자세가 돼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최근 반향이
컸던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한 강연에 주목했다.
왜 하필이면 홍석현을 택했는가? 그 가계나 현재 위치 차원에서 홍석현은 대한민국 지배층을 사실상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는 -외국인 기자에 의해서 “코리안 로열 패밀리”(한국의 왕가)라고 불리는- 삼성 재벌 소유주 일가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 사법관료 출신인 그의 아버지 홍진기부터 4·19 때에 이승만 정권의 내무부 장관으로서 시위 유혈진압을 명령한 죄로
그 후 재판받아 사형을 받았음에도 바로 풀려나 박정희 시대의 방송계 주도자로 거듭난 것으로 꽤나 유명했다.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 출신이며, 주미 대사까지 역임한 적이 있는 홍석현은, 한국 사회에서 “최고 엘리트”로 군림할 수 있을 만큼의
배경과 경력을 쌓았다. 그가 지난 5월28일 경희대 대학생들 앞에서 한 강연에서 그가 속한 계층의 세계관과 욕망들이 어떻게 반영되고,
현재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인식과 대응책이 어떻게 제시됐는지 고찰해보자.
홍석현의 연설문을 보다 보면 혹시 일종의 자기분열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분 부분이 서로 엇나간다.
홍석현은 한국 서민들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들을 인식한다. 청년실업, 비정규직 차별, 그리고 오이시디 최악의
노인빈곤율(45% 이상) 등을 두루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 대한 그의 평가는, “너무나 멋진 나라”라는 것이다.
“멋질” 뿐만 아니라 잘하면 “글로벌 리더”(세계적인 지도국가)쯤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저시급 5580원 알바 일자리들을
대학생뿐만 아니라 취업에 실패한 졸업생까지도 수년간 전전해야 하고, 65살 이상 노인들의 점심 결식률이 7%를 넘는 등 수많은
가난한 독거노인들이 영양실조로 고통을 겪은 뒤 홀로 죽어야 하는 나라가 “멋지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표현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죽도록 일하느라고 연애할 시간도 가지지 못하는 고학생들과 음식쓰레기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끼니를 굶어야 하는 빈곤 노인들의 세계와, 홍석현의 세계가 그저 서로 그다지 소통이 없는 두 개의 다른 천지라는 가정일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로열 패밀리”는 늘 멋진 세계를 사는 법이다. 그러나 저들의 호강은, 가면 갈수록 어려워지는 다수에게 위안이라도
될 것인가? 홍석현은, 삶이 팍팍해지기만 하는 다수가 듣고 싶어하는 용어들을 꺼내주긴 한다. 양극화, 빈부격차, 중산층의 몰락 등등
다수에게 관심사가 될 만한 주제들을 두루 언급해준다. 한데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쏟는 것은 한국인 다수의 빈곤화보다는, 경쟁 상대로
여겨지는 동아시아 다른 나라 지배자들의 최근 동향이다. 그는 이런 사고방식을 ‘국익을 위한 국제경쟁’이라고 항변하겠지만, 사실 비슷한
품목을 놓고 구미권이나 신흥국 시장에서 중·일 업체와 경쟁해야 하는 전자·조선·자동차 수출 대기업의 ‘비즈니스’ 본위의 대외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국제적으로 매우 개방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이웃나라 서민들에 대한 어떤 관심이나
배려도 없다. 홍석현은 일본 극우정권의 ‘아베노믹스’를 극찬하지만, 과연 일본 노동자 중에서 유럽이나 북미의 어느 나라보다 많은 38%가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이나, 2010년 실질임금에 견줘 오늘 일본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96%에 불과한 점 등 일본 노동자들이 갈수록 가난해지고
있다는 점을 알고는 있는가? 그에게 한국 노동자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다른 나라 노동자들 역시 착취 대상 이외의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홍석현은 한국의 ‘진정한 위기’의 핵심을 “과거의 위대함을 재현하는 중국”과 “20년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일본” 사이에 “낀”
그 중간적 입장에서 찾으려 한다. 사실 이 이야기는 홍석현의 매형 이건희의 그 유명한 ‘샌드위치론’의 재탕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 ‘위기’의 극복책으로 제시되는 홍석현의 방안은 과거의 삼성 재벌 오너 일가의 발언들과 약간 구별된다.
홍석현은, 한국을 “매력 국가”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매력 국가”야 참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홍석현이 생각하는 “매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계속 보면, 최저임금 알바에 매달리면서 곧 졸업과 실업을 동시에 맞닥뜨려야 할 대학생으로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홍석현은, 4년 전 후쿠시마 참극 이후에 외국 자본들이 일본을 빠져나왔을 때에 그 본사들을 서울이 아닌 싱가포르와 홍콩으로
옮겼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일 만한 “매력”, 즉 서울 곳곳에 생기고 있는 “100층짜리 사무실 건물들”을 외국 회사 사무실로 채
울 만한 “매력” 갖기를 주문한다. 외국 자본의 눈에 한국을 “매력 국가”로 만들기 위해 홍석현은 아예 거창하게 “제3의 개국”을 부르짖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개방” 내지 “개국”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역시 “규제 철폐”가 가장 앞줄에 있다.
과연 대자본의 이 거대망상의 실현에 ‘재료’가 돼야 할 한국 젊은이들에게 산업안전 규제가 “완화”돼 백혈병 등 산재들이 횡행하는 공장들이
얼마나 ‘매력적’일지 나로서는 회의적이기만 하다.
홍석현은 속된 말로 ‘꼴통 우파’라고 불리는 부류들과 다를 것이다. 그는 예컨대 최근 보수우파 정권의 대북 정책을 비판하여 “대북 투자 지속”을
외칠 정도의 ‘개방성’을 보인다. 한국의 지배층은 북한을 보수층 결집용 “위협”으로 계속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투자 등을 통해 그 경제적
식민화와 자본화의 가속화를 노릴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골수 반북파와 햇볕정책론자들로 갈려 있는데, 홍석현은 후자에 속하는 모양이다.
중국 공산당 역사 속에서 미래를 위한 지혜를 찾아내고, 중국의 동맹국인 북한에 평화적으로 접근하려는 그의 모습에서는, 중국의 시장과 노동력에
올인하고 있는 삼성그룹의 이해관계가 그대로 읽힌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공산당이 대기업들을 통제하고 다수의 복지를 늘리려고 하는 중국도
아니다.
그의 이상이자 한국 지배층 상당수가 모델로 삼고 있는 곳은 대자본의 편의에 모든 게 다 맞추어져 있는 싱가포르 같은 국가다.
부자에게 부과되는 세금도 규제도 다 최소화돼 있고 민주노조도 집회나 표현의 자유도 불가능한, 국가의 철권통치가 정확히
자본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나라 싱가포르는 저들의 꿈이다.
그러나 저들의 유토피아는 우리에게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다수의 이익을 희생시키면서 오로지 자신들만의 사리사욕만 채우려는 반사회적인 대자본의 군림을, 우리가 과연 언제까지 참아야 할 것인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