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좋은 詩 모음

[스크랩] 노래하는 화살촉 / 최승호

취몽인 2015. 11. 16. 11:46

 

 

 

 

노래하는 화살촉 / 최승호

 

 

  고대(古代)의 소리들을 모은, 쇠에도 녹 푸른, 진흙의

주름살이 느껴지는 산성(山城)박물관에서, 진흙나팔과

구리말방울과 요령의 혀를 관음(觀音)한다. 혀가 떨어지고,

말대가리가 떨어지고, 연꽃에 앉아 피리 불던 관음보살이

확대경에 들이댄 눈안 속에 부식되는데, 그 옆에 명촉이라고,

새대가리꽃의 화살촉이 놓여 있다. 누구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는지, 결국 뒤의 흙을 향해 날아갔는지, 우는 화살촉,

그 아래 싱잉 어로우헤드(singing arrowhead)라고, 티끌글씨로

써 있는, 씽씽 노래하는 화살촉, 또는 지저귀는 화살촉,

벌판에 우렁찬 진흙나팔과 허공에 붐비는 말울음 소리 속에서.

 

 

여우비 / 최승호

 

 

시간 속에 늙어온 남자가
후드득 후드득 비를 맞는다
둔해 가던 감각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비를 맞는다

 

탯줄에 매달린
애처럼
애호박이 점점 살찌는 여름
물로 가득한 줄기들은
꿈틀거리며 태양을 향해 기어오르고

 

자라나며 굵어지던 등뼈 속에
점점 커지던 얼굴 속에
쭈굴쭈굴 시들던 꿈의 떡잎,
체념이
충동을 억누르며
글썽이는 땅 위에서
두꺼운 체념을 뚫고
충동이 화산처럼 불을 뿜지 못하는
마그마 같은 가슴,
가슴이 점점 식어 굳어가는 땅 위에서

 

결실도 없이 늙어온 남자가
후드득 후드득 비를 맞는다
커다란 초조 속에
깜짝깜짝 놀라면서 비를 맞는다.

 

 

 

 

 

 

말머리 성운 / 최승호

 

 

하늘 저쪽에서도 재 냄새 나는
말머리 성운이
검은 말대가리 모양으로 나를 굽어보는 밤에
나는 재의 여물을 씹는다

 

나의 탯줄들이
재로 떨어져 나간 이후에
내가 핥은 재의 여물통에 불멸의 보석이 있었던가

 

재의 여물을 씹으며
늙어 버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허공에 떠 있는 지구 덩어리
그 위의 초라한 마구간 한 채

 

 

 

 

 

 

뭉게구름 / 최승호

 

 

나는 구름 숭배자는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
먹구름들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위에 내리던 서리
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
뭉쳐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지 못한채
나는 뭉개구름을 보며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
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매미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

 

 

 

 

 

구름들 / 최승호

 

 

구름에 걸려서 사람들이 넘어진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덧없이 죽여 놓고
구름들이 조용히 여름 대낮을 흘러간다
보라! 큰 감자 모양의 구름
어떤 구름은 상어를 닮았다

 

구름은 넘어지는 법이 없다
넘어진 사람들을 넘어서
구름들이 낮과 밤을 흘러가고
남대문 시장에 북적거리던 인파가
오늘은 동대문시장에서 시끌벅적 출렁거린다

 

옷,옷들,옷가게의 점원들
하나의 몸뚱이를 휘감는 천들이 있고
흘러가는 구름 아래 수많은 옷들이 있다
벌거벗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그러나 구름을 걸친 채 누워 있는
알몸뚱이를 보았는가
이 세상 옷이 아니기 때문에
수의는 값이 비싸다
어느 여행객에게 수의를 입히고
먼길을 떠나는지 모르겠으나
느린 장의차에서는 벌써
구름 냄새가 피어오른다

 

 

비 / 최승호

 

 

  비가 은회색 갈치들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버려진

의자처럼 서서, 바라보았다. 왜 슬픔은 썩지 않는가.

시선엔 지느러미들이 달려 있는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비가 물간 갈치들처럼 냄새를 풍기며 쏟아지고 있었다.

드넓은 개흙앞에 목이 긴 장화처럼 서서 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안의 슬픔에게 물었다.

슬픔은 왜 썩지 않는가. 시선엔 왜 지느러미들이 달려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 / 최승호

 

 

가난한 사람들이 아직도
너덜너덜한 소굴에서 살아간다
시커먼 연기가 솟고 소방차들이 달려왔을 때
무너지는 잿더미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와 노파를 나는 보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변두리 인생들이 있다는 것
헌혈 플래카드를 큼직하게 내건
적십자혈액원 건물이 바로 옆에 있지만
가난한 피는 여전히 가난하고
궁핍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에 너절하게
불어나는 물건들이 있다는 것

 

그 누구도 物王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넝마촌과 붙어 있는 고물상, 폐품들의 무덤
그 크기는 왕릉만 하다
나는 그것을 古物王의 무덤이라고 불러본다

 

가난한 사람들이 손수레를 끌면서
오늘도 문명의 잔해를 나르는 곳, 그 입구를 지키며
엎드려 있는 검은 개는
스핑크스처럼
짖지도 않고 나를 보고 있다

 

 

허물 / 최승호

 

 

나비도 신선도 허물을 벗고 날아오른다지만
나는 다르다
몸이 벗어야 할 허물이 없다는 것이
절망은 아니다
허물 덩어리로 살다가
그저 허물로 늙어 죽는 것이
절망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다
몸 전체가 허물이고
허물이 바로 온몸이기에
구렁이처럼 허물을 벗는 것은
미끄럽게 꿈틀거리는 세월이지
내가 아니다
세월의 뱀비늘로 붙어 번뜩이는 자,
세월의 사족으로 세월을 따라가는 자,
사족에도 뱀비늘에도 허물의 슬픔은 있으리

 

 

오래된 가풍 / 최승호

 

 

참새 댓 마리
이른 아침 구멍가게 앞에 내려앉았다
과자 부스러기나 새우깡이라도 쪼아먹는 것일까
누가 뭐래도 참새는 낙천가,
썩은 좁쌀을 먹어도 크게 비관하지 않는다
선골도풍(仙骨道風)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시원하게 살다 간결하게 죽는 것이
참새 집안의
오래된 가풍

 

- 최승호 시집  < 바보성인에 대한 기억 >

 

 

 

 

 

출처 :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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