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좋은 詩 모음

[스크랩] 지문 외 / 권혁웅

취몽인 2015. 11. 16. 11:44

 

 

 

 

지문 / 권혁웅

 

 

 네가 만질 때마다 내 몸에선 회오리바람이 인다

온몸의 돌기들이 여름 도움닫기하는 담쟁이처럼

일제히 네게로 건너뛴다 내 손등에 돋은 엽맥(葉脈)은

구석구석을 훑는 네 손의 기억, 혹은 구불구불 흘러간

네 손의 사본이다 이 모래땅을 달구는 대류의 행로를

기록하느라 저 담쟁이에게서도 잎이 돋고 그늘이

번지고 또 잎이 지곤 하는 것이다

 

 

목련의 알리바이 / 권혁웅

 

- 신발에 담겨 있는 것 2

 

 

오늘, 목련이 모두 졌다 오래된 신발처럼 변색했다

신발은 흔적이다 너는 여기에서 증발했다 뒤꿈치 바깥이

깎인 것은 너를 지탱해온 신발의 기억,신발은 길을 끌고

천천히 이곳에 왔다 오늘 너는 新說, 建國, 成遂 등을

짚어 왔고 주렁주렁 달고 왔고 그리고 목련이 졌다 너는

여기에서 증발했다 목련은 가지를 끌고 와서는, 가지

끝마다 자리를 잡곤 했다 가지들이 路線처럼 산만했다

그 무성한 신발들이 다 떠나갔다 너는 여기에서 증발했다

 

 

 

 

우 / 권혁웅

 

 

골목길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여우가 그녀 주변을 돌아

다니고 있었다 나를 처음 알아본 것은 그녀가 아니라

여우였다 긴 치마에 가방을 모아 쥔 손이 가지런했다

흰 발목과 꼬리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자 여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여우가 나를

알아보았을 때 겨우 열 다섯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곁을 지나쳐갔다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삼 년 후에 다시 여우를 만났다 한성여자고등학교

하교 길, 여우는 고갯마루에 앉아 있다가,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학생들 틈에 끼어들었다 나는 몰래 여우를

따라갔다 골목을 돌아 한 대문 앞에서 꼬리를 놓쳤다

집에는 병든 노모와 아이들이 보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겨우 열여덟이었으므로,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대학 때에 그녀를 만났다 그때 겨우 스물둘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와 백년해로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

해 안 건 아홉에 하나였다 왜 열이 아니냐고 물어볼

사람은 없겠지 그녀와의 보금자리는 늘 풍찬노숙이었다

천 일을 하루 앞둔 어느 날 결국 그녀는 나를 버렸다

 

  그후로도 자주 여우가 출몰했다 어떤 여우는 몇 년 동

내 그림자를 밟다가 사라지기도 했고 어떤 여우는 내가
맛이 없다고도 했다 여우인 줄 알고 버렸던 그녀가 몇 년
후에 여봐란 듯이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때마다 간이

아팠으나 며칠 후면 새살이 돋곤 했다

 

  나는 아직도 겨우일 뿐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음이 궁금하지만 미안하게도 내게는 뒷이야기를

기록할 여백이 없다 여우는 겨우 말하면, 달아난다

당신도 알다시피 여우 이야기는 늘 미완이다

 

 

달에 대하여 / 권혁웅

 

 

나는 감옥이었네
둥근 사랑 속에 백지처럼 얇은
한 여자를 가두었네 그 여자 몸둘 바 모르고
내 마음속을 떠돌다 지쳐
세상을 떠돌러 갔네 너무 가벼웠네
그 여자 산 너머 산, 들판 지나
들판을 만날 텐데, 구겨질 텐데...... 울면서
달빛은 촘촘히 세상을 가두네
이제 나 야위어 아무나 할퀼 지경이지만
애초에 모르진 않았다네
그 여자,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어렵게 어렵게
나를 무단 횡단한 거였네

 

 

꽃잎과 담장 / 권혁웅

 

 

  담장을 끼고 걷다보면 휘어진 길 저쪽에서, 누군가,

오래 전부터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꽃 한 송이가 피어날 때에도 여러 번 망설여야 한다

꽃잎 한 장과 다른 꽃잎 한 장 사이에서 나는 불편하다

멈칫거리며 꽃잎이 돋아나고 있다 꽃잎들은 어느 쪽

방향으로 돋아나는가 회전문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돈다,

거꾸로 돌고 싶은 이들은 손가락을 잃을 것이다

회전문이든 담장이든, 지나치면 제 자리일 터이므로

망설이며 디디는 이 걸음이 내겐 길이요 꽃이다 담장을

끼고 걷다보면 휘어진 길 저쪽으로, 내가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소한 기록 / 권혁웅

 

 

풍경 속에 눕고 싶다,가령 배꼽티를 입고 지나가는
저 여자의 중심에 거리의 소실점이 모여들 때
그 안에 들어가 함께 지워져 버리고 싶다
내가 이 거리에서 읽어낸 건 몇 장의 삽화,
몇 줄의 기록이었다 무엇이 근사하겠는가,
원본이 따로 없으니
나는 내 삶에도 밑줄을 긋지 않은*
엉성하고 게으른 독자였다 팔짱 낀 남녀가
통독하듯 빠르게 보도를 걸어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저들은 다른 책을 펼칠 거야,나는 근시의 풍경
저 너머를 건너다본다 내가 모르는 것들,
예컨대 목격자를 찾습니다 흰색 소나타와 오토바이,
아르바이트生 구함, 용모 단정, 女, 19세 이하는
내 노트에 기록될 수 없을 것이다 원본이 따로이 없으니
내가 최선을 다했던 건 담배를 버리기 전에
휴지통을 둘러본 일이었다
모퉁이의 나무는 지금도 잎을 떨구며 저리 난감하다
나무는 풍경이다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 또한 저 풍경과 하나가 된다면
그래서 내 얼굴이 저 나무나 보도블럭에서 읽혀진다면
잠시 지나치던 네가 쳐다볼 수도 있으리라 사소하게
물론 사소하게

 

 

원형의 감옥 2 / 권혁웅

 

 

나무도, 그늘 속 나도
무연히 서 있다
기다리는 이가 오지 않는 한,
나는 밀봉되었을 따름이다
이 나무는 거대한 해시계여서
나를 가둔 채 오전에서 오후 쪽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햇살에도 이렇게 빈틈이 많은 것을
나를 감시하는 그늘 속 눈들,
파파라치들이 저토록 많구나
기다린다는 건 타인의 시선에
개봉되는 것이다
지금 내 안은 여닫은 봉투와 같아서
나는 햇살을 가득 담은
푸른 그늘이다 나갈 때가 되었구나
다시는 돌아보지 말라고,
저 잎들의 뒷면에 적힌 에필로그를
바람이 언뜻 뒤집어 보여준다

 

- 권혁웅 시집  < 황금나무 아래서 > 2001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 권혁웅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당신은 다섯시에서 여덟시까지
안개를 지켜보았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강물을 내려다본 것뿐인데
컵 속의 물이 얇게 얼어 있었지
철로는 어느 線이든 조금씩 더러웠네
11월은 당신의 기억 속에 영원할 것이네*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먼데서 얼크러진 길들이 천천히 다가왔으나
철로는 어느 線이든 조금씩 더러웠네
당신은 다섯시에서 여덟시까지
안개를 지켜보았지
이제 당신은 종이컵을 구기고
신문지를 접어드네
11월은 당신의 기억 속에 영원할 것이네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일곱시 사십분이거나,여덟시 이십분이었어도
상관은 없었네,
단지 조금 이르거나 늦은 개찰일 뿐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11월은 당신의 기억 속에 영원할 것이네
아무도 그걸 기억하지 않겠지만
당신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도
안개가 다섯시에서 여덟시까지
당신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도

 

 

풀잎처럼 눕다 / 권혁웅

 

 

  풀잎처럼 눕다 풀잎에 한 여자를 빗댄 적이 있었지 아무도

지나치지 않는 새벽이었어 목길에 접어드는데 내게 휘청하며

몸을 기댄 그런 풀잎 말이지 거기에도 길이 있고 여관이 있고

폐허가 있었어 그녀를 한 번 건드리면 그 세상 다 쏟아졌을

거야 나는 조심조심 골목길을 돌아나왔네 가령 먼지처럼

쓸쓸한 날에는 그 풀잎이 생각나곤 해 가볍게 가볍게 그 여자

위에 앉고 싶었지 더럽히고 싶었어 둥글고 푸른 등허리를

내가 보아버렸던가? 골목은 돌아가도 돌아가도 끝이 없고

풀들은 나를 전송하며 길가에서 손을 흔들었다네 지금도

골목을 돌아가면 그녀가 길 끝에서 나를 기다릴 것 같아 푸른

옷소매가 가끔 꿈에서 보여 나도 풀잎처럼 가만히 눕고 싶었어

그러면 그녀는 제 몸의 무늬를 보여주겠지 그 무늬 속에 숨고

싶었어 그래 맞아, 나는 물그림으로 된 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네

 

 

파문 波紋 / 권혁웅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2003년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에서

 

 

 
 

출처 :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메모 : 환유, 환유, 권혁웅

'이야기舍廊 > 좋은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북극 거미 - 홍일표  (0) 2015.11.16
[스크랩] 노래하는 화살촉 / 최승호  (0) 2015.11.16
초가을 / 김용택  (0) 2015.09.01
별/김태형  (0) 2015.08.19
-비밀 정원/배옥주-  (0) 2015.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