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신문문예 당선 시 작품에 대한 이해>
소통되지 않는 이 시대의 문학
-----시인 유창섭 前) 월간모던포엠 편집주간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 시기는 신춘문예에 대한 열망과 꿈이 난무하는 시기이다.
수 천 수 만의 꿈들이 날개를 달고 세상으로 나오는 날이다. 그러나 그 꿈의 향연에서 주인공이 되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꿈을 저버리지 못하고 수많은 날 동안 불을 밝히며 그들은 시를 썼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꿈을 현실화시킨 신인 시인들이 등장하는 이 축제를 보고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뿌듯한 일이다.
매년 되풀이 되는 것 같은 이 축제에 나타나는 시에 대한 궁금증과 그 당선 시를 읽으며 우리 현대시의 흐름과 변화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이제 2000년대 초에 난무하던 산문화 경향과 난해시 경향은 어지간히 정리되어 타협점을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결과 시의 형식이 변하고 내용이 그 형식에 맞게 진화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1) 2016년 신춘문예 시, 형식과 내용의 변화
시의 형식면에서는 이번에 인용한 21개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 시중 3편---농민신문 “농민 6호”(김우진), 동아일보 “뿌리에 대한 식물학‘(조상호), 영주일보 ”맹목“(김종화)---이 산문시 형식을 취하고 있고, 나머지 17편의 당선작품은 자유시 형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산문시의 퇴조라기 보다는 현대시가 한 행을 구성하는 행가름이 짧았던 과거에 비해 길어진 장문의 행을 택함으로서 산문적 길이의 형식에 가깝게 진화하였다는 점에서 산문화의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내용면에서도 압축된 정서를 세분화시켜 각 행에 많은 수식어로 장식하여 개별적인 정서로 분화시키고 있다는 인상이 짙어 보였다.
다소 과거에 난무했던 난해한 경향이 줄어들고는 있다 해도 최근 신춘문예 당선 시 역시 갈수록 모호성이 두드러져서 난독증을 해소시키지 못하는 부정적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구체적인 언술에서 일탈된 추상적 관념의 언어유희가 지나쳐 시를 쓰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언술로, 시를 감상하고 그 의미를 공유하면서 정서적 교감을 해야할 독자들과의 소통의 길이 꽉 막혀 있다. 언어와 언어의 시적 관계가 헝클어져 도대체 무엇을 왜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허다하다. 언어를 비틀고 상징의 형상을 파악하기 어렵도록 감추어 놓는 것이 마치 신춘문예의 기본적인 속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얽어 놓아 그 중심이미지 조차 간추려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은 하나의 병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됨으로서 신춘문예는 독자와의 소통이나 이해를 어렵게 하여 시가 독자와 유리되는, 특정 계층에나 향유되는 사치한 취미의 영역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를 가지게 한다.
이러한 변화는 시적 정서를 교감하고 함께 감동할 수 있는 “감동의 시학”보다는 매우 이지적이고 분석적인 이해를 요구하여 “감동에 이르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누가 뭐래도 시는 감동이다. 감동이 없는 시는 추상화를 보는 것 같은 얼떨떨한 묘한 심정을 가지게 한다. 시인 자신이 자신도 감동하지 못하는 시를 써 놓고 독자에게 감동을 느끼라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만이다. 그러한 시적 감동이 미약한 시들이 신춘문예 전반에 걸친 느낌이라면 과언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번 신춘문예 작품을 심사한 심사위원들의 전반적인 시적평가를 인용하여 그러한 전반적인 경향에 대한 인상을 종합하여 보기로 한다. 아래에 인용한 부분은 각 심사위원들의 견해를 밝힌 평가의 부분을 요약하여 본다.
언젠가 필자는 좋은 시에 대하여 (1) 감동…울림 (정서적 감동과 철학) (2) 소리…음악 (글을 읽으면 소리가 들려야 한다) (3) 정황…미술 (글을 읽으면 눈을 감고도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과 같은 세가지 요소를 종합 예술적 의미로서의 [시의 美學]으로 인식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신춘문예 작품을 심사하는 과정에서도 “좋은 시는 어떤 것인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변치 않는 것은 좋은 시는 음악성(가락ㆍ리듬)과 회화성(그림ㆍ이미지)을 잘 갖추되 삶을 이끌어 올리는 힘이 엿보여야 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는 있지만 보지 못하는 그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데 시의 운명과 책무가 있는 것이다.........그런데 '시는 짧고 소설은 길다'라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모르고 지나치게 지루한, 마치 콩트나 단편소설의 한 대목을 잘라다 놓은 것 같은 작품들이 많아 작금의 한국시의 병폐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현대시의 특징 중의 하나인 판타지의 기법이 너무 지나치게 드러나서 시적 리얼리티 즉 감동이 따라갈 수 없었다.” (광남일보/김준태)고 술회하였다.
“응모작들의 주된 주조는 경기부진과 어려운 세태, 사회 혼란 탓인지, 거시세계보다는 미시세계에 가까웠다. 자영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시편들도 여럿 있었고, 일상의 소품들과 거리 풍경, 자연, 가족간의 관계에 대한 해석들이 많았다.”(경남신문/김언희.성윤석))
“시적 수준이 모두 만만치 않았다. 다 무엇인가가 있었으나 또 무엇인가, 한 가지 부족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너무 많이 말하고 있다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말하지 않아 필연성이 결핍된 작위적인 시를 보여주고 있다거나, 그럼으로써 진정성과 절규성이 결여되었다거나 했다.” (경상일보/강은교 )
“우선, 왜 아직도 시가 쓰이는지 다시 확인했다.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삶에도 그 속에는 사람들의 온기가 스며있다. 그 온기는 다시 사람으로서 주어진 생을 살아가게 하는 어떤 의지 같은 것으로 전환된다.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그 어떤 의지 중에 시를 쓰는 것이 한 자리 차지한다면 지나친 의미 부여일까. 고통스런 세상이지만 생의 의미를 탐색하고 자신을 위로하며 수많은 다름과 연대하게하는 공감감정의 지렛대로서 시 쓰기가 작동하고 있음에 마음이 뻐근했다.
........그러나 결국 타자와 관계하면서 생기는 불화와 불온의 서정에 더 주목하고자 하였다.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이해불가의 관념세계에 갇히기보다는 연약하더라도 괴물 같은 세계와 대결하는 소통적 공감 서정이 아직도 시를 써야 할 이유가 아니겠는가에 천착하였다.“ (무등일보/조진태)
“최근 신춘문예 응모 시는 갈수록 모호성이 두드러지는 부정적 특성을 지닌다. 구체에서 일탈된 추상과 관념의 언어 유희가 지나쳐 소통의 길이 꽉 막혀 있다. 언어와 언어의 시적 관계가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 도대체 무엇을 왜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배배 꼬인 언어의 꽈배기를 맛도 보지 못하고 마냥 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도 인간을 위해 쓰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인간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갈수록 그 소통의 길이 막혀있다. 이제는 시의 불통마저도 유행인가. 불통으로 훈련된 투고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분별없는 불통의 세계에서 분별 있는 소통의 세계로의 전환이 시급한 시점이다.“ (문화일보/황동규.정호승)
“시에 끌어들인 특수한 성격의 언어들이 이 세계의 보편적이고 균형적인 감각을 확보하고 있는지, 그리고 발설하고 싶은 개인의 일과 발언해야 하는 집단의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과정을 거쳤는지 등을 살펴보게 된다.” (전북일보/문효치.안도현)
“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두루뭉수리여서 쓴 사람 혼자만 읽고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할 시를 읽게 되는 고통은 무척 컸다.
......한 예에 불과하지만 최종심에 오른 시는 대부분 시 스스로 독자의 이해를 거부한다. 현란한 기교가 난무하고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산문성이 두드러진다. 시의 심장이 은유라면 그 은유의 심장이 피를 흘리다 멈춘 듯하다. 다양성이 미덕인 시대에 그 다양성을 긍정한다 해도 지나칠 정도로 관념적이다. 마치 관념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이는 서정과 구체에 뿌리를 내린 비관념적 소통의 시는 이미 낡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는 낡았든 새롭든 소통의 통로를 통해 써야 한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흐르지 않는 꽉 막힌 수도관을 통해서는 물 단 한 잔도 받아 마실 수 없다. 그동안 한국 시단은 뒤틀린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구축된 불통의 시를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방치해왔다. 행과 연 구분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필연성이 결여된 산문 형태의 시와 관념적 불통의 시가 한국 현대시의 미래라고 여기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오늘의 현상은 한국 현대시가 어떤 한계에 다다른 부정적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일보/정호승.문정희)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수준은 높으나 서로 유사한 시적 문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내적 필연성과 절실함이 부족해 보였다. 신인다운 가능성과 패기라는 잣대만으로 보자면 아쉬웠다. 새로움이란 언어와 형식의 새로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세계가 드러내거나 감추고 있는 현상을 감지하여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언어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인식이나 사유를 언어화 할 수 있는 시적 감각이 필요하다. 시적 감각이란 사유의 깊이만으로도, 언어를 부리는 능력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앙일보/이문재.조용미)
“신춘의 경향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작품들, 대체로는 산문시가 적지 않았다. 리듬감을 무시하거나, 현란하고 모호한 언어의 기교로 내면의 고백에 치중하고 있는 것도 거슬렸다. 간혹 내용이 허술한 경우, 정작 시가 지녀야 할 응축과 긴장성 등의 요소를 담보하지 못하거나, 내용이 있어도 감정의 과잉, 단순 발상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었다. 좋은 시는 시인의 내면과 외피를 아우르는 치열한 과정에서 탄생하지 않는가.” (한라일보/김병택.허영선)
2) 표현기교에 치우친 시
시적정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시적정서를 표현해 내는 시인의 표현에서 참신하고 싱싱한 감성이 전달되는 보다 예각적인 표현이나 새로운 시적발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지나치게 자기담론---자신만이 알 수 있는 언술---에 빠지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 표현이 가져다주는 일관성있는 상징과 어울려 시적정서의 확장에 기여하는 수식적 기교가 감동에 이르도록 연결성을 유지해야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 당선작품은 모두 합리적이고 문장의 적합성을 유지하여 정서적 폭발력을 가진 형태로 쓰여진 작품인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 남는다.
앞에서 인용한 심사위원의 지적에서도 ‘리듬감을 무시하거나, 현란하고 모호한 언어의 기교’에 머물고 있는 점이 지적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새로움이란 언어와 형식의 새로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세계가 드러내거나 감추고 있는 현상을 감지하여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언어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인식이나 사유를 언어화 할 수 있는 시적감각’이 결여된 작품이 많다는 점도 새겨들어야할 대목이다.
3) 심사의 다양성에 대한 의구심
매년 지적되고 있는 실상이지만 심사위원들의 면모는 조금 개선되어 나가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몇 십년동안 심사위원으로 앉아 장기 집권을 누리는 귀족 심사위원들이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어 한국시의 발전에 그들이 저해요인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어떤 시인(2명)은 이번에도 3개 신문의 심사위원을 맡아 신춘문예제도 아래에서 그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그 이외에도 고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들의 명성을 누리며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그러므로 아직도 한국 현대시의 사색적 틀이 그들의 철학이나 문학적 가치에 지배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물론 그들이 한국시의 발전을 끌어내리며 퇴영적인 사고의 틀에 묶어 놓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 아래에서 우리 현대시가 진화하고 있는 형식이나 내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게 되리라는 의구심은 제거하기 어렵지 않을까?
4) 신춘문예 당선 시와 심사평 요약
이제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뽑힌 시 당선작과 그 심사평을 요약하여 아래에 붙인다.
이 시들을 읽으면서 신춘문예의 새로운 경향과 흐름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2016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문귀숙
둥근 길 / 문귀숙
허풍빌라에서 내린,
수백억 상속녀가 떨어뜨리고 간
셀 수 없는 동그라미의 말들
깔깔 거리다 휘청거리며 사라졌다
꽃뱀의 뱃속 같은 골목을 후진으로
나오는 오늘 일진은 구부러진 끗발이다
금요일을 발광하는 네온사인을 비켜선
흐린 그림자 하나, 번쩍 손을 들었다
뒷자리에 앉자마자 웅얼거리는 목소리
백미러로 읽어야 하는 목적지가
번져 읽을 수 없다
붉은 신호등 하나를 넘으며 자정의 경계를 넘었다
어떤 넋두리도 용납되는 할증의 시간
갈림길 마다 좌회전을 외치며 더 흐려진 그림자
젖은 넋두리에 수몰된 길을
재탐색하라고 내비*가 얼굴을 붉힌다
붉은 기운이 부족한 사납금만큼 미터를 올리고
대낮처럼 환한 불면의 광장을 지나고
늙은 벚꽃나무가 떨어뜨리는 흐린 시간을
지나 돌고 돌아도 이어지는 길
더 이상 택시로는 갈 수 없는 길
내비가 멈췄다
그림자의 손가락 끝에 만월이 걸렸다.
*내비게이션
약력
▲1964년 전남 진도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5ㆍ18문학상 동화 당선 ▲현재 국립5ㆍ18민주묘지 근무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일곡시회 동인
[2016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당선작, 詩를 밀고가는 힘 좋았다"
......마지막으로 '둥근 길' '플라잉 가이' '장구' 등 3편을 응모한 문귀숙 씨는 전체적으로 작품의 구성이 탄탄하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시적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시를 밀어 올리는, 끌고 가는 힘(에너지) 그리고 시적 의지가 좋았다. 음악성과 회화성 그리고 민요정신(Ballad Esprit)을 두루 갖춘 점이 크게 사줄만했다.
다만 모더니티와 언어의 나이브한 참신성, 리리시즘의 부족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우리시대를 깊이있게 통과하는 담론을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동시에 보여주면서 정진하기를 기대해본다. .........(심사위원 ; 시인 김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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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앵두나무 상영관- 진혜진
신호등은 봄을 켠다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그루
이 도시에 앵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길목마다 앵두나무를 심었다
우듬지에 앵두가 켜지는 순간, 몇 갈래의 속도가 생긴다
몇 분 간격으로 익어 터지는 앵두
비와 졸음 사이에 짓무른 앵두
붉은 앵두는 금지된 몸에서만 터져 나온다
한 쪽 눈을 질끈 감는 사이
길바닥에 누운 흰 사다리를 오른다
아이가 손을 들고 소나기 그친 사이를 뛰어간다
할머니는 한 칸 한 칸 신호음 사이를 건너고 있다
사람들이 마중과 배웅으로
사다리를 건너면 앵두의 색깔이 바뀐다
빨강을 물고 순식간에 달려가는 계절이 다른 계절의 입술에 물리듯
앵두나무 뿌리는 발설되지 않은 소문까지 뻗어있다
앵두가 지고나면 초록 이파리
여름 정원에 비비새 울음으로 남아
그 울음 끝으로 떨어질 이파리로 남아
세를 불리는 앵두나무
공중으로 발을 들어 올린다
언제라도 짧은 치마를 입듯 가벼운 신호음
떠나갈 사람과 돌아올 사람의 안부가 위태로워
처음 같은 얼굴로
막을 내리지 못하는 봄이 있다
[2016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활물의 비유 개성있게 선보여
.......이미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시집 한 권 정도 분량의 작품을 가졌음직한 자유로움과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이 당선 후 일 년 만에 대부분 사라지는 상황에서 시를 오래 쓸 것만 같은 신인을 만나 기뻤다. ‘앵두나무 상영관’은 앵두를 거리의 빛에 대비해 사람의 내면과 일치시키는 활물의 비유를 개성있게 선보인 작품이다. .....
(심사위원 김언희·성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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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일보 2016 신춘문예 시 당선작-]
페가를 어루만지다 / 양진영
허물어지는 것은 새것을 위한 눈부신 산화
나는 철거될 농가의 마룻바닥에 가만 귀 기울인다
그들이 나눈 말이 옹이구멍에서 바스락대고
안 보았어도 떠오르는 정경이 살포시 열린다
문풍지에 꽃핀 청태靑苔는 그들의 회한 혹은 눈물의 자국
뒤틀린 문틀만큼 가족이 부서지는 아픔도 맛보았으리라
거북 등처럼 갈라진 목재에 왜,
산골에서 밭을 일구고 사는 노모의 손등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인연의 무결이 배어 있을까
헐리는 것은 거룩하다 그것은 촛농과 마찬가지
스스로를 태워 주위를 밝히고 남은 잔해이므로
뜨락에 소나무는 송홧가루를 날려 금빛 보료를
까는데
새집을 짓는다는 설렘은 어디 가고 나는
누가 잠든 것 같아서
누가 숨어서 부르는 것 같아서 자꾸만
방바닥을 어루만진다
평생 주인을 덥히며 보낸 폐가의 일생은
불이었다
나는 안방에 누워 그들의 온기를 느낀다
코끝을 간질이는, 낯익은 엄마 냄새
햇볕을 모아 따스함을 지피는 구들장
그 열기로 앞뜰에 꽃이 피고 있다
-약력-
●1958년 광주 출생·한국외국어대학 졸업 ●(전) 중앙일보 뉴욕지사 기자 ●김만중문학상, 목포문학상, 천강문학상 등 수상
[경상일보 2016 신춘문예심사평]
능숙이 흠일 정도로 시적 구조가 탄탄한 작품
.......마지막으로 남은 시는 ‘폐가를 어루만지다 외’였다. 이 시는 너무 능숙한 것이 흠일 정도로 시적 구조가 탄탄하게 직조돼 있을 뿐 아니라 그 표현의 능숙함, 그에 더불어 진정성도 느껴지게 하며 그 절규도 강하게 전해왔다. 함께 응모한 시들의 수준도 고르다고 생각됐다. 따라서 ‘폐가를 어루만지다 외’를 당선작으로 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인에게 걱정되는 것은 앞에 언급한 시적 재능들 때문에 너무 이른 정형화에 이르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시의 정형화란 상투화이며, 화석화이다. 그점을 염두에 두면서 계속 정진한다면 뛰어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한국 현대시의 별이 되기를…. (강은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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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2016 신춘문예 시 당선작]
대봉/김이솝
파르티잔들이
노모의 흐린 눈에 가을을 찔러 넣는다.
턱밑에 은빛 강물을 가두고 은어 떼를 몰고 간다.
쿵! 폭발하는 나무들.
온통 달거리 중인 대봉 밭에
감잎 진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우는 섬진강변.
귀를 묻고 돌아오는 저녁.
(*) 1962년 대전출생 /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 현재 (주)해외인증센터 근무
[2016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역사의 질곡이 준 상처를 보듬기 위하여
......당선작은 신춘문예 역사상 유례가 없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다 죽어간 두 파르티잔(빨치산)과 죽음을 지켜본 어떤 여성의 생을 다룬 시다. 현대사와 가족사와 개인사가 중첩되어 있는데 시는 짧다. 한국전쟁 전에, 전쟁 과정에, 그리고 휴전 후에 몇 명이 지리산 일대에서 죽어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울던, 고인의 어머니와 아내는 이제 연로해 몸도 마음도 성치 못하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의 그 생혈은 눈물일까 홍시일까. 눈도 귀도 어두운 노파는 눈이 잘 안보이는 이유가, 귀가 잘 안 들리는 이유가 노환에만 있지 않다. 그 시절에 젊은 아낙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60년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임을 알고 있는 시인의 역사의식을 두 심사위원은 높이 사기로 했다. 생략과 비약이 좀 심한 것이 약점이지만 독특한 은유법과 의미심장한 상징화는 칭찬해줄 만한 장점이다.
■심사위원 ; 최동호(시인, 고려대 명예교수)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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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6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의자가 있는 골목- 李箱에게 / 변희수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경향신문 2016 신춘문예심사평]
기존 틀 차용했지만 사유를 끌고가는 의식 우뚝
..........‘투명한 발목’과 ‘의자가 있는 골목’을 최종심으로 놓았다. ‘투명한 발목’은 섬세하고 예민하고 차분한 묘사와 어조로 독자를 시의 정황 속으로 천천히, 깊게 이끄는 시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시에도, 흠을 잡자고 눈에 불을 켜니, 성근 부분이 있어 아쉽다. ‘의자가 있는 골목’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로 시작되는, 이상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거울’의 말투를 베껴서 쓴, 즉 이상 풍으로 쓴 시다. 새로운 시인을 가려 뽑는 자리에 기존 시인이나 시를 패러디함으로써 오마주를 보이는 시를 뽑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틀 속에 자기 생각, 자기만의 세계가 담겨 있는 점을 높이 샀다. 사유를 길게 끌고 나가는 힘 있는 진술 속에 시인 의식이 우뚝하다......
<시인 이시영·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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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2016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스티커 / 이명우
대문에 붙어있던 스티커를 뜯다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붙는 스티커를 뜯다가
스티커 뜯기를 멈추고 산동네를 떠났다
멈추고 떠날 때는 다 지운 것이어서
지운 것은 없는 것이어서
없는 여기 산동네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 몰랐다
대문을 겹겹이 도배한 스티커 화려하기조차 했다
긁히고 찢긴 조금도 아물지 않는 가업
허파와 심장과 위장이 모두 철대문에 붙어
겨울 냉기를 고스란히 빨고 팽팽해졌다
추락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력서를 쓰고 찢고 쓰고 찢었던 것
부도난 회사의 대표였던 이력은
지급기일을 넘긴 어음처럼 휴지였던 것
부도를 막기 위해 오래전에 빌린 사채가 펄럭이며 휴지를
산동네 꼭대기까지 얼마나 난타해댔던가
골목을 돌며 전봇대 기둥과 자주 부딪친다
골목에는 늘 똑같은 소리로 이자가 와 달라붙는다
눈치 없는 거미줄에 발걸음에 와 걸린다
발이라도 와 걸어주는 이것이 거미줄의 눈치
잠만자는직장여성환영 오십세이상알바모집 선원大모집
배달부즉시출근가능 일수당일대출 신용불량자도대출可
얼어붙은 전봇대를 덮이는 환영, 가능, 대박,
대문에 붙어서 스티커를 뜯어내고 있는 아들이 보인다
컴퓨터 게임 대신 싫증 모르는 스티커 뜯기 놀이
경첩이 떨어지려는 대문을 어서 받쳐보려는데
어제까지 떼어낸 적색 신불자대환영 스티커가
어린 아들의 등에 세습처럼 붙어 있다
▶약력=1959년 경북 영양 출생. 영양고 졸업. 현재 서울에 살며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음. 제1회 2400만 원 고료 암사동유적 세계유산 등재기원 문학작품 공모 대상(2013년).
[국제신문 2016 신춘문예 시 심사평]
삶 현실감 있게 보여준 공감 능력 높이 평가
........그래서 이윤하의 '4분 3박자로 반달이 지나간다'와 이명우의 '스티커'가 최종 논의 대상이 되었다.
전자는 개성적인 상상력이 장점으로, 후자는 삶의 진정성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공감력이 높이 평가되었다.
오랜 고민 끝에 고단한 오늘의 삶을 무리 없이 이미지화한 후자에 심사위원 모두가 더 공감하여, 이를 당선작으로 밀었다. ....
심사위원 남송우 문학평론가, 박남준 안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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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문 2016 신춘문예-시 당선작]
농림6호 / 김우진 <경기 부천>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볍씨를 담갔다. 바람 한 잎과 구름을 벗겨낸 햇살도 꺾어 넣었다. 봄 논의 개구리 울음도 잡아다 넣었더니 비로소 항아리가 꽉 찼다.
나흘 밤의 고요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항아리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저 경건한 나흘, 지나가는 빗소리도 발끝을 세우고 갔으며 파란색 바람이 일렁이다 갔으며 또한 파란 별들이 농부의 발목 근처에서 무수히 떴다 갔다.
항아리 속에서 적막의 힘이 차오른다. 씨앗들이 뿜어내는 발아의 열, 항아리가 드디어 익어가기 시작한다. 촉촉이 스며든 물기에 몸을 여는 씨앗들, 부드러워진 껍질을 걷어내며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귀가 열리고 부리가 생겼다. 몸속에 숨겨둔 하얀 발을 내밀었다. 흙이 묻지 않은 순결한 발들, 뿔을 달고 푸른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도란거리는 그들 모습을 보고 나는 씨나락경전을 듣는다.
적막은 발아의 요람
작은 항아리 속에서 거대한 우주가 발아하고 있다.
●‘농림6호’는 1960~1970년대 재배된 볍씨 품종.
●김우진 ▲1949년 전남 광양 출생 ▲경기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8년 수주문학상 수상, 2008년 전국문화인 창작시 대상 수상
[농민신문 2016 신춘문예 심사평]
“위축되고 시들어가는 현실속 희망의 응원가”
......마지막으로 남은 ‘깻단은 기억해야 할 이름처럼 묵직했다’와 ‘농림6호’는 시를 위한 시가 아니고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상이 발현된 시라 체득한 비유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높이 보았다.
제목이 당돌한 ‘농림6호’는 생명의 움틈을 세밀하고 애정에 찬 눈으로 바라다보며 자연의 신성을 발견해내는 시안이 깊어 좋았다. ‘농림6호’를 당선작으로 결정한 이유 중에는 위축되고 찌들고 시들어가는 시대의 현실에 희망의 응원가를 들려주고 싶은 선자들의 마음도 작용했음을 밝혀 둔다. (심사위원 ; 황인숙 함민복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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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16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 조상호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혀가 있다 행려병자의 시체 같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그림자 달은 빙산이 되어 은빛을 풀어헤친다 물빛을 깨고 비치나무 냄새 번져오는
젖을 희끗희끗 빤다 안개, 서늘한 빗방울, 물방울 띄워올린다 뿌리가 부풀어오른다 물거품처럼
웅웅거리고 부서지고 내장처럼 고요 쏟아져 내리고 내려야 할 역을 잃고 흘러가는 페름 행 전신주 흰 눈송이들 백야의 건반을 치는 사내 ―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 길고 가는 손가락 갈라지고 떠도는 핏방울 소용돌이 변두리로 나를 싣고 창 밖 쁘이찌 야흐 행 마주보며 또 길게 늘어나고 민무늬 토기처럼 얼굴 금이 가고 스쳐가는 가문비나무 그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이는 시간 산란하는 밤의 시작을 경계를 지나 나는 또 바라보고 있고
마젤란 펭귄들 발자국 소리 울음 아 미역줄기처럼 늘어지고
움푹 파인 자국발자국들 혀 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 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종종 걸어나오고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
[동아일보 2016 신춘문예]
심사평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외 4편은 상상력으로 시를 끌고 간다. 은유된 언어의 머뭇거림과 확장, 빠른 질주와 멈춤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시는 마치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처럼 언어로 만든 점과 선, 리듬으로 시에 여러 개의 경계를 설정한다. 동시에 언어적 상상으로 세상을 더듬어 나가고, 더불어 떠나고, 정신의 세계를 어루만진다.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음운과 음운들이 서로 조응하면서 달려간다. 시의 ‘입술을 달싹’여 저 마젤란 펭귄이 사는 곳까지 뿌리를 내리며 가는 것이 아마도 이 시인의 ‘식물학’ 이리라. 논의 끝에 응모작 5편 모두 고른 시적 개성과 성취를 가진 점을 높이 사서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 ; 황현산 문학평론가. 김혜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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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일보 2016신춘문예 당선작 시]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 지 연
무덤 자리에 기둥을 세운 집이라 했다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었으므로
무너진 방을 가로질러 뒤안으로 갔다
항아리 하나가 떠난 자들의 공명통이 되어 여울을 만들고 있었다
관 자리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던 일가는 어디로 갔을까?
한때 그들은 지붕을 얹어준 죽은 자를 위해
피붙이 제삿날에 밥 한 그릇 항아리 위에 올려놓았을 것도 같고
그 밥 그릇 위에 달빛 한 송이 앉았을 것도 같은데
지금은 항아리 혼자 구멍 뚫려
떨어지는 빗방울의 무게만큼
물을 조용히 흘러 보내고 있었다
산자와 죽은 자의 눈물이
하나가 되어 떠나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이 세상에 무덤 아닌 곳 없고
집 아닌 곳 없을지도
항아리 눈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이팝꽃이 내 어깨에 한 송이 툭 떨어졌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후두둑 그 집을 뛰쳐나갔다
비가 오는 날 내 방에 누우면
집이기도 하고
무덤이기도 해서
내 마음은 빈집
항아리 위에 정한수를 올려놓는다
[무등일보 2016신춘문예 심사평]
죽은 자와 산자의 공명통인 항아리 참신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는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는 물론, 떠난 자와 남아있는(새로 들게 된)자들의 공명통인 ‘항아리’가 참신하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들은 그가 거처할(하는) 집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간이며 미래의 누군가의 집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에 가득 채워놓으면 안된다. ‘빈집’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명통을 울게 해야 한다. 거기에서 꽃이 지고 새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는 때 “진흙이 흘러내리”는 집을 찾아서 “항아리” 하나가 “공명통”으로 집의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빈집”에 가보고 싶은데 “정한수” 보다는 술 한 잔 괴어 놓고 귀 기울이다가 그 공명통을 박살 내버리는 것은 어떨까. 정답 같은 마무리가 아쉽다는 얘기이다. (심사위원 / 조진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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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016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수 / 김재필
하염없이 눈물 쏟는 애인을
또 하염없는 입맞춤으로 달래본 사람이 알 것이다
같은 이에게 다른 피가 돌 때가 있단 사실을
지뢰를 밟았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아직 발 떼지 않았다는 것
너는 위험한 마음으로 바닥을 문지른다
너도 이제 그만 목소리를 내보려 한다
그러나 침묵하고 싶지 않을 때에야 침묵다운 무거움이 온다는 걸
우린 이제 알고 있다
네 혀에 도달할 문장을 기다린다
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늘어지는 고드름처럼
오랠수록 흉기가 되는
조금씩 심장 가까이
이 겨울 속으로 완전히 입수하기 전에
[문화일보 2016 신춘문예 심사평]]
최근 응모작 추상·관념의 유희 과해 … ‘입수’ 소통의 모호성 벗어나
.......당선작 ‘입수(入水)’(김재필)는 비교적 소통의 모호성에서 벗어난 시다. 내가 너(애인)의 사랑의 강물 속으로 입수하는 과정의 순간을 짧으나마 극명하게 그렸다. ‘지뢰를 밟았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아직 발 떼지 않았다는 것/ 너는 위험한 마음으로 바닥을 문지른다’라는 표현은 이 시의 백미다. 지뢰를 밟았을 때 발을 떼면 생명을 잃게 되므로 발을 떼지 않고 있는 상태, 그 절체절명한 상태에서의 기다림과 그리움이 이 시의 전체적 정조를 이룬다.
다른 시에 비해 작품성이 높다는 장점도 있지만 소통이 가능한 시라는 장점에 더 마음이 기울어져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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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2016 신춘문예 시 당선작]
큐브 / 강기화
면을 돌린다
네 개의 뿔을 가진 성난 눈초리
다가갈 수 없는 모서리
익숙하지 않은 경계
면을 돌린다
반듯하게 줄을 긋는
곧은 대답
전설처럼 등지고 있는 벽
위로받을 수 없는
네모의 의혹은 커지고
수상한 귀퉁이의 각은 증명한다
면을 돌린다
중앙을 공격한다
눈을 뜬다
놀이가 된 도형
일정한 방향으로
서로 맞춘다
다시 면을 돌린다
갇혔다가 풀려나는
매혹을 느끼며
활기차게 뛰어든다
비즈니스센터의
저녁 창문은
퍼즐의 공식
밀폐된 면과 면이
독기를 띠며
부활한다
[부산일보 2016 신춘문예 심사평]
'큐브'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 참신한 표현 돋보여 '봄눈' 가락의 묘미, 회화성,연가류의 애틋함 조화
........이에 비해 '큐브'는 작품 전체가 우리시대의 문제의식을 참신한 발상과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고, 무엇보다 투고된 다른 작품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으로서 가져야 할 전망에 대한 가능성이 풍부하다는 점이 장점으로 제기되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큐브'를 당선작으로 정하였다........ 심사위원 오정환·이우걸·김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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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2016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봄 / 한상록
보십시오. 내게 빈 하늘을 열어
가벼운 마음 옷차림으로 흙을 밟게 하십시오
어디선가 두엄 지피는 향내 그윽하고
새살 돋는 들풀의 움직임 간지럽지 않습니까
돌아오지 않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꿀벌의 잉잉거림 속에 묻어오고
겨우내 강을 건너지 못했던 나무들의 희미한 그림자가
아지랑이 실핏줄로 살아나지 않습니까
잃은 것이 있다면 내 뜰로 와서 찾으시지요
이제 내 뜨락에 샘을 내므로
흩어진 목숨붙이들 찾아 모으려 합니다
바람만 드나들던 수족관을 가셔내고 맑은 수면에다
튀어오르는 날빛 지느러미를 풀어놓으면
찰랑거리는 햇빛을 입고 내 생의 물보라 아름다울 겁니다
옥상에 내어걸린 빨래 나날이 눈부시어가고
누군가가 돋움발로 벗어붙힌 몸을 넘겨다 보면
산록의 묵은 잠을 흔들어 놓을
아스라한 진달래향 더욱 곱지 않겠습니까
저 만치 다가오는 나무들의 길이 보이고
새순같은 배꼽을 드러낸 개구쟁이 아들놈
동화 속의 악당을 찾아 타앙 탕 말을 달리면
그 길목을 따라 몇굽이의 강이 흘러서
우리의 얼어붙은 꿈도 촉촉이 적셔지지 않겠습니까
[불교신문 2016년 신춘문예 심사평]
재주 부리지 않고 평상심 거스르지 않았다
뽑는 자는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을 바라는 자이기도 하다..........‘봄’의 인상은 첫째 안정감이다. 들쭉날쭉하지 않다. 재주 부리지도 않는다. 언어에 무리가 생기는 일이 드물었다. 진부한 표현이 한 두군데서 걸렸으나 작품 전체의 평상심을 그다지 거스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심사평 고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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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2016년 신춘문예 시 당선 작]
가족 / 정선희
공손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향해 규칙적으로 다가갔다
흑백으로 갈라지는 길들이 뒤섞이더니
우리 사이는 점점 간격이 사라졌다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다는 것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입 안에선 쉬지 않고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위험했다
돌을 던지고
끝까지 서로를 모른 체하고 싶었다
길이 팽창하고
수거함엔 깨어진 얼굴이 가득하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한번 시작한 길은 멈출 줄 몰랐다
▲1961년 경남 거창 출생 ▲2011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수상
[서울신문 2016 신춘문예 심사평]
깔끔한 표현으로 서정적 구체성·투명성 살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결국 정신희씨의 ‘가족’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전언의 구체성과 깔끔한 표현, 그리고 착상과 비유의 과정이 안정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 시편은 규칙적으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맹목과 위험을 동시에 지닌 관계로 ‘가족’을 파악한다. 물론 이러한 파악이 정신희씨만의 개성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당선작은 그러한 파악을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표현에서 보이는 긴장과 예각적 균열을 통해 보여주고, 나아가 ‘길’의 뒤섞임, 팽창, 멈출 줄 모르는 질주의 형상과 그것을 어울리게 하면서 서정적 구체성과 투명성을 동시에 살려주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점 여러모로 신뢰를 주기에 족했다. ▲ 심사위원 정호승 시인, 유성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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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16 신춘문예 시 당선작]
타크나 흰 구름 / 이윤정
타크나 흰 구름에는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배웅이 있고 마중이 있고
웅크린 사람과 가방 든 남자의 기차역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엔 출발보다 도착이, 받침 빠진 말이
받침 없는 말에는 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있다가 사라진다
흰 구름에는 뿌리 내리지 못한 것들의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자정을 향해 흩어지는 구두들
구두를 따라가는 눈 속에는 방이 드러나고
방에는 따뜻한 아랫목, 아랫목에는 아이들 웃음소리
몰래 흘리는 눈물과 뜨거운 맹세가 흐른다
지금 바라보는 저 타크나 흰 구름은 출구와 입구가 함께 있다
모자 쓴 노인과 의자를 잠재우는 형광등 불빛
그 아래 휴지통에 날짜 지난 기차표가 버려져 있다
내일로 가는 우리들 그리움도 잠 못 들어
나무와 새소리, 새벽의 눈부신 햇살이 반짝이고
어제의 너와 내일의 내가 손을 잡고 있다
새로운 출발이 나의 타크나에서 돌아오고 있다
우린 흘러간 다음에 서로 흔적을 지워주는 사이라서
지우지 않아도 지워지는 얼굴로
지워져도 서로 알아보는 눈으로
뭉치고 흩어지고 떠돌다 그렇게 너의 일기에서 다시 만나리
[세계일보 2016 신춘문예 심사평]
오랜 시적 연마 느껴지고 서정적 언어 돋보여
........김은지의 작품은 시행을 밀어나가는 힘이나 사물을 관찰하는 시선이 세밀하고 좋았지만 전반적으로 시행의 압축보다는 다변의 서술에 의존하고 있어서 시적 언어의 절제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 아쉬웠다.
이윤정의 작품은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면서 적절한 균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일차적 장점이었다. 우리 시단에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는 새로운 시인으로서의 자격도 갖추고 있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면 이규정의 ‘오르막에 매달린 호박’과 같은 작품은 시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어 주저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윤정의 작품을 놓고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느냐를 정하기 위해 좀 더 논의했다.
‘모자는 우산을 써 본적이 없다’의 경우는 새롭기는 하지만 접속어가 많아 시행의 흐름이 일부 어색했고, ‘흔적의 이해’는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조금 관념적이어서 구체성이 약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타크나 흰 구름’이 당선작으로 적정하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했다. 오랜 시적 연마가 느껴지는 다른 시편들의 안정감도 이런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심사위원 ; 최동호.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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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영주일보 2016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맹목 / 김종화
너의 서식지는 날짜 변경선이 지나는 곳,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가방 속에 접어 넣은 지도의 모서리가 닳아서 어떤 도시는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오늘의 해가 다시 오늘의 해로 떠오를 적도 부근에 숙소를 정한다 날개를 수선할 때는 길고양이의 방문을 정중히 거절해야 한다 난 철새도 아니고 지금은 사냥철도 아니니까 너에게 이미 할퀸 부분을 다시 또 할퀴는 일 따윈 없어야 하니까
기착지를 뒤적이다 마지막 편지를 쓴다 마지막이 마지막으로 남을 때까지 쓴다 나를 전혀 마지막이라 생각하지 않는 너에게
삼일 전에 보낸 안부가 어제 도착한다 너는 나를 뜯지 않는다 흔한 통보도 없이 너는 멀어졌고 난 네가 떠난 지점으로부터 무작정 흘러왔다 너의 안부는 고체처럼 딱딱하고 나의 안부는 젤리처럼 물컹하다 몸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기미조차 미약하여 난 비행(非行)이 너무나 쉽다
싸구려 여관방에서 보이는 야경이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린다 오늘도 나의 다짐은 추락하지 않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나의 착란은 뼈마저 버린다 너는 결코 이방(異邦)이 아니다 태초부터 회귀점이다
*약력
「열린시학」회 회원 / 부평구정신문 「부평사람들」 취재 기자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재학중
[영주일보 2016 신춘문예심사평]
참신한 비유와 이미지 돋보여
.......모두 나름대로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 양세정의 시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수면’에 반영하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어떻게 하면 시의 삼투압에 흡수되는지 그 방법에 아쉬움이 있었다. 임지나의 시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바탕은 착실히 다져져 있으나, 중복되는 이미지를 걸러내지 않아 산만한 느낌을 주어, 초점화에 실패한 점이 아쉬웠다.
이에 반해 김탄의 시는 주제가 상투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앞의 내용을 극복하면서도 참신한 은유와 환유적인 이미지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모두 소화해낼 줄 아는 능력이 돋보였다. 「맹목」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심사위원 : 김영남(대표집필), 변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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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2016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두더지 반지하 신혼방 / 김상현
가을 산길 위에서 느닷없이 냄새가 혀를 밀어 넣었다
하얀 앞발톱의, 엎어져 있는 두더지 주검
두더지는 반지하 방이 되고 있었다
잘 닦은 화이바 같은, 검은 갑옷의 벌레가
시체에 세 들어 늦깎이 신혼방을 만들고 있었다
주검이 있을 때, 짝을 맺는다는 송장벌레
저 더듬이 끝이 뭉툭한 것은
그 교감도 한때는 부딪혀 옹이 박힌 것
구린 터 속에서도 더듬거리며 전등을 갈겠지
저 등판의 빛은 그들 눈에 모닥불이 타오르는 증거다
자글자글 끓는 된장찌개 투가리, 그런 뜨거움 올린
양은밥상을 들고 거뜬히 문지방 넘는 삶
둘은 두더지를 땅에 묻을 때까지
쉬지 않고 흙을 파내려갈 테지
흙으로, 나무뿌리를 갉았을 몸을 닫고 쓰러진 밑바닥 위에
꽃 장판을 깐 다음
반지하가 지하가 된 방 안에서 서로를 쓰다듬겠지
때로는 이웃 풍뎅이 애벌레와 다툴 일도 있겠지만
샛별 같은 알을 낳고 그 아이들은
가까스로 냄새를 막은 몸의, 한 터럭까지 다 뜯어먹고서야
벽 틈새에 손톱 밀어넣는 것이 햇살이었음을 알겠지
목숨이 윤이 나는 저 까만 옷의 청소부 부부
오늘 같은 초야(初夜)면,
숲 속은 달이 익어 참 부끄럽겠다
*) 김상현 ; 1968년 전북 김제 출생. 2015년 김유정 신인문학상. 2015년 근로자문화예술제 대통령 대상
[전북일보 2016 신춘문예 시 심사평]
"삶에서 희망 발견하는 시각 뛰어나"
.......그런데 시의 뒷부분이 공허한 말장난으로 마무리되는 점이 결정적인 흠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당선작은 김상현의 <두더지 반지하 신혼방>으로 결정되었다. 죽은 두더지의 몸에 깃들어 사는 벌레를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의 따뜻함을 길어 올리는 시인의 시각은 예사롭지 않다. 오밀조밀한 감각의 배치도 뛰어났다...... / 문효치시인 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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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민일보 2016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해花蟹 : 꽃게 / 하송
냄비뚜껑을 열자 꽃처럼 붉은 꽃게가
철갑을 하고 있다
건들기만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듯
엄지발을 치켜든다
뭉툭한 가위로 발을 절단하자
소리를 지르는 것은 꽃게가 아니라
가위였다
골수가 울컥 쏟아지자
바다는 잠잠했다
사는 일은 파도가 잠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갯벌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것
꽃게, 파도가 거칠수록
두 눈 똑바로 뜨고 등딱지에 힘을 준다
한 평생 꽃처럼 배를 보이지 않는 것이 꽃게다
섬 하나가 안테나를 세우고
육지로 나간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
바닷바람에 허리가 꼿꼿하다
바다를 버린 꽃게, 절대 바다를 돌아보지 않는다
◆ [전남도민일보 2016 신춘문예 심사평]
...........끝까지 고심했던 작품은 지연의 <다르미타>와 하송의 <화해>였다. 지연의 작품은 쉬르레알리즘 기법을 연상케 하는 자유분방한 에스프리와 비유 그리고 감각적 묘사가 그간의 문학적 역량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다르미타>라는 제목의 낯설음에서 오는 이질감이 끝내 ‘불꽃의 접점’을 찾지 못해 아쉬웠다.
<화해>는 ‘꽃게와 바다’라는 비유와 상징의 공간 속에서 ‘갯벌 속으로∼몸을 숨기’며 오늘의 고난을 극복해가고자 하는 화자의 자기 고백적 주문이 긴장과 이완의 율조 속에서 하나의 ‘빛’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한 평생 배를 보이 않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결연함에서 일말의 연민을 느끼게 된다.
평이한 듯 보이나 체험이 육화된 그 평이함이 오히려 어떤 결기와 진정성으로 느껴져 앞으로의 가능성에 믿음을 갖고 당선작으로 올렸다. (심사위원 ;김동수<미당문학회장,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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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6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생일 축하해 / 안지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 1992년 8월 6일 서울 출생
-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조선일보 2016 신춘문예 시 심사평]
소통의 詩… 삶· 죽음에 대한 역설적 인식 돋보여
구어체로 이루어진 당선작 안지은의 〈생일 축하해〉는 당선작이 될 만큼 작품으로서 우수성이 탁월했다기보다는 소통 가능한 시가 그래도 이 시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일 축하해〉는 삶과 죽음을 동질 관계로 인식한 바탕에서 쓴 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일상의 순간에 만나 깊은 애증의 대화를 나눈다. 죽음이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이라는, 기일이 생일이고 생일이 바로 기일이라는 이 역설적 인식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심사위원 ; 정호승 시인· 문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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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중앙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투명인간
- 못생긴 너에게 / 김소현
오늘은 티브이에 나오는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나는 잠깐 무표정하다가
웃는 얼굴을 연습해보았다
그럴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건전하게 너를 사랑할게
오늘의 운세에선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천천히
목표한 곳만큼 전진하라 한다
우리에게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
한 쪽 눈을 감고 보는 풍경과
두 눈으로 보는 풍경은 조금 다르고
왼쪽 눈의 풍경과 오른쪽 눈의 풍경은 아주
많이 다르지 그래서 나는
깜빡이면서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아름다웠어 혹은 슬프지 않았어
조건 따지지 않고 무담보 대출 삼백.
오래도록 울리지 않았던 휴대폰에 문자가 온다
내 몸은 자꾸만 헐렁해졌다
옆집에서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신문 배달원이 툭, 하고 던져 놓고 가는 신문 소리에
덜컹거리는 몸의 내장들
당신은 나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로 이해한다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
손을 잡고 외출을 하자.
어쩌면 새로운 세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체위를 바꾸는 구름만큼 무방비한 우리의 주소록
아무렇게나 번호를 눌러 불쑥
나야, 하고 말을 한다면.
나는 나를 더 미워하고 싶어진다
나는 지구의 회전을 지나치게 의식하였다
그리고 걷는다
◆김소현=1993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중.
[2015 중앙신인문학상 시 심사평]
외눈 아닌 겹눈으로 세상 보는 성숙함
.........김소현씨의 ‘투명인간’은,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하였다’에서 ‘그럴 수 있다’로 가기까지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 세상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못하지만 타인과 사회에 대한 정직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외눈이 아닌 겹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하는 노력은 자기만의 방식을 추구하는 성숙한 태도로 보인다.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세계’가 필요하다.◆본심 심사위원=이문재·조용미(대표집필 조용미)◆예심 심사위원=강동호·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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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16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위험수목 / 노국희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에 앉아있어
긴 오후가 지나가도록
지금 나뭇잎 한 장이 세상의 전부인
왕개미 옆에서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헤프게 구걸도 해보았다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
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
알록달록 실패들을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들고
저기서 당신이 걸어온다
마른 생선 하나를 내어주고는
가던 길을 간다
비릿한 기억이 손 안에서 파닥거린다
목이 없는 생선이 마지막에 삼킨
말들이 마른 비늘로
바스러진다
낡은 허물 위로 매미소리가 내려온다
울어본 기억만 있고
소리를 잃은 말들이
그림자 속에서 가지를 뻗는다
*) 1978 전남 목포 출생 / 이화여대 물리학과 졸업
[한국일보 2016 신춘문예 시 심사평]
과감한 언어의 도전
.......심사위원들은 이와 같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노국희씨의 ‘위험 수목’을 당선작으로 선보이는 데 합의했다. 과장이나 엄살이 없이 기억과 상처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구도에 있어서는 안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과감한 언어 운용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 “울어본 기억만 있고/소리를 잃은 말들”과 같은 긴장감 있는 상상력이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와 같은 도전적인 문장에 실려 전개되고 있다. 취의와 언어 운용 능력에서 안정감과 패기가 함께 드러나고 있어 짧지 않았을 시 쓰기의 이력에 신뢰감을 갖게 한다.........김소연(시인) 조강석(문학평론가) 황인숙(시인)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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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2016 신춘문예 詩 당선작]
팥죽 / 이은주
매월 달의 소유 기간은 멀면서 가깝다
쟁반에 빚어놓은 옹심이
달이 되려면 뜨거운 솥 안에서 익어야 한다
반은 떠있고 반은 잠긴 달들
팥물을 빨아들여서 잔뜩 부풀어 있다
오늘 뜬 달엔 팥죽이 묻어 있다
붉은 저녁이 걸쭉하게 담긴 그릇마다
몇 개의 잘 익은 달이 떠있다
그릇마다 달빛이 새어 나온다
그릇 하나를 밝히는 달빛,
하마터면 달빛을 엎지를 뻔 했다
예전에는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많이 떴었다
죽보다 달을 먼저 뜨셨다
만월이 씹히지도 않고 몰락한다
달이 하나 씩 줄어 들 때 마다 어두워졌지만
오늘은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그대로 떠있다
어디로 가는 길을 비추려고
죽 그릇에 달 하나를 남겨 두었을까
달 하나를 남기는 식량
누군가에게는 달이 되고 부적이 되는 애기동지
보름으로 갈수록 살이 오른다
동짓날 밤 수십 년째 비어있는 어머니의 밤을 열어 보면
그릇하나를 밝히는 얼음으로 빚은 달이 무수히 떠있다
해마다 오는 긴 밤을 비춰줄 달을 꺼내 놓으시는 걸까
그런 밤이어서 달이 익어 가는 걸까
저 달이 잘 익으면 드시기 좋겠다
청상은 불구의 밤을 부적으로 쓰는 달
저 달들을 골목마다 내걸고 싶다
[한라일보 2016 신춘문예 시 심사평]
세밀한 시적 구성, 신뢰와 온기 전해져
...... 당선작 '팥죽'에 이르러서 심사위원들은 망설이지 않아도 되었다. 옹심이, 그 달의 이미지를 통한 어머니의 기억은 섬세하면서도 가볍지 않았다. 탄탄한 시적 구성으로 잔잔하게 직조된 그 속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신춘의 성격처럼 신선함, 치밀함, 신뢰할 만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믿어도 좋았다. 확장된 시세계를 보이고 있는 '임관의 숲' 등 다른 경향의 세 편 역시 내공이 엿보였다......... (심사위원 ; 문학평론가 김병택, 시인 허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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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취소 2016.01.01
........2016 매일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인이 기성 문인임이 밝혀져 당선을 취소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매일신춘문예 응모요강은 ‘동일한 원고를 다른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하거나 표절한 경우 또는 기성 문인이 동일 장르에 응모했을 경우 당선작 발표 이후에라도 당선을 취소한다. 일간지 신춘문예 및 일간지 문학상, 종합문예지(장르별 전문지 및 응모 자격이 제한된 문예지 제외) 동일 장르 당선자는 기성 문인으로 간주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2016년 매일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인은 2014년 다른 일간지 신인 문학상으로 등단한 작가임이 당선작 공고 직전 밝혀져 응모요강에 따라 당선을 취소했습니다.........
(심사위원 ; 문인수 시인. 채호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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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춘문예 당선 시 읽기
이미 심사위원들의 시에 대한 평가와 시읽기가 들어 있지만 전반적인 감상을 필자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시 당선작을 읽어보기로 한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모두(冒頭)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떤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각 감상자들이 시인의 시 속에 드리워진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선에 의해 감동은 다르게 나타날 소지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시를 심사한 심사위원들과 의견이 같을 수도 있을 것이며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 읽기에서는 정답을 찾자는 것보다는 같은 시를 읽고 어떻게 다르게 반응하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이 몇 년 동안 이어오던 신춘문예의 단골 소재들은 적어졌지만 심사위원들의 면면이 항상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는 인상은 지우기 어려웠다.
광남일보의 “둥근길”(문귀숙)에서는 “둥글다”는 상징성을 앞세우고 “허풍빌라에서 내린, / 수백억 상속녀가 떨어뜨리고 간 / 셀 수 없는 동그라미의 말들”에서 유추되는 물신주의적인 자랑이나 허세와 대비되는,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택시 운전사의 삶이 사납금을 채우려고 목적지를 찾아 헤매는 인생과 교묘하게 연결시키면서 “그림자의 손가락 끝에 만월이 걸렸다”는 언술로 생의 비의를 그려낸다.
경남신문의 “앵두나무 상영관”(진혜진)은 도시의 신호등--빨강, 또는 초록의 빛깔--을 앵두나무와 연결하여 길을 건너는 인간의 행동과 비유하여 정서적인 결정(結晶)을 시화하고 있는 시로 “떠나갈 사람과 돌아올 사람의 안부가 위태로워 / 처음 같은 얼굴로 / 막을 내리지 못하는 봄이 있다”는 언술과 같은 대목에서 감성적 소구(訴求)가 다소 모호해 보인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경상일보의 “폐가를 어루만지다”(양진영)에서는 철거될 폐가에서 시인이 끌어내는 과거에 대한 회상과 “코끝을 간질이는, 낯익은 엄마 냄새 / 햇볕을 모아 따스함을 지피는 구들장 / 그 열기로 앞뜰에 꽃이 피고 있다”는 결구(結句)가 폐가의 추상을 덧칠하여 보여준다.
경인일보의 “대봉”(김이솝)은 한 가족의 현대사와 가족사를 돌아보며 늙은 어머니가 그 많은 세월이 흘러도 생애의 마지막까지 아물지 않는 인간적인 상처를 이야기 해 준다.
경향신문의 “의자가 있는 골목- 李箱에게”(변희수)에서는 천재 시인 이상의 시를 패러디하여 의자와 기다림이라는 사유(思惟)를 끌고가는 시로 읽힌다.
국제신문의 당선작, “스티커”(이명우)는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붙는 스티커를 뜯다가 / 스티커 뜯기를 멈추고 산동네를 떠났다/...../ 없는 여기 산동네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 몰랐다”는 진술처럼 다시 돌아온 산동네의 고단한 삶이 주제로 쓰여진 시로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남아있는 곤궁한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농민신문의 “농림6호”(김우진)는 산문에 기대어 쓴 산문시로 벼농사를 위해 볍씨가 발아되는 과정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건강함과 “촉촉이 스며든 물기에 몸을 여는 씨앗들, 부드러워진 껍질을 걷어내며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귀가 열리고 부리가 생겼다. 몸속에 숨겨둔 하얀 발을 내밀었다. 흙이 묻지 않은 순결한 발들, 뿔을 달고 푸른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으로 예감되는 희망을 노래하는 정신을 깨워준다.
동아일보의 시 당선작,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조상호)은 산문시로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혀가 있다/...../ 움푹 파인 자국발자국들 혀 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 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종종 걸어나오고 /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에 이르기까지 빠른 리듬과 상상력으로 시를 끌고간다. 다만 그 상상력이 달리는 뿌리의 식물학이라는 소통의 상상력을 전개시킨 힘이 느껴지지만 감동에 이르는 소통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무등일보의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지 연)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 떠난 자와 남아있는(새로 들게 된)자들이 교감하는 공명통인 ‘항아리’가 “비가 오는 날 내 방에 누우면 / 집이기도 하고 / 무덤이기도 해서 / 내 마음은 빈집”이라는 사색적 틀이 만져진다.
문화일보 시 당선작, “입수”(김재필)에서는 심사위원들이 지적한 것처럼 비교적 소통의 모호성에서 벗어난 시라고 하였으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상상력으로 해석하며 채워 읽어야 할 시로 상당 부분은 상상력의 결합으로도 그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 모호함이 보인다.
부산일보 시 당선작 “큐브”(강기화)는 큐브 각각의 면이 가지는 의미와 대척점에 대한 인식을 우리시대의 문제의식으로 치환한 발상과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으나 그 귀착점과 연결성에 모호함이 끼어들어 다소 시적정서의 소통을 어렵게 한다.
불교신문 시 당선작, “봄”(한상록)에서는 봄이 오면 온 세상이 일어서는 모습이 보이고, 그 광경을 그려낸 시인의 감성과 정서가 한 편의 시 속에서 활달하게 그 행간을 달린다.
서울신문 시 당선 작, “가족”(정선희)은 가족이 모여 대화를 하는 중에 나타나는 흑과 백의 논리나 옳고 그름의 논리, 그리고 서로 다름이 뒤섞이는 과정을 그려내는 “입 안에선 쉬지 않고 /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지만 / 서로에게 위험했다”는 그 견해가 모아지는 모습을 드러내는 시로 읽힌다.
세계일보 시 당선작 “타크나 흰 구름”(이윤정)에서는 시인의 의도를 알 수 있는 대칭구조를 볼 수 있다. 거의 전체의 시행에서 그 대칭되는 이미지들은 새로운 출발을 “지우지 않아도 지워지는 얼굴로 / 지워져도 서로 알아보는 눈으로”라는 약속을 기대하는 속내가 그려져 있다.
영주일보 시 당선작 “맹목”(김종화)에서의 맹목이란 무엇일까? 시에 나타나는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의 맹목이다. 그래서 시인은 너에 대한 마음을 추스르며 “오늘도 나의 다짐은 추락하지 않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나의 착란은 뼈마저 버리”는 “태초부터 회귀점”으로 돌아온다는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소 소재의 상투성이 보이지만 그 근저에 깔린 진정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전북일보 시 당선작 “두더지 반지하 신혼방”(김상현)은 죽은 두더지의 몸에 깃들어 사는 벌레를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삶을 추구하는 눈길이 묻어난다. 누군가의 삶을 먹고사는 벌레의 세계를 우리의 세상으로 치환하여 그려낸 시인의 심상이 곱게 느껴진다.
전남도민일보 시 당선작 “화해花蟹 : 꽃게”(하송)는 냄비 속에서 죽어 있는 꽃게와 바다라는 삶의 공간에서 삶의 결연한 태도와 끈질긴 집념을 그려낸 시로 ‘한 평생 배를 보이 않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결연함이 진정성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일보 시 당선작 “생일 축하해”(안지은)는 삶과 죽음을 동일 선상에서 인식한 어느 생일이 죽은 날이 되어 겹쳐있는 기일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탄생과 소멸이라는 순환속의 역설을 따뜻한 마음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2015 중앙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투명인간 - 못생긴 너에게”(김소현)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국민소득이 3만달러가 넘는 풍요의 시대--에 신문이 오면 오늘의 운세를 들여다보고, ‘조건 따지지 않고 무담보 대출 삼백’을 대출해 준다는 고리(高利)의 대출을 살피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어쩌면 새로운 세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시선을 긍정하는 시인의 마음이 엿보이는 시로 읽혀진다.
한국일보 시 당선작 “위험수목”(노국희)은 제목에서부터 그 제목과의 시적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 헤프게 구걸도 해보았다”는 도전적인 자세로 ‘당신’에게 대한 기억과 상처에서 부서진 삶에 대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으나 시에 차용한 ‘마른 생선’과 같은 이미지가 속 시원히 연결되지는 않는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라일보 詩 당선작 “팥죽”(이은주)에서는 어머니가 끓여주던 팥죽에 떠있는 옹심이가 달이된다. 그 달의 이미지가 어머니의 청상으로 살아온 슬픈 역사를 “동짓날 밤 수십 년째 비어있는 어머니의 밤을 열어 보면 / 그릇하나를 밝히는 얼음으로 빚은 달이 무수히 떠있다”는 행간에 감추어 애틋한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이상에서 수집된 신춘문예에 나타난 당선 시를 간단히 읽어 보았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고뇌해야할 가치에 대한 물음도 없고, 또 이 시대는 함께 아파할 문제도 없는 평온한 사회인가? 가난과 관련된 곤궁함의 문제에 관해서는 가끔 그 얼굴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시대적 아픔에 공감하고 분노해야할 가치는 어디론지 잠적해 버리는 현실, 그것은 그런 주제를 다루는 일이 불경스럽거나 암묵적으로 형성된 금기 때문이었을까? 스스로 검열해 버린 시인의 사회는 희망이 사리지는 사회다.
눈에 번쩍 띄는 시, 그러면서도 깊은 성찰과 고뇌, 혹은 절실함이 크게 인상을 주어 기억되는 시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은 금년도 신춘문예작품에서 느끼는 커다란 부족감은 아니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다만 신춘문예라는 어떤 틀에 끼워 맞춘 문장이나 이미지들이 산만하게 드러나 시의 깊은 맛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6) 소통의 문학을 위하여
전반적인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의 결과인지 모르겠으나 금년에는 시를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의 전반적인 평가가 시문학에서의 “소통의 문제”를 맥으로 짚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시에 있어서의 형식의 문제는 그 내용의 문제와 더불어 진화를 거듭하면서 형식의 보편화가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점에 방점이 찍힌다.
다시 말하면 종전의 짧은 시행에서부터 시의 행이 길어지고 그 행이 포용하고 있는 의미가 좀 더 세밀하게 직조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시행에서 시행으로 건너가는 이미지들이 서로 겉돈다는 인상은 예각적 시선으로 상상력을 비틀어 놓아 시적정서의 연결에 비약이 심하다는 인상과 무엇이 다를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시의 형식에서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시의 전반을 살펴보면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大勢)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라는 좀 더 높은 차원(?)의 시적 형식에 걸맞는 의미망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모호성이나 시적정서에 혼란을 야기하는 난해성이 접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그 시에 채용되고 있는 사물적 상징이나 보다 깊게 의미를 감추어두려는 시적표현의 시도에 기능하도록 시적 모호성이나 잘 연결되지 않는 상징성으로 난독의 문제는 여전히 신춘문예의 특성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씻기 어려웠다. 어쩌면 심사위원들조차도 그 심상적 의미를 의문의 여지없이 말끔히 해소시킬만큼 해독에 충실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긍정하기 어려운 대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의 정독에 있어서는 같은 시를 읽고도 다른 해석이나 견해를 보이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해독(解讀)만이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 이면에는 시를 해독하는 독자의 태도나 교양, 학력 등과 같은 성장배경의 지성적 태도와도 관련이 있지만 적어도 시 속의 난독(難讀)이 해소되려면 상징이나 이미지의 해석 기반이 되는 문장의 합리성이나 연결성이 잘 결합되어 있는가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시에 대한 소통의 의미는 현대시와 독자와의 괴리현상을 어떻게 좁혀나가며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오랫동안 “무의미 시”를 천착해온 김춘수 시인은 그의 말년의 대담에서 자신의 시에 대한 견해를 이렇게 밝힌다.
“……..시 뿐만 아니라 예술이란 감상자, 즉 독자를 전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경우에도 독자를 의식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주 극소수의 독자만을 의식합니다. 이런 시를 쓰면 독자들은 어떻게 볼까를 나도 의식합니다. 그러나 독자를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독자에게 다 읽힐 수 있는 시는 없어요. 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둘 수는 있겠지만 나는 그것도 안된다고 봅니다. 독자를 알게 모르게 의식한다는 것은 자기를 죽인다는 말과 같습니다. 독자를 위해 시를 쓰는 것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시를 써야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시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만큼은 제한된 한도 내의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위에 인용한 글은 김춘수 시인의 거의 마지막 대담이라 할 수 있는 글로서, “시안(詩眼)”(2004가을호)에 나오는 대담 중에서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김춘수 시인의 시에 대한 확고한 태도를 보여주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시인들의 새로움에 대한 도전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실험적 시도는 시인 모두에게 지워지는 짐이라기보다 그러한 의미를 가진 시인들의 시도만으로도 현대시의 변화와 도전은 의미있는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시를 쓰는 시인들은 독자와의 심상적 교감을 위해 그에 상응하는 적합성을 이해하고 극소수의 높은 수준의 독자들을 위한 시를 쓰기 보다는 “소통할 수 있는 문학”으로서의 시에 관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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