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病)에 대하여
詩 여태천
나무가 나무에게 집중하는 시간.
작년의 잎이 그랬던 것처럼
올해의 잎은 기를 쓰고 자란다.
나무에게 봄은 잃어버린 시간.
나무가 나무에게 집중하는 동안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그 女子*를 나는 생각한다.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이 몹쓸 병에 대해
이웃집 의사는 휴가를 권한다.
나무가 올해의 잎에 집중하는 동안
세탁기는 빙글빙글 돌아가고
나는 대청소를 한다.
쭉 뻗은 내부순환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처럼
이리저리 청소기를 밀고 다닌다.
벚꽃의 거리를 가득 메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애를 쓰고 있는 행운목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다리미질을 한다.
분무기를 떠나는 오늘의 물처럼
봄이 요란하고,
하얀 셔츠를 입고 거울을 본다.
이미 몸은 병이 깊어 하얗게 말라 가고 있으니
나는 불현듯 소년이 될 수 없을까.
나무가 나무에 대해 집중하는 동안
나는 하얀 다리의 그 女子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 윤동주의 시 「병원(病院)」의 한 구절.
* 여태천 시집 ≪스윙≫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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