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원의 朴君에게
한 이십 년이면 통일되지 않겠습니까?
해 지지 않던 모스크바 좁고 검은 강둑에서
싸구려 보드카를 마시며 자네가 말했지
그 날 낮엔 임수경이 평양에 들어왔다는 뉴스가
모스크바 텔레비전에 나온 날이었지
자네를 지금 만났더라면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이 시절에 만났더라면
날선 모스크바 낯선 호텔 방에서
서로의 생각을 더듬던 서러움은 없었겠지
거리 모퉁이에서 자네와 나를 바라보던
이데올르기의 날카로운 시선들
첫 사랑이 상대를 탐닉하듯
러시아제 꼬냑과 한국산 사발면 들이키며
서로의 생각을 추궁할 때도
우리의 만남은
엄밀한 반역의 형식으로
백야의 밤 창밖을 흐르고 있었지
사리원 출신 모스크바대 유학생과
대구 출신 어설픈 경제사절단의 대리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일곱 살 터울 분단된 조국을 공유한 자네와 나는
서로를 두려워 하며 서로를 그리워 했었지
모스크바대 고딕 첨탑을 스치듯 볼 때마다
자네 목소리 떠오르네
형님 우리네 기숙사로 놀러 가시지요?
그 초청을 감당하지 못했던 두려움이 새삼 기억이 나네
마음을 터도 이데올르기의 세뇌는 뿌리 깊었지
돌아보면 서툰 정의 부끄러운 진정이
오랫 동안 내 가슴에 남아 있음을 고백하네
자넨 지금 북녘의 별이 되어 있는가
나는 지금 남녘의 아버지가 되어 있다네
이틀의 만남, 삼십 몇 년의 세월
쉽사리 자넬 지울 수 없음은
우리가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 때문일까
자네가 말한 이십 년 후의 통일은 아직 유보중이네
하지만 다시 이십 년을 셀 수 있다면
눈빛 선한 노인의 모습으로
어쩌면 자네 고향 사리원 어느 언덕에서
통일 막걸리 한 잔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네
이 번엔 내가 말하겠네
한 이십 년이면 통일되지 않겠나?
20180726 / 민족작가연합 '도보다리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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