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좋은 詩 모음

- 김현, '눈앞에서 시간은 사라지고 그때 우리의 얼굴은 얇고 투명해져서'

취몽인 2019. 12. 28. 11:30
두 사람이 걸어가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눈 쌓인 진부령을 넘어가며
멀리서 가만히
이쪽을
보는 것을 보았다

부모였다

민박이라는 글자가 붙은 창문
아래에서 반짝이는 것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느 땐가 눈이 많이 와
저 숙소에 짐을 풀고
아이를 갖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눈은 내리고
어둠 속에서 촛불 앞에 발가락을 모으고

두 사람은 두 사람밖에 보지 못하지만
끝없이 같은 곳을 바라본 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렇게 빤한 인생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민박에서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고
눈은 참으로 근사하여
멀리서 가만히
아무것도 없는 쪽을 보아서
슬픔에 눈을 뜨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 때문에 탄생해
이쪽에 서 있게 되는 람에 관하여

약속하지
남자는 말하고
약속할게
여자는 말하고
두 사람은 창문을 두 사람에게로 옮겨왔을 것이다

그 깨지기 쉬운 것을

이것이 부모의 사랑 이야기이고
부모에게서 만들어진 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민박하였다

터무니없게도
딱 한 번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한 사람이 마침
나를 보게 되고

- 김현, '눈앞에서 시간은 사라지고 그때 우리의 얼굴은 얇고 투명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