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책과 문화 읽기

야생초편지/황대권

취몽인 2020. 1. 2. 14:07

 

 

오래된 목마름이 있다.

식물의 이름에 관한 것이다.

 

나름 대도시인 대구에서 나고 자란 탓에 어려서부터 자연과 호흡하며 살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물론 내가 살던 동네는 대구에서도 비교적 변두리여서 지금은 대구의 상징인 두류타워가 들어서 있는 작은 두류산이 가깝긴 했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 교가에 '두류산길 푸른 언덕'이란 가사까지 들어있으니 산자락에 살았다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자주 오르며 놀던 그 산에 자라던 여러 나무나 꽃, 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풍뎅이가 많이 있는 참나무, 향기좋은 아카시아, 가시 울타리 탱자나무, 보리를 심어놓은 산비탈 밭 옆의 호박덩쿨 같은 정도가 내가 아는 식물 이름의 전부였다.

글을 읽고 쓰면서 수 많은 나무들의 이름을 처음 보는 일이 잦았다. 회화나무. 물푸레나무, 후박나무, 배롱나무 같은 이름은 참 신기하기까지 했다. 작가들은 어떻게 저리 많은 나무의 이름들을 알고 있을까. 늘 궁금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어린 시절 그 나무들과 함께 살았던 역사가 있었고 나무나 풀의 이름을 그 시간 속에서 함께 산 어른들이나 형제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웠을 것이다. 어쨌든 비슷비슷해 보이는 참나무과 나무들의 이름을 척척 구별해 부르는 그들을 보며, 그들의 글을 읽으며 오랫동안 나의 부러움은 쌓여갔다.

 

황대권의 '야생초편지 '는 제법 오래 전에 사서 읽은 책이다.

신영복선생의 옥중서신 책이 한 때 많은 화제를 일으키며 읽힌 이후 비슷한 상황에서 쓴 다른 소재의 이 책 또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책이었다. 저자의 상황 같은 건 다시 읽는 내게 별 의미가 없어져 버렸고 그저 앞서의 목마름, 이름에 대한 목마름을 느끼며 다시 읽었다.

제대로된 말이 물론 '야생초'지만 우리는 별 생각없이 잡초라고 부르는 저 바깥 벌판이나 담벼락 귀퉁이에 제멋대로 자라다가 사라지는 풀들. 그 거칠지만 여린 생명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누군가에게 사연을 전하는 저자를 보며 '야생초'의 생명력이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살게해주는 힘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저자는 임업경제학 전공이니 식물이나 나무에 어느 정도 선지식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감옥에서도 식물도감들을 구해 그 풀들 이름을 하나 하나 찾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림 그리는 재주도 있어 거의 도감을 그려도 될 정도다. 그렇게 사랑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그들을 알게 되고 이름도 부르게 되는 것 같다. 나처럼 그저 답답할 때마다 두꺼운 식물도감을 뒤져 그림을, 사진을 아무리 외워도 막상 어딘가에 우뚝 선 나무 한 그루 앞에서 전혀 이름은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새해에는 식물도감들을 새로 사야겠다.

새책은 비싸니 중고책을 오랜 만에 청계천 가서 뒤져봐야겠다.

그리고 한번씩 그것들을 들고 나무들, 풀들과 통성명하러 다녀봐야겠다. 꼭 그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