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령
새재를 넘거나 죽령을 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소 험하고 어쩌면 에두르기 때문에
그 길은 오래전부터 메인스트림이 아니다 그러므로 고개를 뚫은 시체들이 담보하는
추풍령을 넘는 걸로 하자
분명히 너희는 나더러 미친 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차마 너희를 미친 놈들이라
부르지는 못하지만 사실은 미친 놈들이라 취급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우리라,
우리는 서로 미친 놈 곁에 있지
요즘은 추풍령 휴게소에 잘 서지 않는다 금강 휴게소의 우동이 더 맛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금강은 낙동강보다 상식적이기 때문에 추풍령 휴게소는 그저 이제 부터
시작이군 하는 정도의 마음 가짐이 되고 말았지
한때는 고개가 고립을 낳고 고립은 자부을 자부은 영웅을 낳아 너희는 고사목이 되고
나는 고개를 넘어 자유가 되고 자유는 자존을 자존은 보편을 낳아 소나무가 되었다
생각한 적 있었지 사실 다 헛소리였지만
추풍령 넘으면 김천이고 구미고 곧 대구지 또 추풍령 넘으면 황간이고 대전이고 곧 서
울이지 그래도 충청도 한 길쯤은 내 귀로에 껴있으니 나는 완충된 걸까 김천과 대구는
너무 가깝지 좁지 빽빽하지
너도 참고 있다는 걸 안다 나도 어지간히 참고 있다 참고 있어도 욕은 다 들리지 그렇지
않나 똑같은 고개를 들고 정반대로 욕을 쏟는 정신의 거리는 얼마쯤일까 왜 너와 내가
이해하는 걸 너와 나는 도저히 모를까
고속버스가 서지 않아 추풍령휴게소는 화가 났을 수도 있다 뼈를 묻어 길을 열었건만
이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북쪽을 향해 금강휴게소로 내달리는 천일고속 꽁무니를
향해 욕을 쏟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넌 뭘 지키고 싶은거니 왕조의 기억 같은 거? 지배의 역사가 흐르는 강물을
마신 뼈대 같은 거? 고구려가 미운건가? 아님 백제에 대한 오랜 원한? 네가 그저
싫은 걸 싫어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증오?
금강은 서쪽으로 흐르고 낙동강은 남쪽으로 흐른다 서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피냄새가
있고 남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분노의 냄새가 있다 추풍령은 좀 더 남쪽으로 기울었고
나로서는 이유를 모를 경사가 있다
너는 오래 묵은 지배계층처럼 보인다 사실은 겹겹의 마름일 뿐인데 나는 뼛속까지
바닥처럼 보인다 사실은 어용이면서 그래서 미치는 건가 어쩔 줄 몰라서 이도저도
아니라서 왜 이러는지를 몰라서 답답해서
추풍령휴게소에 더 이상 설 수가 없다 그곳은 떠나 온 내가 쉴 수 없는 곳 남쪽으로
분노가 흐르고 북쪽으로 절망이 꽂히는 곳 미친 목소리가 쌓이는 곳 쉴 수 없으므로
설 수 없는 곳 그래도 그래도 오래 있는 곳
20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