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1습작

흐린 날

취몽인 2020. 5. 2. 15:44



흐린 날

 

  이상한 날이다. 잔뜩 흐린(이 표현은 적절치 않은데 다르게 말할 재주가 없다.) 날씨와 마음의 싱크로율이 높다. 사무실 베란다 의자에 앉아 회색 슬라브와 그 위로 의뭉스럽게 드리워진 회색 하늘을 바라본다. 눈에서 회색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셔츠안의 몸뚱이는 뜨겁고 목덜미 뒤를 감싸고 흐르는 바람은 회색으로 서늘하다. 특별한 일은 전혀 없다. 이틀을 쉬고 나왔고 오늘 생일인 둘째와의 식사도 어제 저녁 마쳤다. 네 시간 뒤면 다시 휴일 전날 저녁이 될것이니 몸이 피곤할 여지도 없다. 그런데 온통 회색이다. 팔이 회색으로 축 늘어지고 읽고 있는 책도 회색 마리화나 냄새만 난다. 멀리 흐르는 회색 강, 회색 능선들. 회색 커피 맛. 시간은 느리게 간다. 회색으로. 지나가는 동료의 회색 웃음. 회색 모니터에 약간 더 짙은 회색으로 새겨진 쓰다만 시 한 편. 이런 날은 어디론가 가야하는데. 아무 데도 아닌 회색의 풍경 속. 회색 바람이 되는 게 좋을텐데 어디로 가야할 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회색으로 주저 앉아 마저 지워지기만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비나 좀 세차게 내렸으면 생각이 좀 짙어질텐데. 회색 바람만 자꾸 불고 몸은 그저 내려 앉는다. 펼쳐 놓은 제프 다이어 탓도 있는 것같다. 그새 조금 더 흐려졌다. 불빛이라도 비쳤으면. 저녁은 아직 회색 너머에 있고 주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 누가 비명이라도 질러줬음 좋겠다. 아니면 회색 휘파람이라도..

 

2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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