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좋은 詩 모음

삼십 삼 년 동안 두번째로 / 최승자

취몽인 2020. 4. 13. 13:45

삼십 삼 년 동안 두번째로

 

 

삼십 삼 년 동안 두번째로 나는

나로부터 도망갈 결심을 한다.

우선 머리통을 떼내어

선반 위에 올려 놓는다.

두 팔과 두 발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몸통을 떼내 의자에 앉힌다.

오직 삐걱거리는 무릎만으로 살며시 빠져 나와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오래 달리고 달려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

가만히 쉬고 싶을 때,

저 앞에서 누군가가 걸어간다.

그에게 달려가 동정을 구한다.

그 품에서 잠시만 쉬게 해달라고,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품에서

가볍게, 풍선에서 공기빠지듯

가볍게 죽게 해달라고.

그는 못 들은 체하며 걷는다.

나는 또다시 그에게 동정을 구걸하고

이윽고 마지못해, 귀찮다는 듯

그가 나를 뒤돌아볼 때

 

그것은.....

짓 뭉개져 버린 나의 얼굴

 

 

-최승자. <즐거운 日記> 1984년. 문학과 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