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가족 그리고 기억

아버지

취몽인 2007. 7. 17. 20:57



  아버지를 회상하며

 

                                                 

“자네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군가?”


10년전의 일이다. 신입사원으로 면접을 보러 간 자리에서 회장이 던진 질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회장님 역시 종친이셨고 선영조차 시조께서 계신 김해에 있었다.


“돌아가신 제 아버님이십니다.”

... 왜 그런가?”

“제 아버님은 사회적으로 성공하신 분은 아니었습니다하지만 아버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진실되게

사셨고 무엇보다 가족들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분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건데 그것이 제입장에서는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돌아가실 무렵까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절제하신 채 가족을 특히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목숨을 연장해주는 약값까지 아껴서 말입니다. 지금 제가 이자리에 서있는건 아버님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아버님을 제일 존경합니다.”


회장은 고개를 끄떡였고 한달뒤 나는 그회사의 신입사원 연수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12년전 내가 대학 3학년이던 한여름에 지병으로 앓아오시던 폐에 합병증이 겹쳐 돌아가셨다.

취직하면 꼭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술을 한병 사서 내손으로 따라드리리란 내 작은 소망을 뒤로하고 숨을

거두시던 그 새벽에 난 별로 눈물이 나진 않았다. 

오랜 투병으로 인해 늘 죽음을 대비했었던 탓도 있었지만 집요했던 내핍 생활과 나에 대한 끊임없던 아버지의

단속탓에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이 많이 메말라있었던듯 지금 느껴진다. 그게 결국은 모두 내탓이었음을 깨닳은

것은 좀더 시간이 흐른 뒤였었다.

 

 아버지의 관명은 熙太였고 족보명은 太洙이시다. 위로 형님 한분 아래로 여동생 한분이 계시며 정확하진 않지만

본리동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성공하신 분은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가난했던 어린시절과 전후의 혼란속에서 뚜렷히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던 청년기를 지난,

그래서 중년이후 왕성히 사회생활을 하기보단 안정을 끊임없이 추구하던 한사람의 약한 소시민에 불과했었다.

청년기의 방황은 서른에 결혼을 하고서도 한동안 이어졌으며 내가 태어난 이후에야 가정이며 돈벌이며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뚜렷한 학벌도,모아둔 돈도, 특별한 기술도 없으셨던 형편이었기에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셨다.

큰아버님이 하시던 철공소를 도와 일하시기도 하시고 장사를 하셨는가 하면 목수일을 하시기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뛰어나고 계산이 빠르셨다.

그걸 밑천으로 돈을 조금 모아 내가 11살때 오랜 셋방살이를 끝내고 두류산 밑에 우리 집을 지었다. 어머니의 기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고 아버지 역시 몹시 기뻤으리라. 하지만 내 기억속에는 어머니의 기쁨만 남아있을 뿐 아버지의 기쁜 모습은 없다.

그것은 아마 아버지의 가장으로서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집을 지은후 부터는 어느정도 우리가정에 안정이 찾아왔었다.

우선 집자체에서 수입이 발생했으며 집에서 직접 조그많게 가게를 이것저것 꾸려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이미 아버지는 폐를 몹시 앓고 계신 중이었다.

 

 

 내가 중학 1학년 입학후 얼마뒤의 일이다. 얼결에 내가 시험을 무척 잘 본 일이 있었다.

전교 석차가 10등안에 들었었나 보다.그때처럼 아버지가 기뻐하시던 모습을 난 그후 본적이 없다.직접 리어커를 끌고가서

책상을 사오시는가 하면 큰집에 가서자랑을 하기도 하셨다. 원래 아버지는 남들한테 자식자랑하는 법이없는 분이셨는데

그 어려워하던 큰아버지 앞에서도 자랑을 하셨다. 그만큼 아버지에게 있어 나는 큰 기대 였으며 동시에 부담이었다.

아버지는 어릴 적에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약간 저는 큰아들의 장래가 늘 걱정이셨던 것이다.내성적표는 아버지의 불안을

다소나마 덜 수 있는 보증서였던 것이다 또 한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년쯤 전 내가 대학 2년 여름방학 때였다.

학생운동이다,문학이다하며 반년을 제멋대로 산 내가 자전거를 타다 버스에 치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혼자 병원으로 날 찾아 오셨다. 대뜸 오시더니 성적표를 내게 던지시더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성적표엔 “학사경고”라는 빨간 글씨가 찍혀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우셨다. 뭐라고 내게 말씀을 하셨는 지는 기억이 없다.

다만 나는 난생 처음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덩달아 울 수 밖에 없었던 그 장면을 기억할 뿐이다.

아버지에게 그때 나는 또다시 다리 저는 장래가 안심되지 않는 큰아들로 되돌아 온 것이었으리라.

 그후 일년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다행히 다음학기에는 아버지의 눈물덕에 다시 장학금을 타서 그일을 평생 가슴에 못으로

남기고는 살지 않게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코끝이 찡해오는 일이었다.

 

 끝으로 아버지 형제의 우의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이글을 맺고자 한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버지에게 있어 형님은 또다른 아버지였을 것이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평생 큰아버지를 존경하고 한편

공경하셨다. 집안이 몹시 어려워 어머니가 가끔 우리보다는 잘 살던 큰집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아버지는

어머니를 크게 힐책하셨다. 우리 집에서 큰아버님에 대해 일언 나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어린 내가 생각해도

큰집의 처사가 옳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는 큰아버지 앞에서 싫은 말씀을 절대 뱉지 않으셨다.

 큰아버님도 마찬가지셨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방탕의 와중에서도, 그후 생활과 처절히 싸우는 와중에서도 큰아버님은 일관되게

아버지의 후원자셨다. 사촌들과 큰어머님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않고 근본적으로 동생을 신뢰하셨고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주셨었다.


 한번은 저녁 무렵에 큰아버님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그무렵 아버지의 건강은 몹시 나빠져 있어서 집에서 나오는 수입외에는 별다른

수입이 전혀없어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때였다. 게다가 나는 장학금을 못받아 등록금 마련이 막연한 터였다.

“지금 내가 출발을 할 테니까 20분쯤뒤에 재덕이 네가 버스정류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집에는 말하지말고 그냥“

버스에서 내린 큰아버님은 내게 봉투를 하나 주셨다.

“네 아버지 드리면 알거다. 큰집 식구들은 아무도 모르도록 하라고 해라.”

그건 다음 학기 내 등록금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큰아버님은 마루에 앉아 하늘만 쳐다보고 계셨다. 나는 큰아버님이 울고 계신다고 생각했었다.

눈물만 흘리지 않을 뿐.

 

 지금 큰아버님은 오랜 병환을 앓고 계신다. 근래에 뵈었을때는 조금 병세가 호전된 듯 보였지만 워낙 완쾌가 어려운 병이라

멀리 내다볼 형편이 못돼 보인다.

 내겐 동생이 하나 있다. 단 두형제다. 난 동생에게 자주 이말을 하고 있다.

 “아버지 형제처럼 살자. 돈이 많고 적고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서로 한없이 믿고 의지하고 그렇게 살자.” 라고

 

 

 아버지는 지금 사정상 고령군 성산면 사부동의 내당교회 묘지에 모셔져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큰집 형님들과 의논하여 화원으로

옮길 생각이다. 아버지가 가족들과 함께, 형님과 함께 계시는 걸 좋아하실 것 같기때문이다. 큰아버님의 건강이 오래 이어지기를

빕니다.

 

 

* 언젠지 기억도 없지만 집안 문집에 싣는다고 썼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나면 제대로 다듬어서 보관할 요량이다. 더 이상 잊어버리기 전에..


'이야기舍廊 > 가족 그리고 기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늬 편지 07/09/15  (0) 2007.09.20
사진 1  (0) 2007.07.18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선 딸들에게..  (0) 2007.07.17
하늬에게  (0) 2007.07.17
딸들에게 1  (0) 2007.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