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의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내에게 그의 친구가 이렇게 위로한다. “이봐, 그 여자 말고도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이걸 위로라고 하고 있다. 사내가 잃어버린 것은 ‘이 여자’다. 포인트는 ‘여자’가 아니라 ‘이’에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어떤 다른 ‘한’ 여자도 사내의 ‘이’ 여자를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위로는 허름하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은 그렇게밖에는 위로할 수가 없다. 유일무이한 ‘이 여자’가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한 여자’로 전락할 때에만 고통은 사라진다. 철학자들이라면 단독성(‘이 여자’)이 특수성(‘한 여자’)이 될 때 실연은 극복된다, 라고 정리할 것이다. 대개는 그리 되게 돼 있다. 그 사내, 조만간 또 다른 ‘이 여자’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동안 미망 속을 헤맸노라고.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말, 결국은 맞는 말이 되고 만다.
가라타니 고진이 단독성과 특수성이라는 철학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는 취지로 사례 삼아 한 이야기를 옮겼다(<탐구 2>). 어려운 개념들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지만, 저 사례는 서늘하니 마음에 얹힌다. 한 사람이 문득 이 사람이 되어 사랑이 시작되고, 이 사람이 떠나면서 세상이 잠깐 멈췄다가, 이 사람이 어느덧 다시 한 사람이 되면 애도는 끝난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의 내막이 본래 이토록 헐렁한 것인지 모른다. 이런 시가 있다.
“이해한다는 말, 이러지 말자는 말, 사랑한다는 말, 사랑했다는 말, 그런 거짓말을 할수록 사무치던 사람, 한 번 속으면 하루가 갔고, 한 번 속이면 또 하루가 갔네, 날이 저물고 밥을 먹고, 날이 밝고 밥을 먹고, 서랍 속에 개켜 있던 남자와 여자의 나란한 속옷, 서로를 반쯤 삼키는 데 한 달이면 족했고, 다아 삼키는 데에 일 년이면 족했네, 서로의 뱃속에 들어앉아 푸욱푹, 이 거추장스러운 육신 모두 삭히는 데에는 일생이 걸린다지”(‘불귀 2’에서)
--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 중에서--
** 20년이 지난 우리 부부.. 육신과 정신이 아직도 푹 삭지 못하고... 뼈다귀가 남아 부딪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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