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어쩌다 수중에 들어온 <끌림>이라는 책이 있었다.
세계 각국을 돌며 찍은 사진들과 함께 때론 시 같고 때론 산문 같은 글들이 어울어진 예쁜 책 한 권
그 책의 저자는 여행하는 시인 이병률이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보고?)서 그 작가가 아주 젊은 친구일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우선 사진의 감각이 젊었고(순전히 내 생각만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을, 글을 쓸 열정을 지녔다면
그것은 젊은이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나는 그가 몹시 부러웠다.
그런데 시인 이병률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이 시집을 사고서야 알았다.
시인은 67년생, 나보다 다섯살 아래인.... 결코 젊은이는 아닌....
부러움의 크기는 다시 몇배로 내 속에서 증폭되고 있었다.
아! 그의 삶은 찬란하다.
찬란 / 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더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쳐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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