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를 조심하라고? / 황동규
1. 나는 뭐지?
친구 동생의 사무실
'도와드리고 싶지만...'
창밖의 눈발은 어두워지고
탁자 위엔 식는 커피
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낯익은 사무용 컴퓨터를 확인하다가
슬쩍 'soul[魂]'을 찍었다.
작동 키를 누르자 모니터에
'crazy[미쳤어]?'
누가 장난쳤군
창밖에는 다시 훤해지는 눈발
아직 그가 오는 기척 없어
슬쩍 'craze[광기]'를 찍었다.
작동 키를 누르자 모니터에 글자가 나타났다.
Know thyself[네 몰골 좀 봐라]!'
2. 뜨거운 배를 난간에 대고
뉴욕 하수도에 악어가 산다는 미확인 보도가 있은 후
복개된 청계천에서 악어가 논다는 소문이 퍼졌다.
삼청동 어느 집에서 애완용으로 기르던
새끼 악어들이 도망쳐
(크로커다일이 아니고 엘리게이터 악어라고 함)
수도육군병원 앞 복개천을 따라 기어 내려가
한국일보 옆구리를 지나
그렇지, 우리 가끔 들르던 대구 매운탕집을 스쳐
광교에서 일제히 좌향 앞으로 하여
청계천으로 내려가 3간가 4가쯤에서
새끼치며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
겨울에도 춥지 않고 먹을 것만 있다면
행복하지 말란 법은 없지.
하나 때로 밖에 나오고 싶지는 않을까?
어느 여름밤 비 추적추적 뿌릴 때
청계천을 빠져나와
한강에서 무자맥질 몇 번 하고
반포쯤에 싱륙하지나 않을까?
아파트 사람들이 '사랑과 진실'에 빠져 있을 때
계단을 기어 올라가 옥상 난간에 뜨거운 배를 대고
비를 맞으며
서울의 불빛을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3. 종묘 앞 싸락눈
싸락눈 솔솔 뿌리는
종묘 앞 숯불돼지갈비집
단성사서 영화 보고 싸락눈 맞으며 걸어가
잠긴 문 틈으로 저 낮고 긴 지붕의 집 종묘가
곱게 눈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보고
동양의 파르테논 어쩌구 헛소리를 하며
겁먹은 듯 서 있는 조랑말들 사이를 지나
김수영씨와 몇 번 들른 집,
잘 모르는 소리 지껄이는 건
지금도 매양 마찬가지
'탈[mask] 이론은?'
(베아트리체를 사랑한 불한당 단테를 보라.)
'객관 상관물이란?'
(兩人對酌山花開 <李白> - 둘이 서로 술 따르니 막 상 꽃이 핀다, 혹은 OB잔 부딪칠 때 배호의 노랫소리>
모를 듯 알 듯 모를 순간
기도 조이는 그 쾌감.
가만,
지금 내 정신 상태 제대로 보여줄 객관 상관물은?
(아파트 계단을 도로 기어 내려가는 악어?)
하긴 텔레비나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 가운데
그래고 제일 길 안 드는 게 악어더군
성(聖) 타잔도 길들일 수 없는..........
'황형, 혼자 술 드는 폼
여직 어색하군요.'
귀 익은 목소리에 얼핏 뒤돌아보니
민음사판 전집 사진 속에서처럼
티셔츠에 앙상한 몰골로
김수영이 앉아 있다.
양복 윗도리를 술상에 걸쳐놓고
3센티쯤 자란 머리카락에
입웃음을 웃으며.
나 취했구나!
허지만 2홉병 하나 채 넘어뜨리지 못했는데
두 눈 비비고 남은 잔 비우고
다시 뒤돌아본다.
'그리고 황형은 혼자 살 줄을 몰라,
오늘 같은 날도 날 부르니.'
종묘 앞 싸락눈 덕분이겠죠.
(예전엔 달구지 끄는 조랑말들이
깊은 생각에 잠겨
큰 눈 껌벅이며 눈을 맞던 곳.)
'아니 자리 옮기지 맙시다.
마주앉으면 내가 도망치고 싶어질 거요.
그건 그렇고 요즘 글쓰는 사람들
다 잘 있습니까?'
(우린 다 잘 있는가?)
잘 있지요
특히 젊은 친구들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젊은애들에 대한 아분가요?'
(아부! 그 상처!
생(生)배와 아스팔트가 맞닿는 그 감촉.)
독설 여전하시군요.
그런데 오랜만에 서울 들르신 느낌 어떻습니까?
'상처받은 자들이 많더군요.
술 집에서 속 털어놓고 한 말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글로 쓰는 자들 마음 속에
혹처럼 자라는 상처.'
없앨 방법은?
(진정 가위론 안 되겠지.)
'없애긴 왜 없애요?'
(그렇지, 눈을 감기 위해 눈을 봉할 순 없지.)
화가 날 때는?
'부셔!"
기분 좋릉 땐?
'마셔!'
싸락눈 내릴 땐?
'셔!'
셔라?
'부셔, 마셔!'
그렇다면 셔!
'적셔!'
둘이 따로따로 그러나 같이 한바탕 웃고
어깨춤 추며 노래부른다.
싸락눈 내릴 땐
같이 맞고 걸으면 되지
싸락눈 내릴 땐
같이 젖어 걸으면 되지
외로운 악어 알고 밟진 마시압
같이 푹 젖어 걸으면 되지.
'이야기舍廊 > 좋은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 / 진은영 (0) | 2011.01.31 |
---|---|
있는 힘을 다해 / 이상국 (0) | 2010.12.26 |
[스크랩] 한 벌의 양복/손순미 (0) | 2010.12.09 |
속초에서 / 장석남 (0) | 2010.11.18 |
<물새의 초경> 김경주 (0) | 2010.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