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벌의 양복/손순미
한 벌의 그가 지나간다
그는 늘 지나가는 사람
늘 죄송한 그가
늘 최소한의 그가
목이 없는 한 벌의 양복이
허공에 꼬치 꿰이 듯
케이블카처럼 정확한 구간을 지키듯
신호등을 지나 빵집을 지나
장미연립을 지나
가끔 양복 속의 목을 꺼내
카악- 가래를 뱉기도 하며
한 벌의 양복으로 지나간다
대주 연립 206호 앞에서 양복이 멈췄다
길게 초인종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양복이 열쇠를 비틀어 철문 한 짝을 떼어내자
철문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 가족들이
TV를 켜놓고 웃고 있었다
가족들이 양복을 향해 엉덩이를 조금 떼더니
이내 TV속으로 빠져들었다
양복이 조용히 구두를 벗었다
한 벌의 그가 양복을 벗었다
모든 것을 걸어두고 나니
그저 그런 늙은 토르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벌도 아닌 양복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가
어두운 식탁에서 최대한의 정적을 식사한다
―『칸나의 저녁』(서정시학, 2010)
2010-12-09 / 오전 10시 33분 / 목요일
출처 : http://poemis.com/bbs/view.php?id=g_poem&no=990
<시 속에 단어>
토르소 [(이탈리아어)torso] [명사]<미술> 머리와 팔다리가 없이 몸통만으로 된 조각상.
출처 : 삼각산의 바람과 노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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